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콰앙!!
왕진만이 책상을 내리쳤다.
그의 앞에 선 이십 대 후반의 사내가 움찔했다.
왕진만은 외동아들인 왕종을 향해 여과 없이 노여움을 터뜨렸다.
“방금 뭐라 했느냐? 내가 탐욕에 눈이 멀었다고? 감히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아버지,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려고 하십니까?”
“돈이라는 건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하는 것이다. 상단에서 자란 놈이 그것도 모른다는 말이냐?”
“맞습니다. 정당하게 장사를 해서 번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고리대부까지 하시면서 연주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습니다.”
콰아아앙!!
또 한 번 책상을 내리친 왕진만의 손이 부들거렸다.
“이놈이…… 내가 불법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더냐? 아들이라는 놈이. 넌…… 내가 나쁜 놈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냐? 당연히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는 게 장사가 아니더냐?”
“아버지. 그게 장사입니까? 사기입니다! 연주뿐만 아닙니다. 광동성 전체에서 뭐라고 부르는 줄 아십니까? 백성을 피를 빨아먹는 광동의 식인 탐욕귀라 부르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탐욕귀라고요!”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넌 장사꾼에 소질이 없다. 부상단주의 직책도 조만간에 상단회의를 거쳐 거두어들여야겠어.”
“아버지, 제발 예전처럼 온화한 분으로 돌아오십시오.”
휘익!
왕진만은 손을 거칠게 내저으며 돌아앉았다.
“시끄럽다. 그만 나가라. 네놈하고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아버지!”
결국 왕종은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왔다.
‘젠장…….’
한 계단씩 내려오면서, 그의 답답한 마음은 더욱더 심해로 빠져드는 듯했다.
* * *
‘왕진만…….’
고진유는 멀리서 연주상단의 정문을 한동안 노려보았다.
그를 지옥혈림으로 보냈던 두 사람 중 남은 한 사람.
벽화당 두목처럼 간단하게 죽일 사항은 아니었다.
더 큰 복수를 위해, 왕진만에게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것을 빼앗기로 정했다.
돈.
식인 탐욕귀란 별명으로 불리면서도 그는 돈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를 잡아서 죽이겠다고 협박해도 절대로 돈은 내놓지 않을 인간이었다.
얼마 전에 강성에서 일어난 사건만 해도 그랬다.
비록 창운상단에서 먼저 공격했다지만 강성 지역은 예전부터 그쪽 관할이었고, 연주상단이 마구잡이로 끼어든 형국이었다.
‘적을 치기 위해서는 적의 적을 이용하라는 말이 있지.’
왕진만에게 가장 골치 아픈 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창운상단.’
연주상단에 대한 최근 소문만 찾아 들어도 강성에서 일어난 사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창운상단이 움직일 거라고 하던데. 세부적인 것들은 그들이 움직이는 걸 보고 상황에 맞게 계획을 세워야겠군.’
큰 방향을 잡은 고진유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끼이익-
상단의 정문이 열렸다.
왕종이 무거운 표정으로 상단을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주변 상가의 주인들이 너도나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왕종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그들에게 일일이 환한 미소로 보답했다.
“후 아저씨, 장사가 잘됩니까?”
“네, 그럭저럭 하고 있습니다.”
“음…… 그러면 큰일인데요. 혹시 제가 도울 일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저번에도 도련님께서 도움을 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괜히 저희들 때문에 왕 상단주님께 야단맞지는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괜찮아요. 그 정도 야단은 충분히 흘려들을 수 있으니까요.”
“저희들 때문에…… 너무 고맙습니다.”
“하하,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세요.”
“네, 도련님.”
상인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눈 왕종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상가가 떠들썩해졌다.
“왕 도련님을 볼 때마다 정말 믿기지가 않는단 말이야.”
“자네도 그런가? 어떻게 상단주에게서 왕종 도련님처럼 착한 분이 나오셨는지. 정말 의문이야.”
“어휴, 그것도 모르냐?”
“뭐, 자네는 아는가?”
“당연하지, 도련님의 돌아가신 모친이 누구신가? 우리들에게 항상 인자하셨던 마님이 아니신가.”
“음…… 그러고 보니 자네 말이 맞군. 하긴 왕 상단주도 그분께서 돌아가신 뒤부터 많이 바뀌었지.”
“휴우, 마님께서 살아만 계셨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상인들은 안타까운 듯 저마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흠……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군.’
오 년 전에도 왕종은 착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동안 이십 대 후반의 나이로 부상단주 직책도 맡았다고 했다.
왕종은 부상단주가 되면서 예전보다 발언권이 커졌지만, 그 문제 때문에 늘 왕진만과 다퉜다고 했다.
오늘도 그의 표정으로 봐서, 왕진만과 다툰 뒤 술을 마시러 가는 것처럼 보였다.
‘부상단주라…… 한 번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는데.’
* * *
탁.
왕종은 한입에 술을 털어 마신 뒤 술잔을 내려놓았다.
“크으…….”
연거푸 술잔을 비운 탓인지 취기가 올라왔다.
어질어질한지 자리에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망할…… 놈의 세상. 돈이 뭔지.’
이미 상단에 쌓아놓은 돈만 해도 광동성을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탐욕은 끝이 없었다.
‘정말로 방법이 없다는 것인지. 이대로 가다가는 한꺼번에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왕종의 걱정은 연주상단이었다.
연주에서 시작된 작은 상단은 어느덧 광동에서도 이름깨나 알려진 중견 상단의 규모를 넘어서고 있었다.
여기서 적당히 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한꺼번에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까지 올라온 것이다.
왕종이 보기에 강성의 사건은 심각했다.
창운상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곳은 남궁세가의 본 상단인 창천상단에 속해 있었다.
‘아버지도 알고 계시면서…… 탐욕 때문에 아예 눈을 돌리고 계신다.’
남궁세가에서 이 일로 문제를 삼는다면, 연주상단은 최악의 상황에 빠질 수 있었다.
“휴우…… 어떻게 하면…….”
쪼르르-
왕종이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슬금슬금.
그때, 왕종의 뒤로 한 사내가 자연스럽게 옆을 지나가려는 듯 다가왔다.
다만 사내의 시선은 한곳에 집중되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도 눈치를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사내는 소매에 손을 넣으며 거리를 좁혔다.
손을 뻗으면 왕종과 닿을 수 있는 거리.
스으으-
그리고 소매에 들어갔던 손이 천천히 빠져나오려는 찰나,
휙!
그의 눈앞에 불쑥 검이 튀어나왔다.
“잠깐. 다치기 전에 그만 멈추지?”
사내의 동작이 일순간 멈추고, 옆자리에서 검을 겨눈 청년이 일어났다.
‘한 놈이다.’
파앗!
사내는 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고자 허리를 비틀었다.
“어딜!”
쿠욱.
충분히 물러났다고 확신했지만 청년의 검은 여지없이 그의 목을 향해 따라 왔다.
‘큭, 간단한 의뢰라고 하더니!’
파파파파팟!!
소매 끝에서 수십 개의 비수들이 쏟아졌다.
휘이이익!
고진유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호충신법의 탈각신형(脫殼身形).
퍽퍽퍽퍽퍽!
수십 개의 비수들은 그대로 허공을 지나쳐 벽에 박혔다.
“제법이야. 처음으로 깜짝 놀랐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푸욱.
검 끝이 사내의 점혈을 눌렀다.
사내는 단번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검을 든 고진유를 보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누구신지……?”
“그건 알 필요 없고.”
왕종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술잔을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건 나중에 마시고 잠시 뒤로 물러나시오.”
“아…… 아, 알겠소.”
고진유의 말대로 왕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순식간에 탁자에서 물러났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왕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사람을 왜 죽이려고 한 거지?”
“…….”
사내는 몸만 움직이지 못할 뿐이었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살수는 죽음으로 청부자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택해도 경혈을 눌린 탓에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대답이 없는 걸로 봐선 상당히 수상한 놈이군.”
휘익!
고진유의 손이 빠르게 사내의 몸을 뒤졌다.
무영도수의 능력이 무공과 함께 발휘되자 순식간에 검은 주머니와 목패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사내의 눈이 커졌다.
잠시 몸만 스쳐 갔다고 여긴 순간 어느새 자신의 물건이 상대방의 손에 놓여 있었다.
“이건 뭘까?”
검은 주머니 안에선 옥병들이 나왔다.
킁킁.
옥병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어딘가 익숙한 냄새.
“뭐야? 독 같은데?”
괴도의 독충들에게 나는 냄새와 비슷했다.
‘나쁜 물건들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니 말로만 듣던 살수인가.’
이번에는 목패를 살폈다.
‘살구(殺九)? 아홉 번째 놈이라는 건가?’
“이봐. 당신 살수가 맞지?”
“…….”
“멍청하군. 무언은 긍정이라는 말도 모르는 모양이야.”
“아니오. 난 살수가…….”
“변명하기엔 벌써 지나갔소. 살수들은 청부가 실패하면 죽음을 택한다고 하던데 당신도 스스로 죽을 텐가?”
“…….”
“아주 오래전에 살수들은 죽이지 않고 팔다리 하나씩을 자르면 무조건 분다고 들은 적이 있지. 맞나?”
스르르-
고진유가 검에 내기를 흘려보냈다.
날카로운 검기가 예리하게 빛을 냈다.
“지금부터 묻는 데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팔이 하나씩 떨어져 나갈지도 몰라. 내 말이 장난처럼 들린다면 맘대로 해도 좋다.”
사내와 고진유의 대화를 듣던 왕종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나를 납치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납치를 당할 만큼 원수를 진 일은 없었다.
“누가 의뢰했지?”
“그건…….”
사내는 대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때,
덜컹!!
연화루의 입구가 열렸다.
문 사이로 건장한 사내들이 빠르게 들어왔다.
‘한패가 빨리도 나타나는군.’
그들의 신형에서 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마에 붉은 두건을 두른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청부가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달려왔다.
고진유와 사내를 본 그가 연화루가 쩌렁거릴 정도로 소리쳤다.
“당장 그를 풀어줘라!!”
“지금 나한테 한 말이오?”
꿈틀.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젊은 친구가 말이 짧군. 객기는 한 번으로 족하다. 살고 싶으면 당장 물러나라.”
“이거 참. 보자마자 죽이겠다고 협박하다니.”
고진유는 뒤로 물러난 왕종에게 물었다.
“혹시 저들에게 나쁜 짓 했소?”
눈이 휘둥그레진 왕종이 그들을 보며 재차 확인했다.
“난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고진유가 홍두건 사내에게 말했다.
“당신들과 안면이 없다고 하지 않소. 잘못 찾아온 거 아니오?”
“젊은 놈이 사회생활을 잘 못하는군. 오래 살려면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다.”
“그러게 말이오. 나도 참견할 마음은 없었소만.”
“마지막으로 말하지. 물러나라.”
“그건 아닌 것 같고. 이왕 끼어든 김에 끝까지 갑시다. 여기서 물러나면 내가 뻘쭘해지는 것 같지 않소? 더구나 이자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는데 말이오. 적어도 죽을 뻔한 당사자는 이유를 알아야지. 무슨 연유인지 밝혀내면 당신에게 보내줄 수도 있고.”
“말이 안 통하는군. 목숨이 아깝지 않는 모양일세. 치워라!”
채애앵!!
사내가 명을 내리자, 수하들이 일제히 허리에서 검을 빼 들었다.
“말이 안 통하는 게 누군지 모르겠네. 그리고 설마, 여기서 싸우려고?”
“…….”
“밖으로 나갈까?”
“도망가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할 말인데. 도망간다면 그건 당신들이겠지.”
“간이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군.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지녔는지 보겠다.”
사내가 연화루 밖으로 먼저 나갔다.
팟!
고진유는 곧바로 부복한 사내의 혈을 눌러 기절시켰다.
“헉…….”
바닥에 엎어진 채 쓰러지는 남자를 본 왕종이 몸서리쳤다.
“괜찮소. 기절한 것뿐이니까.”
“아…… 하하…….”
“우리도 밖에 나갑시다.”
“저어…… 괜히 나 때문에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별일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되오. 사과는 저놈들이 해야지.”
왕종은 앞장서 나가는 고진유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우르르르-
순식간에 시장에 소문이 났는지 구경꾼들이 주위를 가득 채웠다.
“무슨 일인고?”
“글쎄, 홍두건을 쓴 무리들이 왕종 도련님을 납치하려다가 저기 청년한테 걸린 모양인가 봐.”
“왕종 도련님을 납치한다고? 저 착한 분을 왜? 왕 상단주라면 모를까!”
“어? 저기…… 저놈들은 창운상단 무인들 아녀?”
구경꾼들 중 한 사람이 홍두건 사내를 알아보았다.
“창운상단이라고? 그놈들이 왜 왕종 도련님을 납치해?”
‘창운상단이라고?’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왕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반대로 고진유는 미소를 띠었다.
‘창운상단에서 납치할 모양이었군. 아주 잘됐어. 바로 끌어들이면 뭔가 될 것 같은데?’
구경꾼들의 말대로, 홍두건 사내의 정체는 창운상단 창무당 소속 부당주 반독진이었다.
‘상황이 더럽게 됐어.’
연주상단의 부상단주를 비밀리에 납치하려고 했건만, 모든 게 들통났다.
‘저놈이 망쳤다.’
반독진은 살기를 띠고 마주 선 고진유를 노려보았다.
왕종의 납치는 실패했지만, 계획을 망친 인물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네놈은 누구냐?”
“무공도 모르는 사람을 몰래 죽이려고 한 자에게 내 이름까지 알려줄 의리는 없는데.”
“뭣이?”
반독진은 순간 노기가 치솟았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창운상단과 연주상단의 일이다. 제삼자는 빠져라.”
“그렇게는 안 될 것 같군.”
‘이 새끼가……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군. 네놈이 원한다면……!’
휙!
반독진이 검을 쭉 뻗었다.
“네놈에게 생사결을 신청한다.”
‘흐음…… 사부님은 측은지심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라고 하셨지…… 어디 보자.’
“……좋다. 네가 다쳐도 측은지심이 안 생길 것 같으니 얼마든지 받아주지.”
‘저 새끼가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거야.’
딸깍!
고진유가 검을 잡아당겼다.
‘이 소리가 너무 좋아.’
검집이 검을 놓아주는 소리에 온몸의 긴장이 단숨에 풀리는 듯했다.
스으으으으으-
검신이 천천히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파아아앗!!
검광이 빛을 뿌려냈다.
강한 빛에 눈이 부신 반독진의 얼굴이 돌아갔다.
‘저, 저런 검광이라니……?’
반독진의 안색이 단번에 변했다.
검광만으로도 뭔가 잘못된 게 아닌지 걱정이 밀려왔다.
“움직이지 않을 거면 먼저 시작하겠소.”
“……!”
상대방의 미소에 자신감이 보였다.
더 망설였다간 잡힌다.
‘선수로 움직여야 한다.’
타앗!!
반독진은 내력과 함께 검을 펼쳤다.
소연검법(小衍劍法) 화중결의 초식.
두껍게 다가서는 검의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거운데?’
고진유는 상대의 검법을 파악했다.
사부 오청석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중원에 있는 수많은 검문들 중 안휘 남궁의 검은 중검(重劍) 중에서도 최고라 할 수 있다.”
‘창운상단은 남궁세가와 연관이 있었지. 설마 일반 수하들까지 남궁세가의 검은 아닐 텐데?’
하나 고진유의 예상과 달리, 이는 남궁세가의 검이 맞았다.
소연검법은 남궁세가의 기본 무공이라 하나, 남궁세가의 도움 없이는 외부인인 함부로 익힐 수 없는 검공이었다.
채애앵!!
고진유는 직접 하나하나 검을 받아내며 중검이 무엇인지 파악해 갔다.
‘오호, 중검은 이런 느낌인가?’
흑귀들이 펼친 흑살검법과는 검의 무게가 달랐다.
차아앗!!
반독진은 바로 연환식을 펼쳤다.
처음과 달리 고진유는 오직 자신의 검을 막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괜히 쫄았군.’
“크하하하! 이 검이 바로 남궁세가의 무공이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금중결의 초식으로 고진유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역시 이번에도 묵직한 기운을 품은 검이 매섭게 다가왔다.
‘이 정도면 충분히 봤고. 끝을 내볼까.’
휘리릭!
순간, 고진유가 회전하며 상대의 검을 가볍게 벗어났다.
당연히 허리를 베었다고 확신했던 반독진의 눈이 커졌다.
‘어디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상대가 사라졌다.
“그렇게 늦어서야 개미라도 잡을 수 있을지.”
“……!!”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쏴아아아-!!
온몸에 싸늘한 기가 퍼져 나갔다.
“목을 베어줄까?”
“…….”
차가운 검날이 목덜미에 스치며 붉은 실선이 생겨났다.
반독진은 고개를 저었다.
“살려달라고?”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죽이려고 한 놈을 왜 살려줘야 할까? 정말로 살고 싶다면 타당한 이유를 들어야지.”
“그게…… 그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반독진이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이유가 없군. 안타깝게도 죽어야겠네.”
“자, 잠깐!!”
반독진의 눈에서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나타났다.
퍽!
고진유는 그의 목을 그대로 내려쳤다.
그가 단번에 기절하며 쓰러졌다.
부당주 반독진은 일초지적조차 되지 않았다.
창무당 무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갈팡질팡했다.
“쳇. 그냥 기절한 것뿐이니 이자를 데리고 냉큼 사라져. 남궁세가의 검을 펼쳐도 별 볼 일 없군. 그리고 돌아가거든 똑바로 전해라. 창운상단은 연주상단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우르르르르-
고진유의 말이 끝나자마자 창무당 무인들은 정신을 잃은 반독진을 업고 사라졌다.
‘이, 이자가 무슨 말을…….’
홀로 남은 왕종은 고진유가 마지막에 한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에게 도발을 날려 싸움을 더 부추기는 듯한 말투처럼 들리지 않는가.
고진유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괜찮소?”
약관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
왕종 또한 상단에서 많은 무인들을 보아왔다.
이 사람은 아버지의 곁에서 호위하는 그분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왕종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대협께선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괜찮소.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되오. 우연히 옆에 앉아 있었을 뿐이니까. 당신 목숨을 누가 노리는 모양이니 그만 가보시오.”
“아닙니다! 우연이라고 해도 은공께서 도움을 주신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오?”
“그들에게 했던 마지막 말…… 연주상단에게 창운상단은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하신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유는 없소. 그렇게 하면 겁이 나서 덤비지 않을 게 아니오?”
“……혹시 이곳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소. 오 년 동안 멀리 타지에 있다 얼마 전에 돌아왔소이다.”
“아…… 하…….”
‘연주상단과 창운상단의 관계를 모르고 하신 말인가 보군…… 아, 아니야. 이분을 만난 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라……!’
착잡하게 상황을 바라보던 왕종의 눈이 순간 번득였다.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창운상단.
그 소속의 무인들을 단숨에 제압해 버린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호, 혹시 길이 바쁘지 않으시다면 제가 은공을 꼭 모시고 싶습니다! 아니,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꼭 은혜를 갚아야지요!”
살짝 망설이는 듯하던 고진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참, 아까 잡아놓은 사람도 데리고 가는 게 좋겠소이다. 이번 사건에 증인이지 않소이까.”
연주상단으로 쉽게 들어갈 기회를 잡았다.
‘어떻게 창운상단과 엮을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제때 사고를 쳐준 덕에 일이 쉬워졌어.’
극진한 태도의 왕종을 따라 연주상단으로 움직이며, 고진유가 미소를 숨겼다.
‘왕진만, 조금만 기다려라. 곧 내가 찾아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