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6화 (16/425)

16화

힐끔.

인양은 앞장서 가며 연신 눈치를 보았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그의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다.

“저어…….”

“할 말이 있나?”

“아, 아닙니다. 조금만 더 가면 객잔이 보일 것입니다.”

“수고했어.”

“아, 네에…….”

인양은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막상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방금 전에 보았던 솜씨.

그들의 세계에서 그건 환상의 기술이었다.

‘으…… 배울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어떻게 말해볼까?’

인양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게 익히기만 한다면 세상의 돈은 모두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진짜 한번 말해볼까?’

호양객잔이 보이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멈칫.

고진유는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무, 무슨 일이십니까?”

“저기. 무슨 일이지?”

고진유가 가리킨 방향엔 목에 팻말을 건 노파가 바닥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도와주세요.

도움을 원하는 노파.

고진유는 노파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노파 앞을 그냥 지나쳐 갔다.

“그게…… 아들 춘복이 때문입니다.”

“아들?”

“네, 이 마을 유지인 학자 출신 채씨 가문에서 일하다 최근 그만두었지요.”

인양이 노파의 사정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을 그만두면서 이십 년 동안 일한 대가를 요구했는데, 도리어 물건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고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났다는 이야기.

심지어 거의 죽을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은 뒤 쫓겨났다고 했다.

“뭘 훔쳤다는데?”

“송대황제의 하사품인 황천연(皇天硯)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정말로 훔친 건 맞고?”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의 집을 샅샅이 뒤졌지만 물건은 찾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물건도 못 찾았는데 도둑으로 몰았다는 말이군?”

“네에…….”

“도둑으로 확신한 이유는 뭐지?”

“장주의 서재에서 일하던 하인이 그뿐이라고 합니다.”

“흐응…… 안 봐도 그림이 나오는군. 채가장주란 놈이 완전 개새끼네. 글깨나 배웠다는 사람이 더 악질이군.”

고진유는 욕이 바로 튀어나왔다.

딱 봐도 답이 나왔다.

몇십 년 동안 일을 시켜먹고는 돈을 주기 싫어 누명을 씌운 뒤 쫓아내는 경우.

탐욕귀 왕진만도 자신이 부린 사람에게는 이런 적 없었다.

‘전부 저 노파를 분명 봤을 텐데…… 한 명도 관심을 보이지 않네.’

노파는 길가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힘이 없는 자의 슬픔이 느껴지는 모습.

‘사부님과 한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무공을 배우기 전 사부 오청석과 약속을 했다.

-무공을 익힘에 있어 약자를 도와주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측은지심.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몰라도, 사부 오청석의 말씀을 모르는 척하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누가 봐도 억울한 사건 같은데. 관에 이야기하면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지 않나?”

“공자님, 그게, 이곳의 현령도 채가장의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고진유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관에서 똑바로 처리했다면 노파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지 않을 것이었다.

“관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뭔데?”

“채가장의 사람 중 중앙 정계 쪽에서 현재 한림학사의 직책을 지니고 있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배운 게 없더라도 한림학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흐응, 대단한 집안이군. 채가장에 대한 다른 소문은?”

“저어……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채가장에서 일한 사람들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채가장의 장주 서재에 가면 귀한 물건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뭐…… 저희들도 한 번쯤 털어볼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곳을 지키는 호위 무사들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장사꾼 집안도 아니고, 책이 쌓여 있어야 할 집에 쓸데없는 것들이 많다는 거군.”

물끄러미 노파를 바라보던 고진유는 곧바로 돌아섰다.

“그렇군. 잘 들었다. 객잔으로 안내해.”

“……?”

인양은 멀뚱히 고진유를 쳐다보았다.

“안 갈 거야?”

“아…… 아! 네에. 죄송합니다.”

인양은 왠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노파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으니 어쩌면 도움을 주려는 게 아닐까 살짝 기대감이 들었던 것.

‘하긴. 남의 일에 누가 나선다고. 채가장이라면 더 가만히 있어야겠지.’

인양은 이후 입을 굳게 다물고 호양객잔으로 안내를 마쳤다.

“도착했습니다. 여기입니다.”

“수고했어.”

꾸벅.

인양과 네 명의 청년들이 인사를 했다.

“들어가서 쉬십시오. 저희들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받아. 수고비야.”

티이잉!

고진유는 손가락을 튕겼다.

인양이 날아오는 물건을 얼른 잡았다.

“허억! 이건 금화가 아닙니까!”

눈이 번쩍 뜨였다.

금화를 받은 손이 살짝 떨렸다.

“저어, 공자님. 수고비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 호주머니 털 생각하지 말고 젊을 때 다른 일 찾아. 네놈들 솜씨로는 딱 잡히기 알맞으니까. 그걸로 일자리 찾는 당분간은 잘 지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들키지 않았습니다…….”

고진유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쯧, 언제까지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잡히기 전에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 한때 선배로서 해주는 충고야. 네놈들이 하는 짓은 백번 잘해도 한 번 걸리면 끝이라고. 안 그래? 다행히 안 죽으면 손모가지 날아간다?”

인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또한 언제가 손을 떼지 않는 이상 운명의 끝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됐어. 그만 가봐.”

“고, 고맙습니다, 공자님…….”

인양은 허리를 숙인 뒤 물러났다.

사라지는 그들을 보던 고진유도 몸을 돌렸다.

‘충고는 해줬으니 뒷일은 알아서 하겠지.’

* * *

끼이익-

객실 문을 열었다.

한눈에 봐도 낡아 보이는 침상과 탁자들.

게다가 객실 전체에서 코를 찌르는 냄새가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고진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설이 좋다고 하지 않았나?”

털썩.

한숨을 한 번 쉰 고진유는 침상에 누워 멍하니 눈을 뜬 채 객실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격세지감(隔世之感).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괴도에서 거의 옷도 입지 않고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할 판에 안 되지.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해. 사부님이 계셨다면 야단을 치셨겠지.”

고진유는 침상에서 일어나 바로 앉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매화단심공의 구결을 외우며 운기를 일으켰다.

육지에 나오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우우웅-

단전에서 흘러나온 내기가 백회까지 치솟아 오른 뒤 용천혈까지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소주천을 한 번 마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괴도에서보다 두 배 이상 걸렸다.

‘그래도 너무 늦어.’

운기행공 속도에 최선을 다해 신경을 썼다.

처음 육지에 나왔을 때보다 운기행공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긴 했다.

다만 여전히 괴도에서 했던 운기행공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주천을 한 번 해도 얻게 되는 내공의 양 또한 훨씬 적었다.

‘이러다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던 내공 고수가 언제 될 수 있을지. 시간 나는 대로 더 자주 하는 수밖에 없겠네.’

고진유는 속으로 투덜대며 운기행공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현재 그가 보여주는 소주천의 운기행공 시간은 무림인들과 비교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당연히 같은 시간 내에 운기를 통한 내력의 양도 더 많았다.

결국 지금대로라면 고진유의 내력은 일반 무인들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스윽.

눈을 뜨자 밖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객실에 들어온 후 쉬지 않고 운기행공을 했다.

‘이제 가볼까?’

휘이익!

무음무형(無音無形).

내력이 늘어나면서 호충신법도 괴도에서 펼칠 때보다 한층 더 올라섰다.

고진유가 사라진 객실에는 매화 향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 * *

스윽.

채가장(蔡家莊)의 지붕 위로 인영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내력을 숨기고 채가장으로 들어선 고진유.

몰래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쉬웠다.

‘서재를 찾아볼까.’

채가장에서 장주 채악진의 서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장원 안쪽에 불이 환하게 커진 장주전.

서재는 장주전과 붙어 있었다.

‘흐음…… 호위들이라.’

사전에 들은 대로 채가장의 경내는 호위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웃기는군. 유문(儒門)에 호위들이라니.’

호위 무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중한 물건들이 숨겨져 있다는 냄새가 펑펑 풍겼다.

‘배웠다는 사람이 더 멍청한 모양인데. 여기 귀한 게 있으니 가지고 가라는 뜻이잖아.’

고진유의 입가에 실소가 흘렀다.

‘그렇게 원하신다면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봐주지.’

스르르륵-

고진유의 신형이 사라졌다.

서재 주위는 스무 명의 호위들이 지키고 있었다.

서재 안에서는 장주 채악진이 나란히 앉은 청년을 대견스럽게 보고 있었다.

둘째 아들 채문형.

이번에 한림학사로 제수받은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허허허! 이번에도 태사께서 큰 도움을 주셨구나.”

“맞습니다. 그분께서 한림원에 소자를 추천하셨다고 했습니다.”

“고맙긴 하지만, 그분도 예전에 우리 가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지. 서로 돕고 지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

“네. 그렇습니다.”

“그렇지. 황성에 올라갈 때 그 물건을 태사께 전해 드려라.”

“황천연 말이옵니까?”

“그렇다. 태사께서 늘 황천연을 가지고 싶다는 뜻을 보냈느니라. 아깝긴 하지만, 너희들의 출세를 위해 힘을 보태줄 사람이 아니더냐.”

“알겠습니다. 그런데…….”

채문형은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리는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버님, 황천연을 우리들에게서 받았다고 소문이 난다면…….”

“후후후, 그분께서는 입이 무거운 분이시다. 황궁에는 다른 눈들도 많으니 발설하지 않으실 테지. 그리고 그 종놈이 안다고 해서 우리를 어떻게 할 수도 없지 않느냐? 걱정 안 해도 된다.”

채악진의 말이 맞았다.

이곳에서 황천연 사건은 누가 문제 삼을 일도 없었다.

“아버님, 그 물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곳 서재에 잘 숨겨놓았느니라. 이틀 뒤에 떠날 때 네게 주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아버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허허, 아들이 잘되면 아버지도 잘 되는 법이다. 정계에 올라가거든 네 형과 함께 채씨 가문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더 이루어내도록 최선을 다하거라.”

“걱정 마십시오. 저희들이 꼭 아버님을 정계에 다시 올라오시도록 만들겠습니다.”

채악진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십 년 전, 반대 세력에 의해 정계에서 광동까지 밀려났다.

이대로 포기하고 물러날 수 없었다.

‘나를 이곳으로 밀어내고 네놈들은 잘살았느냐? 하나 난 다시 올라갈 것이다!’

채악진은 그를 좌천시킨 인물들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 * *

대애애앵-

대애애앵-

멀리 타종 소리가 두 번 울렸다.

“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탁!

혼자 서재에 남아 있던 채악진은 서책을 덮었다.

“우우우욱.”

한차례 기지개를 켠 그는 마치 빈 공간을 보듯 한쪽 방향을 짧게 주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건 내일 마저 읽어야겠어.”

파악.

채악진이 불을 끄고 장주전으로 나서자, 서재는 금세 어둠으로 물들었다.

호위 무사는 그가 나간 뒤에도 서재 앞에 장승처럼 선 채 눈을 부릅떴다.

얼마 후.

‘이제 내려가 볼까.’

스륵-

서재 바닥으로 내려앉은 고진유의 신형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지금이라면 황궁무고도 털 수 있겠군.’

서재 안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들은 것처럼 값비싼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이것들도 좋은 물건이긴 하지만 호위들이 지키고 있을 정도는 아니야. 자, 황천연같이 귀한 물건을 숨겨놓을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어둠 속에서 안력을 높이자 주위의 풍경이 더 자세히 보였다.

고진유는 의자에 앉아 채악진이 바라보던 방향을 주시했다.

‘흐음…… 책장이라.’

기본 중의 기본.

방 안에 비밀 공간을 만든다면 대부분 책장 뒤편인 경우가 많았다.

고진유의 발걸음이 바닥을 스치며 밀려 나갔다.

스르르르-

손바닥으로 책장을 밀면서 조금씩 옮기자,

꿈틀.

손바닥에 미세하게 다른 느낌이 전해졌다.

‘간단한데.’

책장을 밀려던 고진유는 순간 멈칫했다.

‘너무 쉬워. 호위 무사들을 완전히 믿을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책장에서 손을 뗀 후 뒤로 물러난 고진유가 다시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역시 약은 인물이군. 함정이 틀림없어.’

가느다란 구멍들이 수십 개가 뚫려 있었다.

‘마비침을 숨겨놓았군.’

도둑이 들어온다면 책장을 건드릴 거라 미리 예상하고 함정을 만들어놓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서재 안에 있는 고진유의 기를 느끼지 못했다.

‘아직 시간은 많아. 잘 숨겨놓았군. 제법 머리를 썼는데.’

고진유는 다시 한번 채악진이 앉았던 자리에서 전방을 주시했다.

‘저건…….’

책장들 사이에 놓인 동경.

어둠이 짙어 새까매진 동경은 아무것도 비치지 않아 마치 심연처럼 보였다.

‘……보자. 여기서 동경을 봤을 때 비치는 것이라면…….’

고진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모양의 석조상.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 다른 물건들에 비해 둔탁하게 만들어진 석상이었다.

‘이건가.’

고진유는 석조상을 살폈다.

‘안에 공간이 있군. 잠겨 있는 것 같은데? 어딘가에 열쇠 구멍이 있겠어.’

히죽.

용 조각상을 만지던 고진유는 곧 미소를 지었다.

여의주 아래 부분에 작은 원형으로 된 구멍이 만져졌다.

‘찾았다.’

고개를 숙여 여의주 아랫부분을 살폈다.

‘흐음…… 몇 단으로 만들어놓았나.’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그의 검대에는 늘 예비용 철심을 꽂혀 있었다.

‘준비는 늘 철저한 것이 좋지.’

슥슥슥.

철심을 열쇠구멍 안으로 밀어 넣으며 집중했다.

‘하나…… 둘…… 셋, 여섯…… 아홉.’

티이잉!

아홉 개의 미세한 걸림쇠가 부딪혔다.

‘구겹쇠는 처음인데. 누구 솜씨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두께에다 잘 만들었는걸.’

무영도수의 시절에도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잠금쇠였다.

최고의 난이도.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 고진유의 감각은 초미세를 넘어섰다.

‘후후, 아홉 개를 모두 찾았으니 하나씩 당겨 일자로 맞추면 간단하지.’

곧, 고진유의 손가락 끝이 세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