18화
“뭣이?”
채악진의 심장이 벌컥거렸다.
도둑을 잡기 위해 밖으로 나갔던 두경모가 채가장으로 돌아와 곧바로 보고를 올렸다.
“대체 그놈이 누구란 말이더냐?”
“그건…… 소인도…….”
“정체도 모르고, 그놈을 잡지도 않고 그냥 왔다는 것인가?!”
“죄송…… 합니다. 그자는…….”
두경모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채악진은 답답했다.
“그자가 왜?”
“화산파의 제자였습니다.”
고개를 숙인 두경모를 보며 채악진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무림인이 아니더라도 구대문파의 명문인 화산파를 모를 순 없었다.
“그자가 강한가?”
“죄송합니다.”
두경모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하, 아무리 화산파 제자라고 해도 한 명밖에 안 되는 놈에게 전부 당하다니…… 돈값을 못하는군. 꼴 보기 싫으니 물러가라!”
“송구합니다.”
두경모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대로 서재에서 물러났다.
채악진은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앉았다.
‘대체 화산파 제자가 왜?’
황천연을 훔치고는 제 발로 찾아오겠다 전언을 보내다니.
‘아니야. 차라리 잘됐어. 잘하면 황천연을 찾을 수 있을 테니. 일단 놈이 원하는 대로 만나 무슨 말을 하는지 듣는 게 순서겠군.’
채악진은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채악진은 하루 종일 서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책을 보면서도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물건을 훔쳐간 인물의 정체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밤이 깊었다.
채악진의 눈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슬슬 감기기 시작했다.
“아…… 하아암…….”
그리고 저도 모르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 순간.
“허억!”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곳에 검은 인영이 나타나 있었다.
“누구…… 요?”
약관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
“……!!”
입꼬리를 올린 고진유가 옆에 놓인 의자를 집어 들고 앞에 앉았다.
“많이 기다렸소?”
“그, 그 물건은 어디 있소?”
채악진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어떤 물건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히 말하는 게 어떻소이까? 세상에는 워낙 다양한 물건이 많아서 말이오.”
‘큭, 약은 놈이로다.’
채악진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황천연. 황천연은 어디에 있소?”
“흐음, 이상하군. 내가 알기로 그 물건은 벌써 한 달 전에 잃어버렸을 텐데.”
‘이…… 자가……!’
채악진은 고진유의 한마디에 확신했다.
단순한 도둑이 아니었다.
황천연을 일부러 훔친 게 틀림없다.
“그, 그대와 우린 아무런 사이도 아니거늘,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청년은 채악진이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원한 관계도 아니었다.
“눈치챘소? 하긴, 똑똑하다고 소문난 가문이더이다.”
“…….”
“그런데 어째 인망은 써억 좋지 않던데. 한림학사까지 배출한 가문이…… 흐음, 아! 그것도 뇌물 덕분인가?”
숨겨놓았던 치부를 들긴 탓인지 채악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자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지?’
“후후, 궁금할 건 없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외다.”
“대체 내게 왜 그러시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잘못이라. 흐음, 채가장 앞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소이다.”
‘설마……?’
채악진도 잘 안다.
누명을 씌우고 쫓아낸 하인의 노모.
당연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번에 그의 인상이 굳어졌다.
“노파가 앉아 있더이다. 늙으신 분이 얼마나 억울했으면 차가운 바닥에, 그것도 목에 팻말을 걸고서 그 오랜 시간을 앉아 있겠소이까?”
“…….”
채악진은 말문이 막혔다.
황천연을 훔쳤다며 노파의 아들을 한 푼도 주지 않고 쫓아냈다.
이미 그 물건은 채가장에서 도둑맞을 수 없었다.
“이건 아니지 않소이까? 많이 배웠다는 사람이 할 짓인지 모르겠더군. 제발 세상 더럽게 살지 맙시다. 어디 떼먹을 돈이 없어 수십 년 동안 당신네들을 위해 고생한 사람에게 할 짓이오? 당신이 공부한 사서삼경엔 그리 적혀 있나 보군?”
“…….”
“내 말에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니 찔리긴 하시는가?”
아니, 그래서 내 황천연은 어디 있는데?
그럼에도 지금 채악진에게 중요한 문제는 황천연을 빨리 회수하는 일이었다.
그의 얼굴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쯧, 아직 멀었군. 인성은 공부와는 상관이 없는 모양이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전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 덕에 오늘 중요한 걸 알게 됐소.”
고진유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당신은 나에게 답을 물었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소. 그 일을 할지 말지는 본인이 판단하는 것이지요.”
스윽.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소이다. 그대가 앞으로 그 물건을 보게 될지 아닐지는 스스로 판단하시오.”
스르르르르-
채악진이 보는 그 자리에서 고진유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귀신…….’
사라진 고진유의 자리를 보자, 귀신같이 서재에 들어와 물건을 훔치고 달아난 게 이해가 되었다.
온몸에 기운이 빠졌다.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황천연을 찾아와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채악진은 날이 밝아지는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다.
후다다닥!
서재에서 나온 그는 다급히 두경모를 불렀다.
“두 호위, 혹시 춘복이 집을 아는가?”
“대충 어디에 있는지 알고는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이번 사건까지 합쳐 그를 더 괴롭히려는 것인가?
두경모가 주저하며 물었다.
“일단 빨리 앞장을 서게.”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창고를 열어서 수레 가득, 최대한 많이, 아무거나 싣도록 하게.”
“수레에…… 말입니까?”
“뭐 하고 있나! 빨리 움직이지 않고.”
채가장의 아침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 * *
웅성웅성.
마을 전체가 시끄러워졌다.
채가장의 장주가 직접, 그의 하인이었던 춘복의 집에 찾아가 사과를 했다.
도둑맞았다는 황천연을 다른 장소에서 찾았다고.
의심해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수레에는 마을 사람들이 멀리서도 볼 수 있을 만큼, 심지어 밖으로 흘러내릴 만큼 쌀과 고기들이 가득했다.
순박한 춘복과 그의 노모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그를 용서했다.
집밖에서 그 장면들을 쳐다보던 마을 사람들이 한마디씩 수군거렸다.
“어허. 춘복이가 사람이 좋구만. 그렇게 두들겨 맞은 뒤 쫓겨나지 않았나.”
“그러게 말이네. 하지만 어쩌겠나. 저리 용서를 비는데…… 아이고, 춘복이가 마음이 너무 좋아.”
채악진이 돌아간 후에도 마을 사람들은 하루 종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소곤거렸다.
후루루룩!
고진유는 육면을 그릇 통째로 들고 시원하게 마셨다.
“크으, 국물이 진해서 좋네.”
타악.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자, 탁자 앞에 다섯 명의 사내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내게 볼일이 있는 모양이지?”
인양을 포함한 그들은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하게 섰다.
“배가 고파서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야?”
“저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공자님께서 하신 일이 맞습니까?”
“내가 뭘 했다는 건데?”
고진유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채가장의 장주는 스스로 그런 행동을 할 인물이 아닙니다.”
“흐응, 그런가?”
“네. 확실합니다. 공자님께서 분명 채가장의 장주를 만난 것이지요? 그가 오늘 한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만나서 이런 일을 했다는 거야?”
“넵, 확실합니다. 공자님께서 그의 서재에서 중요한 물건을 훔친 것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장주가 저리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하, 제법이야. 상황 판단이 빠르네. 다른 일을 해도 충분히 먹고살겠는데.”
‘역시…… 이분께서 움직이신 게 맞았어.’
인양의 추측에 정확한 대답을 안 했지만, 거의 인정하는 듯한 대답.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의 서재에서 무엇을 가지고 나오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글쎄, 궁금한가?”
“……굳이 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제가 예측한 물건이 아닐까 궁금한 것뿐입니다.”
“오호, 그게 뭔지 예측했다고? 말해봐. 내가 무엇을 훔쳤다고 보는 것이지?”
인양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진유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 조용히 속삭였다.
“……황천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짝짝짝!
고진유는 박수를 쳤다.
“그 머리라면 어떤 일을 해도 잘하겠어.”
“고맙습니다.”
“혹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장사도 하면 잘할 것 같은데.”
“누가 저희들 같은 놈들에게 장사를 가르쳐 주겠습니까?”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배울 생각은 있고?”
“그, 그럴 수만 있다면 무조건 배우겠습니다!”
“좋아. 내가 알고 있는 상단이 있다. 연주상단에 소개장을 써줄 테니 그곳에 가봐.”
“정…… 정말이십니까?”
“장사를 하고 싶다면 열심히 하면 돼. 소개를 시켜주지. 단, 괜히 내 얼굴에 먹칠할 생각하지 말고. 이상한 소리 들리면 죽을 줄 알아. 알겠지?”
“옙!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다섯 명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소리쳤다.
고개를 드는 인양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방금 연주상단이라고 하셨지?’
얼마 전에 들은 소문이 기억났다.
살군검 남궁인을 꺾은 젊은 무인.
연주상단을 도와준 화산파의 제자!
‘이분이시구나!’
인양은 고개를 들어 무한의 존경심으로 고진유를 보았다.
‘역시…… 명문 화산파의 제자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보다!’
* * *
‘망할 새끼…….’
채악진은 손이 부들부들거렸다.
손수 수레를 끌고 춘복의 집에 찾아갔다.
다행히 소문은 좋게 났다.
분명 그놈도 알고 있을 터.
‘이 정도로 했으면 믿겠지.’
빠드득.
서재에 앉은 그는 노기를 이기지 못해 이빨을 갈았다.
‘자존심은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네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아침 일찍 찾아가 춘복 모자에게 사과한 일은 진심이 아니었다.
황천연을 무사히 돌려받기 위해 거짓으로 한 행동.
채악진은 채가장으로 돌아온 뒤 두경모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놈을 상대할 수 있는 무인들을 최대한 끌어모아라.”
황천연만 돌려받으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아무리 그 화산파의 제자라고 해도 놈은 혼자다.
“장주님…… 그가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그냥 받으시는 게…….”
“시끄럽다! 그놈이 그것만 가지고 간 게 아니다. 빨리 가지 않고 뭐 하느냐!”
“……알겠습니다.”
그를 화나게 하면 상황이 더 악화될 텐데.
걱정스러웠지만 두경모는 다급히 하오문을 통해 용병 무인들을 부탁했다.
하오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루도 지나기 전에 오십 명의 귀살단(鬼殺團)을 불렀다.
광동성 일대에서 제법 강한 기세를 가졌다고 알려진 용병단.
채악진은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 빨리 나타나라. 그 순간이 제삿날이 될 것이니라!’
* * *
휘이익.
고진유는 소리를 죽이며 채가장으로 들어섰다.
‘어허, 이것들 봐라.’
서재 주위로 흐르는 살기.
감춘다고 감췄지만 고진유의 감각을 피할 순 없었다.
‘아침에 한 행동은 보여주기였군. 하긴 사람이 쉽게 변할 순 없지.’
서재 주위엔 호위 무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쯧, 많이도 끌어모았군.’
적어도 일백의 수는 되어 보였다.
‘흐음, 미련하게 한꺼번에 싸울 필요는 없지.’
괴도에서 흑괴들을 상대했을 때처럼, 한 놈씩 찾아내서 처리하는 방법.
‘서재로 가는 길목부터 시작해 볼까?’
스스스-
호충신법의 무음무형.
고진유는 이 초식의 이름을 무존신(無存身)이라 지었다.
귀살단 용병들은 서재 부근에 몸을 숨긴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시진이 지났는데, 오늘 오긴 하는 건지 모르겠군.”
“크크크, 설마 우리 용병단의 소문을 들은 거 아냐?”
“그건 모르지. 안 오면 더 좋고. 여하튼 우린 돈만 받아 가면 되지 않냐.”
그때,
쿡. 쿡.
갑자기 시시덕거리던 용병들이 픽픽 쓰러졌다.
‘누구냐?!’
‘모, 목소리가 안 나와?’
바닥에 쓰러진 용병들은 대경실색하여 발버둥 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혈을 누른 것뿐이니 죽진 않을 겁니다.”
낮게 웃는 듯한 목소리가 울리고.
퍽퍽퍽퍽퍽.
서재로 다가서는 길에 숨어 있던 귀살단 용병들과 채가장의 호위 무사들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차례대로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점혈을 당한 순간까지 그들은 상대가 누군지도, 어떻게 당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서재 부근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귀살단 단주 미흉은 불길한 기분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갑자기 더러운 기분이 드는 것이?’
다급히 수하들에게 귀살단 신호를 보냈지만 돌아오는 신호는 절반도 안 되는 상황.
‘이 내가 기를 전혀 못 느낄 정도의 고수란 말인가?’
하오문을 통해 들어온 의뢰의 표적은 딱 한 놈이었다.
미흉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두경모, 똑바로 말해라! 상대가 누구지?”
당황한 두경모가 입을 열려는 찰나.
휘익!
“안녕하시오?”
그들 앞으로 고진유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