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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대도-10화 (10/425)

10화

어둠이 지기 전이지만, 음요루 입구 앞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후후후, 저런 정신 나간 놈들 때문에 내가 먹고살지.”

삼 층 창가에 선 중년 사내.

벽화당 두목 구양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입구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하하하!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도둑놈의 두목이 홍루의 주인이라니.”

‘어떤 새끼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구양도는 흠칫했다.

휘익.

그는 재빨리 돌아서며 탁상에 세워 두었던 검을 찾았다.

“이걸 찾는 모양이구려?”

빙글빙글.

고진유가 손안에서 검을 돌렸다.

“네놈은 누구냐?”

“당신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

“……?”

‘나와 안면이 있는 놈인가?’

두목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진유를 노려보았다.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난 그대를 처음 본다.”

휘이익!

고진유가 검을 구양도에게 던졌다.

쿠우웅!!

그는 가슴에 부딪힌 검을 겨우 받아냈다.

쿨럭!

강한 충격에 허리를 숙여지며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내가 누군지 모르다니 섭섭하군.”

“……!!”

고진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만…….’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다.

“두목, 웬만하면 기억이 나야 하지 않을까요?”

두목이라는 말.

그 말에, 오래전 사라진 한 사람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허억…… 설마……!’

그의 두 눈이 커졌다.

떨리는 손이 고진유를 가리켰다.

“너어어어…… 고…… 진유?”

“이제야 알아보는군요.”

“어, 어떻게? 분명 지옥도에 가는 배에서…… 죽었다고…….”

“그것까지 알고 있었소? 근데 너무 억울해서 죽을 수 없었거든. 나를 팔아 버린 놈을 죽여야 하니까.”

채애앵!

구양도가 검을 빠르게 뽑았다.

“크, 크큭, 고진유, 네놈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잘못 찾아왔다! 차라리 여기서 멀리 도망갔으면 내 손에 직접 죽지는 않았을 텐데. 이번에는 내가 네놈의 목을 확실하게 베어주마!”

상대가 고진유라는 사실을 알자 구양도는 긴장이 풀리며 자신이 생겼다.

그가 알던 고진유는 보잘것없는 소매치기 어린애일 뿐, 그에게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나를 죽이겠다고? 자신 있으면 해보시지.”

“이노오오옴, 그동안 어디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간땡이가 처부었군!!”

쉬이익-

고진유의 목을 향해 검이 날아왔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실력인가?”

구양도가 펼친 검이 너무나 또렷하게 보였다.

파아앗!

고진유의 허리에서부터 검기가 폭발했다.

“아아악!!”

검과 함께 손이 반으로 잘린 구양도가 비명을 질렀다.

“뭐야. 나를 죽인다고 하지 않았소? 난 엄청 강한 줄 알았는데. 실망이외다.”

파앗!

고진유는 재차 반원을 그리며 검을 가볍게 내리쳤다.

털썩!

이번에는 반대편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커어어억-!”

또 한 번의 비명.

고진유의 무공은 강했다.

“두목, 팔이 두 개 잘린다고 죽지는 않아. 이번에는 목을 잘라볼까?”

“허허헉, 지, 지, 진유, 목숨만은…… 목숨만은 살려주게……!”

“미안하군. 원수를 살려줄 만큼 내가 착한 놈은 아니라서.”

“한 번…… 만…… 한 번만 살려준다면…… 여기 있는 것을 모, 모두 주겠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지. 나를 팔아넘긴 이유가 무엇이오?”

물론 이유는 알고 있다.

하지만 두목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미…… 안하네.”

“괜찮소. 난 이유를 듣고 싶을 뿐이오.”

“만일…… 네가 벽화당을 나간다면…… 거의 대부분이 벽화당을 떠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대충 그런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 맞았네.”

“진유, 한 번만 살려주게.”

“두 팔이 잘리고도 살고 싶소?”

“…….”

“아 참, 그리고 내 물건을 주시오. 어디에 있소?”

“무, 물건? 그게…… 뭔가? 돈이라면 얼마든지 달라고 하는 대로 주겠네.”

“누가 돈을 달라고 했소? 내가 필요한 건 내 목걸이요. 이름이 적힌 목패. 어디에 있지?”

“그…… 그건…….”

두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오래전 고진유가 사라지면서 필요 없어진 물건이라 기억 속에서 까맣게 지워 버렸다.

“어디 있지?”

“그게…….”

“뭐야. 설마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이번에는 두 다리가 잘려 나가봐야 기억이 날 모양인가?”

휙.

고진유가 검을 위로 올렸다.

“잠깐…… 잠깐만…… 기억이…….”

두목은 죽고 싶지 않았다.

‘기억…… 을…… 기억을…… 아…… 아하……!’

“지금 바로 말 안 하면 영원히 서지 못할 거요.”

“목패! 그, 그 목패는 예전 벽화당 대들보 기둥 아래에 숨겨놨네.”

“거짓말은 아니겠지?”

“진…… 유. 진짜, 진짜 그곳에 넣어두었네.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이제 나를 살려주게.”

“살고 싶은 모양이군. ……하지만 난 원수를 살려줄 생각이 없소. 당신에겐 측은지심도 아까워.”

“방금…… 살려줄 거라고…….”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는데.”

고진유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렸다.

쉬이이익!

구양도의 목 아래로 차가운 바람이 지나갔다.

손이 잘려 나간 탓에 목을 만져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했지. 난 착한 놈이 아니라고.”

“커어어어, 네…… 네놈을…….”

번쩍!

구양도의 눈앞에서 섬광이 터졌다.

눈앞에 빛이 사라지자 그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져 갔다.

쿠우우웅!

벽화당 두목의 죽음.

고진유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두목, 이 모든 게 인과응보(因果應報)일 뿐이야.”

잠시 후.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음요루를 뒤흔들었다.

* * *

‘여기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군.’

끼이익-

목문을 열었다.

“여기도 딱히 변한 건 없네.”

벽화당 마당으로 들어선 고진유가 주위를 살폈다.

마당 옆으로 반쯤 부러진 나무 의자들.

손잡이가 깨진 항아리.

담벼락에 그려놓은 나무 그림들.

오 년의 시간은 짧지 않았건만, 익숙한 물건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웅성웅성.

마당 주위에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정도의 아이들이 모여 앉아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저어…… 누구…… 십니까?”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오른 눈 주위가 벌겋게 부어 있었지만, 야무지게 생긴 눈매가 제법 강단 있게 보였다.

‘눈탱이를 보니 옛날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군.’

예전에 고진유도 무조건 복종을 하지 않는다고 한쪽 눈을 많이 맞았다.

“낙봉(駱峯) 새끼. 여전히 손버릇이 안 좋네.”

“어…… 어…….”

낙봉은 아이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사내의 별명이었다.

그때,

덜컹!

벽화당 내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삐죽 뻗어 나온 거친 턱수염에 우락부락한 눈.

육 척 장신의 거구가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나왔다.

“네놈은 누구냐?”

생긴 모습대로 목소리 또한 쩌렁쩌렁했다.

겁먹은 아이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고진유는 피식 실소가 나왔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젠 겁 안 나.’

학대와 갈취.

의지할 곳 없는 어린아이들 눈에 낙봉의 모습은 얼마나 두려운 괴물이었을까.

“낙봉, 당신도 여전하군.”

“이…… 새끼가 죽고 싶어서!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고 있어?”

그가 가장 듣기 싫은 별명인 낙봉.

“죽을 사람은 낙봉, 당신이지. 오늘이 제삿날이 될 거야.”

“미친 새끼, 정말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군?”

휘이익!

낙봉은 장신의 거구였지만, 일반 성인들보다 훨씬 빨랐다.

바람을 가르며 고진유의 얼굴을 향해 주먹이 날아왔다.

‘쳇. 이런 주먹에 맞았다니…….’

그가 뻗은 주먹의 흉터 자국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처억.

고진유는 한 걸음 내디디며 낙봉의 주먹을 가볍게 피했다.

그와 동시에 어깨를 살짝 툭 치듯 낙봉의 가슴과 부딪혔다.

퍼어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빠직 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아악!!”

낙봉은 몸을 움츠리며 뒤로 서너 걸음 밀려났다.

“이봐, 이 정도에 쓰러지면 안 되는 거야.”

퍼어억!

고진유는 고개를 숙인 그의 눈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얼마나 강하게 쳤는지 눈알이 튀어나올 듯했다.

까다다당!

낙봉의 고개가 휘익 돌아가면서 바닥에 얼굴이 그대로 처박혔다.

“아악!!”

낙봉이 고통의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태어나 이보다 고통스러운 적이 없었다.

아파서 죽겠다는 말이 머릿속에 절로 떠올랐다.

“아직 한참 멀었는데 벌써 죽을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안 그래? 난 그것보다 더 많이, 더 심하게 맞았는데.”

퍼어억!

고진유가 바닥에 쓰러진 그의 배를 걷어찼다.

“커어억!”

방금 전에 마셨던 술을 토해냈다.

“목…… 숨만…….”

눈앞에 다가온 상대가 누군지 알 겨를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그를 지배했다.

죽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 당신이 좋아하는 두목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어?”

“두…… 목이…… 죽었단…… 말입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지.”

“대체…… 왜……?”

낙봉은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다. 두목과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이유도 몰랐다.

“그냥 궁금한 채로 죽어. 아니면 저승에 가서 두목에게 물어보든지. 그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스르르릉-

검집에서 청량한 소리와 함께 검이 빠져나왔다.

“예전 생각 해서 좀 더 패고 싶었지만.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편안하게 죽여주지.”

‘예전?’

낙봉은 의문이 들었지만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스걱.

고진유는 그대로 그의 목을 베었다.

이번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를 보고 있던 수십 명의 아이들은 몸이 얼어붙었다.

지옥의 야차보다 무서웠던 낙봉이 벌레처럼 반항 한 번 못하고 죽었다.

“모두 모여.”

고진유의 말에 아이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잘 들어. 벽화당의 두목과 낙봉은 죽었다.”

“네에? 두목이 죽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고진유에게 질문했던 아이였다.

두려움보다는 표정이 밝아 보였다.

“이름이 뭐지?”

“호추입니다.”

“호추, 내가 그놈들을 저세상으로 보냈지. 마음에 들어?”

“…….”

“이젠 이곳에서 너희들을 때릴 사람도, 막을 사람도 없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서로 의논해서 스스로 정해라.”

“정말로 우리 맘대로…… 해도 됩니까?”

“도둑질을 하든 다른 곳에 가든 상관없다.”

“저희들도…… 그러고 싶지만…….”

호추는 뭔가 걸리는지 망설였다.

“벽화당에 두목과 낙봉 말고 누가 또 있나?”

“그건…… 아니지만…….”

벽화당 두목과 낙봉이 없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닌 듯 보였다.

“추동…… 형 무리들이…… 있습니다.”

“아, 난 또 누구라고. 나중에 그놈들이 오면 마을에서 만났던 사람이 이랬다고 말해. 소문에 애들 괴롭히는 소리가 들리면 확실히 죽여주겠다고 전하고.”

“네, 넵! 알겠습니다.”

호추는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뭔가 든든한 버팀목이 생긴 듯했다.

“저어…… 성함이…….”

슥슥.

고진유는 호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에 만나면 그때 알려줄게.”

* * *

고진유가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두목이 숨겨놓은 물건.

‘대들보 아래 기둥이라.’

천장을 올려다본 그가 길게 뻗은 대들보를 찾았다.

“이런 곳에 숨겨놨을 줄이야.”

만일 벽화당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온다면 쉽게 찾기 어려운 비밀 장소였다.

‘뭔가 있겠지?’

기둥을 두드리면서 한 바퀴를 돌자,

티익.

다른 부분과 소리가 달랐다.

“여기가 비어 있군.”

손바닥에 힘을 주어 밀자, 안으로 밀리면서 아래 부분에 공간이 나타났다.

‘찾았다.’

공간 안에 손을 넣자,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의 작은 물건이 잡혔다.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목패가 확실했다.

고진유.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특별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 평범한 목패였지만,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낼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드디어…… 찾았다.”

고진유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목패만을 주시했다.

* * *

군자복수(君子復讐) 십년불만(十年不晩).

벽화당 두목을 죽였다.

그의 밑에서 죽을 만큼 맞으면서 컸고, 배신당하며 마음 깊이 복수를 다짐했다.

사실 그가 배신했건 안 했건 죽이고자 했던 결정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무슨 짓을 했던 복수는 기정사실이었다.

끝내 복수를 갚았다.

마음 한 곳에 막혀 있던 응어리가 사라졌다.

곧바로 연주를 떠나려고 했던 고진유는 멈칫했다.

지옥혈림에 의뢰를 한 인물.

‘두목이 배신했지만…… 지옥혈림에 의뢰한 놈을 그냥 둘 순 없어.’

왕진만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사부님은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면서 당부했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화산의 무공을 펼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에 무공을 펼쳤으면 한다.”

무공을 배우면서 사부와 약속했다.

‘……원수는 갚아야겠지만, 이건 죽일 정도는 아니겠지?’

연주상단의 주인 왕진만에 대한 주변의 인심은 고약했다.

연주 일대에서 수많은 장사를 벌이면서도 돈이 없는 백성들에게 대부업도 겸했다.

문제는 지나치게 많은 고리의 금리로 대부받은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는 것.

‘흐음, 의적 흉내나 한번 해볼까?’

왕진만에 대한 복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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