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7화 (17/425)

17화

찰칵.

마지막 아홉 번째 걸쇠 조각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투욱.

왼손으로 잡고 있던 여의주가 흔들리며 빠졌다.

‘하하, 예전 실력이 죽지 않았어.’

고진유는 용 조각상에서 떨어진 여의주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스윽.

그러고는 용 조각상의 몸통을 잡고 들어 올리자, 바닥과 연결된 받침대 부분이 떨어졌다.

‘무엇이 들어 있을까나?’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낸 고진유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무기명 전표? 이거 대박인걸.’

총 스무 장의 전표들.

중원이대상국인 중원상국의 인장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자자, 이렇게 좋은 것은 챙기고…… 사부님도 이해는 하시겠지. 사부님, 이걸로 나중에 불쌍한 사람들 도와주겠습니다.’

고진유는 전표들을 얼른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스윽.

그리고 천에 싸여 있는 물건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채가장에 찾아온 목적.

스르륵.

‘오호, 정말 귀한 물건인데.’

천을 풀자,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나타났다.

섬세하게 조각하여 만든 벼루로, 예술품이라 칭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

‘장주, 좋은 물건 잘 가지고 갑니다~’

스르르륵-

고진유의 신형이 나타날 때처럼 소리 없이 서재에서 사라졌다.

* * *

다음 날 아침.

“아아아아악!!!”

채가장의 새벽을 깨우는 괴성이 서재에서 울려 퍼졌다.

채악진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

용 조각상이 열린 채 바닥에 놓여 있었다.

‘없어! 전부 다 사라졌어!!’

태사에게 줄 황천연까지 사라졌다.

게다가 적게는 만 냥부터 많게는 황금 백 냥짜리의 전표들 모두를 남김없이 도둑맞았다.

휘청.

그는 제대로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큰일이다. 도둑맞아 잃어버렸다고 하면 태사가 믿지 않을 게야.’

태사가 어떠한 인물인지 잘 알았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는 인물이다.

돈도 돈이지만, 당장 급한 것은 태사에게 줄 황천연을 되찾는 것이었다.

후다다닥!

비명을 들은 채가장의 일꾼들이 서재로 빠르게 달려왔다.

“장주님! 무슨 일이시옵니까?!”

타아앙!!

채악진은 서재 밖으로 나와 문을 다급히 닫았다.

‘서재에 도둑이 들어 황천연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없어!’

황천연은 이미 한 달 전에 잃어버렸어야 할 물건이니까.

“자, 잠시 놀랐을 뿐이다. 아무 일도 아니니 모두 물러가서 하던 일이나 해라.”

“아…… 네에…… 장주님.”

일꾼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다시 돌아갔다.

휘익!

채악진은 노기를 뿜어내며 호위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더냐?”

“그건…… 저희들도 잘 모르겠습니다. 서재 근처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뭣이라?”

파악!

그는 신경질적으로 다시 서재의 문을 열었다.

용 조각상이 받침대에서 떨어져 서재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금 저걸 보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텐가?”

“…….”

호위 무사 두경모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도둑이 든 게 확실했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인기척은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밤새 서재 앞에서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도둑이 들어와 무엇인가를 훔치고 달아났다.

채악진의 비명 소리로 보아 중요한 물건임은 확실했다.

“송구합니다, 장주님. 잃어버린 물건이 무엇입니까?”

“큭, 끄으응……!”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신음만 뱉었다.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수백만 냥의 전표들과 한 달 전에 도둑맞은 황천연이라고?

당연히 이들에게도 알려줄 수 없었다.

‘젠장……! 젠장!!’

“됐다! 그 물건은 본 가에서 내려온 가보이니 말해줘도 모를 것이다! 그보다 지금 당장 사람들을 풀어 양산 일대에서 이런 짓을 할 만할 도둑놈들을 알아내라. 모두 잡아들여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두경모는 허리를 숙인 후 빠르게 채가장을 나섰다.

털썩.

채악진은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 일을 어찌할지…….’

황천연을 찾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게 틀림없다.

그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용 조각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마을 일대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채가장에서 나온 호위 무사들이 사방을 뒤져가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두경모는 하오문의 정보를 통해 양산현 일대에서 활동하는 좀도둑들의 신원들을 모두 알아냈다.

‘갑자기 저 새끼들이 나를 왜 찾아?’

인양은 인상을 쓰며 마을 구석에서 호위 무사들을 주시했다.

객잔의 점소이 중 친한 놈 한 명이 다급히 알려주지 않았다면 뭣 모르고 잡혀갔을 터.

‘에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여기를 떠나 있어야겠어.’

소낙비는 잠시 피하면 된다.

인양의 무리가 호위 무사들의 시선들을 피해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는 순간.

“잠깐. 멈춰라.”

“……!!”

언제 뒤로 다가왔는지 채가장의 호위 무사가 길을 막아섰다.

“헤헤…… 무슨 일이십니까?”

“네놈들이 야도파(夜盜派)라는 좀도둑 새끼들인가?”

꿀꺽.

그들 주위로 호위 무사들이 모여들며 포위를 했다.

인양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허둥거렸다.

“도망갈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좋을 게다. 사지를 그대로 몸에 남기고 싶다면.”

두경모가 살기를 내뿜었다.

“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희들이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인양은 떨리는 몸을 겨우 참아내며 물었다.

“그건 채가장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조용히 따라가면 네놈들의 신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죄도 없는데 무슨 일인지 알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순히 잡혀갔다가는 곱게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새끼가…… 한번 맛을 봐야지 조용히 따라오겠군.”

채애앵!

그렇게 두경모가 검을 뽑으며 인양을 향해 내리치려고 할 때.

따악!

그의 손등으로 동전 하나가 날아왔다.

“아악!”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보시오. 무슨 일인지 모르나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위험한 물건을 휘둘러서야 되겠소?”

두경모가 반대편 손으로 손등을 문지르면서 다가오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어떤 놈이냐!”

경장 무복 차림에 허리에 검을 찬 청년.

‘무림인인가?’

굳어진 두경모의 표정과 달리 인양의 표정은 밝아졌다.

‘저분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세주를 본 듯한 표정.

“……소협은 이들과 무슨 사이오?”

두경모는 떨어진 검을 주워 들며 고진유를 주시했다.

척!

인양의 어깨에 손을 올린 고진유가 두경모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안면이 있는 사이외다.”

‘어, 언제 내 옆에 왔지?’

인양이 놀란 눈으로 고진유를 올려다보았다.

“보아하니 어딘가에 속해 있는 무인들 같은데, 이 친구들을 잡아가려는 이유가 뭡니까?”

“……우린 채가장의 호위 무사들이오. 이유는 그대에게 알려줄 수 없소만, 잠시 물어볼 것이 있을 뿐이니 상관 마시오.”

“내 눈이 이상한가 봅니다. 방금까진 죽일 듯이 끌고 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

대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두경모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저자는 일류 이상은 아니다. 거기다 한 명밖에 없고. 우린 열다섯 명이지.’

일류에 든 무림 고수들만 해도 자연스러운 내기가 몸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에 비해 눈앞에 선 청년의 무공은 강해 보이지 않았다.

“소협, 더는 본인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겠소이다. 그만 물러나시오.”

자신감이 생겼는지, 두경모의 얼굴색이 변하며 목소리가 강압적으로 변했다.

“어라.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이구려. 물러나지 않겠다면 나도 죽일 텐가?”

“그대가 원한다면…… 경고했소. 지금부터는 후회해도 늦소이다.”

“누가 후회하게 될지 보고 싶군요.”

고진유가 인양의 어깨에 걸친 팔을 내리자,

후다다닥!

두경모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빠르게 물러났다.

“저놈을 잡아라!”

“넵!”

타앗!

채애애앵-!!

호위 무사들이 고진유를 향해 달려들었다.

‘확실히 차이가 나는구나.’

지금까지 상대했던 흑귀들과 남궁인에 비하면, 호위 무사들의 무위는 어린아이와 비슷했다.

고진유는 서 있던 자세 그대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위 무사들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한 명씩 그려졌다.

그리고 호위 무사들이 펼친 열네 개의 검이 일 장 안에 들어온 순간,

‘확실하게 실력 차이를 보여줘야 다시 공격하지 않겠지.’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파아아앗--!!

고진유의 내력에서 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호위 무사들의 앞에서 피어나는 아득한 향기.

그들이 매화 향기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것…… 은……!’

호위 무사들은 눈앞에서 하늘거리며 흩날리는 매화 꽃잎들을 멍하니 보다 제자리에 멈췄다.

퍼어엉!!

매화산우의 초식.

호위 무사들 사이로 흘러가던 매화 잎이 폭죽처럼 터졌다.

“아아악!!”

고진유를 포위했던 호위 무사들의 원구진(圓拘陣)이 단번에 흩뜨려졌다.

“이쪽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쓰러지려고 하면 안 되지!”

번쩍!

한 걸음 내디디며 연이어 펼쳐진 매화비광.

“아아악!!”

붉은 꽃잎을 막지 못한 순간 그들은 이미 끝이었다.

전방에 있던 호위 무사 네 사람의 가슴에 붉은 검흔이 생겼다.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었으나 당장 일어나기는 어려울 정도.

‘우선 전방은 정리했고!’

다음 목표는 후방.

스륵.

매화단심공의 내력으로 펼친 호충신법이 고진유의 발끝에 맺혔다.

괴도에 있을 때와 달리, 내력이 익숙해지면서 고진유의 신형 뒤로 매화 향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호위 무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비명을 지르는 것밖에.

단 두 번의 초식에 호위 무사들은 단번에 전의를 잃었다.

번쩍!

그들은 고진유가 펼친 검을 막을 수 없었다.

두경모의 손이 덜덜 떨렸다.

‘매화 검법이다.’

중원 무림에서 오직 화산파의 제자만이 펼칠 수 있다는 무공.

‘잘못 걸렸어. 하필이면 저자가 화산파 제자일 줄이야……!’

퍽, 퍽! 퍽.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며 수하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졌다.

다행히 목숨은 모두 붙어 있었다.

“더 할 텐가?”

툭툭.

등 뒤에서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

“허억!”

“어딜 보고 있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청년의 모습이 사라졌다.

신법만 봐도 그의 무공이 어떠한지 느꼈다.

“끝까지 가겠소?”

“……아…… 닙니다. 당장 물러나겠습니다.”

“이제 누가 후회할지는 명백하군.”

“죄, 죄송합니다. 소인이 화산파의 제자이신 줄 몰라 뵈었습니다.”

“좋아. 사과를 하니 한 번은 받아주지. 대신 채가장에 돌아가거든 장주에게 내 말을 전하도록.”

죽다가 살아난 두경모는 한숨을 내쉬다, 청년이 속삭이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조용한 시간에 찾아가겠다고.”

“……!”

“용 몸통에 있던 물건을 본인이 가지고 있다고 하면 알 거외다. 그만들 가보시오.”

‘용 몸통?’

용 조각상이 분명했다.

‘이…… 자다.’

두경모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자가 어젯밤 장주의 서재에서 물건을 훔치고 달아난 인물이 확실했다.

“정말로…… 찾아오실 겁니까?”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까지 하면서 도망가겠나?”

“알겠…… 습니다.”

대체 그 안에 무엇이 들었기에?

“아 참, 괜히 주위에 이상한 애들 숨겨놓다 걸리면 그냥 돌아간다고 전하게. 그렇게 되면 물건은 영원히 찾지 못할 테지.”

‘도둑이 제 발로 돌아온단 말인가?’

두경모는 마지못해 돌아서면서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의아했다.

채가장의 호위 무사들이 떠나면서 한바탕 소란이 지나갔다.

“와아…….”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인양은 존경의 눈빛으로 고진유를 우러러보았다.

‘화산파의 제자셨구나! 소문처럼 대단해.’

그가 돌아서며 다가왔다.

인양은 얼굴을 직접 쳐다볼 수 없었다.

“괜찮아?”

“아, 네에……! 고맙습니다.”

“이젠 별일 없을 거다.”

인양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채가장의 호위 무사들은 양산 일대의 좀도둑들을 잡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그건…… 채가장에서 중요한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거지.’

호위 무사가 나타나서 찾을 정도라면 당연히 보통 물건을 아닐 거고.

‘누가 훔친 건지 모르니까 일단 우리들을 끌고 가려고 했던 거야.’

근데 범인은…….

고진유를 올려다보았다.

‘이분이 채가장에서 중요한 물건을 훔쳤어!’

인양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타악.

고진유는 한 손으로 인양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내 말 맞지?”

“네? 어떤 거 말씀이세요?”

“도둑질이라는 게 끝이 이런 거야. 내가 훔치지 않아도 오해를 받아 목숨을 잃을 수 있어. 웬만하면 이 세계에선 빨리 손을 떼는 게 좋아.”

“아! 넵……! 알겠습니다.”

툭툭.

고진유는 인양의 어깨를 다시 한 번 더 두드리고 돌아섰다.

인양은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저분의 말씀이 맞아.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어.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맞아.’

인양은 이곳을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단, 채가장의 일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고 난 뒤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