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4화 (4/425)

4화

철썩.

선체의 전체가 새까만 흑선(黑船)이 파도를 가르며 움직였다.

펄럭펄럭.

지옥혈림의 혈림기(血林旗)가 바람을 따라 뒤로 흔들거렸다.

선루(船樓)에 선 흑의인.

흑나찰이 천리경으로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을 살폈다.

“노인장, 저기가 파해도(破海島)인가?”

“예에, 흑나찰님. 파해도는 화산섬으로 뱃사람들 사이에서는 죽음의 섬이라 해서 사도(死島)라 하, 합니다요.”

파해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끌려온 노인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

“이곳이 마지막이군. 이곳에 없다면……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겠지.”

흑나찰은 천리경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오 년 전, 지옥도로 향하던 흑선이 태풍에 의해 난파당했다.

그 정도 태풍이라면 흑선에 묶여 있던 죄인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의뢰인은 죄인 하나의 생사 확인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결국 지옥혈림주의 명이 지옥도에 떨어졌다.

-바다의 모든 섬을 뒤져 오청석의 행방을 찾아라.

최종적으로 흑나찰 악공에게 임무가 떨어졌다.

오 년 동안 모든 섬을 뒤졌다.

유인도는 물론, 무인도까지 들어가서 찾지 않은 섬이 없었다.

점점 범위를 넓히며 조사했지만 찾고자 하는 인물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뱃사람들 사이에서 화산섬 파해도에 대해 듣게 되었다.

파해도 입구에 솟구친 와동(渦動) 탓에 절대로 들어설 수 없다는 죽음의 섬.

느낌이 왔다.

혹시 그곳에 목표가 있지 않을까?

목적지가 파해도라는 것을 알게 된 흑선의 선원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배들이 파해도 주위에 갔다 소용돌이에 잠겨 빠져나오지 못한 채 전부 바다귀신이 되었다.

하지만 흑나찰이 보기엔 소문과 달리 파해도를 둘러싼 바다는 조용했다.

“죽음의 소용돌이가 반시진마다 몰아친다더니 허튼소리였군. 그냥 들어가면 되지 않는가?”

“저어…… 잠시만 기다려 보시면…….”

잠잠한 바다에선 언제 소용돌이가 멈췄는지 알 수 없었다.

무턱대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이각의 시간이 지날 무렵.

구우우웅-

갑자기 바다 전체가 흔들렸다.

쿠아아아앙-!

파류가 점점 강해지며 소용돌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

철썩!

파도가 거칠게 튀어오르며 흑선의 선체를 때렸다.

흔들흔들.

“허어…… 이 정도로?”

소용돌이가 만들어낸 파류에 흑선이 좌우로 크게 흔들거리자, 흑나찰 또한 당황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파해도로 들어가서 확인을 해야 했다.

“반시진이면 소용돌이를 뚫고 가기 충분하다.”

작은 배로 옮겨 탄 뒤 흑귀들이 전 내력을 이용해 노를 젓는다면, 소용돌이가 멈춘 반시진 안에 충분히 섬으로 들어갈 수 있을 터.

흑나찰 악공은 선루 아래에 정열한 흑귀들을 내려다보았다.

“모두 준비되었나?”

“넵. 흑나찰님.”

“좋아. 모두 배를 띄워라.”

동시에 오십 명의 흑귀들이 두 척의 구조정에 각각 절반씩 나뉘어 탔다.

휘익!

악공도 앞선 구조정에 내려섰다.

“반시진 뒤에 소용돌이가 멈출 것이다. 그때 전력을 다해 섬에 들어간다.”

“옙.”

흑귀들은 두 손에 노를 잡은 채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 * *

소용돌이 너머 수평선 아래에서 배가 나타났다.

“앗……! 배가?”

오 년 만에 처음 보는 광경.

고진유의 심장이 강하게 두근거렸다.

휘익!

그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부에게 달려가며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부님, 배가 나타났습니다!”

“배가?”

오청석도 움직이지 않는 몸이지만 바다를 향해 고개를 최대한 돌렸다.

아쉽게도 그가 앉은 자리에서는 배가 보이지 않았다.

고진유는 얼른 오청석을 등에 업고 높은 위치로 올라갔다.

“사부님, 저어기에 배가 보이지 않습니까?”

고진유는 배가 지나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했다.

“사부님, 얼른 불을 피워야겠습니다.”

그가 등에 업었던 오청석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기다려 보거라.”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보던 오청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부님, 왜 그러십니까?”

“저기 선체를 자세히 봐라.”

“선체요?”

고진유는 다가오지 않고 멈춘 배를 자세히 보았다.

“흑…… 선!”

머릿속에 든 기억이 맞다면 지옥도의 흑선이 틀림없었다.

“망할…….”

고진유는 단번에 실망의 표정을 지었다.

“사부님, 설마 저놈들이 우리들을 잡으러 오는 것은 아니겠죠?”

“…….”

오청석의 시선은 여전히 흑선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놈들이 지금까지 나를 찾으러 다녔다는 것인가?’

현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대체…… 그 철갑이 무엇이기에…… 오 년이 넘은 지금까지 집요하게 찾았을 줄이야.’

이제 흑선에서 구조정을 내리고 있었다.

“진유야. 나를 내려놓아라.”

등 뒤에서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진유는 조심스럽게 오청석을 안은 뒤 앉혔다.

“고맙구나.”

사부의 목소리는 예전과 달랐다.

늘 기운이 없어 보이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저들이 섬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여유가 반시진밖에 없다. 저놈들은 찾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순간, 고진유는 단전이 부서지고 사지의 맥이 잘린 채 꽁꽁 싸매어 흑선에 타고 있던 사부가 떠올랐다.

“저놈들이 찾아야 할 물건의 행방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오 년 동안 사부님을 찾았단 말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기에 지금까지…….”

“그 물건을 원하는 곳은 지옥혈림이 아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이다.”

혼자 가지고 가려고 했던 그날의 사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그 물건은 세상에서 영원히 잊힐 것이다.

“장문인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무림맹에 들렀을 때였다. 임무를 마친 뒤 화산파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이었지.”

오청석은 가슴속에 품어놓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잠이 오지 않아 잠시 밖에 나갔는데, 수상한 놈들이 움직이고 있더구나. 무림맹에서 복면을 쓰고 말이다.”

고진유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천하의 무림맹이 아닌가.

“뒤를 밟으니 맹의 북쪽으로 향하더군. 그저 숲인 줄 알았던 곳에 무림맹을 나가는 비밀 문이 있을 줄은 몰랐단다…… 하아…….”

오청석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이젠…… 됐다.”

큰 호흡이 힘겹게 두세 번 이어지고, 다시 오청석이 말을 이었다.

“나는 놈들을 막아섰다. 밖으로 나가면 잡을 수 없을 것 같았지. 십여 초의 공방 동안 정체를 알아내려 했지만, 놈들은 진산무공을 펼치지 않는 듯했다.

“그건…… 사부님께서 그들의 신분을 알아차릴 거라 생각해서?”

“그렇지. 본 무공을 펼치면 내가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럼에도 나와 대등하게 싸울 정도의 실력이었다.”

결국 놈들의 정체는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놈들은 무위들이 달려오는 기척이 들리자 연막탄을 터뜨린 후 사라졌다. 그때 천에 싸인 물건을 하나 찾았지. 싸우는 과정에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난 호천대 무위가 오기 전 얼른 물건을 챙겼단다.”

사부가 얻은 물건.

그것이 지옥혈림에서 찾고자 하는 물건임을 고진유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확인해 보니 두꺼운 철로 만든 상자더군. 열어보려고 했지만 열쇠 없이 힘으로 열 수 없는 물건이었다. 함부로 몸에 지니고 있다가는 빼앗길 수 있다고 여긴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놓기로 했다.”

곧이어 오청석의 입에서 철갑을 숨겨 놓은 장소가 힘겹게 뱉어졌다.

“사숙께는 복면인들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고 무림맹을 떠났다. 조용해졌을 때 다시 찾기 위해서.”

“아…….”

“객잔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복면인들에게 포위를 당한 뒤였다. 잡힌 뒤 철갑에 대해 말을 하지 않자 그들은…… 단전을 파괴한 뒤 사지의 맥도 잘랐다.”

“하…… 죽일 놈들…….”

“만일 철갑을 어디에 숨겼는지 말했다면 나를 죽였을 테지.”

“사부님, 복면인들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은 없으십니까?”

“그들에 대해 아는 건 없다. 목소리조차 변조했었으니까.”

목소리를 변조했다는 의미는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단 뜻이다.

“네가 여기에서 나간다면 그 물건을 찾아 화산파에 계신 사부께 전해주었으면 한다. 너에게는 사조가 되시는 분이시겠지.”

“사부님께서 전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진유야, 그 일은 너에게 부탁을 하마. 그동안 고마웠다.”

“…….”

“제자가 만일 여기에서 살아나간다면…… 내 부탁을…… 들어주면 고맙겠구나.”

“아닙니다. 제가 꼭 사부님을 모시고 섬을 나갈 것입니다.”

“허허허…….”

고진유의 대답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오청석의 시선이 다시 섬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두 척의 구조정으로 향했다.

“진유야. 나를 두고 섬 안으로 들어가서 숨어라. 저놈들이 찾는 사람은 사부이니라.”

“아닙니다. 저놈들이 사부님께 손끝 하나 대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척.

고진유는 다시 오청석을 등에 업었고 괴도 안으로 들어갔다.

* * *

흑나찰 악공은 소리를 질렀다.

“더 세게 노를 저어라!”

“복명!”

팟! 팟! 팟!

흑귀들은 전력을 다해 파해도를 향해 노를 저었다.

반시진 안에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헉헉.

호흡이 거칠어졌다.

점점 파해도의 해안이 가까워졌다.

“거의 도착했군.”

흑나찰은 선미에 선 채 뒤를 보았다.

우우우웅-

파도가 흔들거리며 바닷속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흑나찰 악공의 몸 또한 흔들거렸다.

휙.

악공을 시선을 돌려 파해도를 노려보았다.

전방을 살피는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흐음…… 뭔가 있는 느낌이야.”

타악!

파해도에 내려서자, 일반적인 섬과는 다른 기운이 다가왔다.

“이상한 곳이군.”

악공은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바다에서 볼 때와 전혀 다르게 보였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겠어.’

빽빽하게 나무들과 사람 높이 정도의 풀들이 가득했다.

“후찬, 먼저 해안가를 확보해라.”

“넵. 알겠습니다.”

척.

오십 명의 흑귀들이 곧바로 해안가로 퍼졌다.

“으음. 상당히 이질적인 곳이군.”

흑나찰 악공은 뒷짐을 지며 섬을 계속해서 둘러보았다.

오 년 동안 한 놈을 잡기 위해 남해의 수백 수천의 섬들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해도에 왔다.

“느낌이 왔어. 여기에 그자가 있다.”

의뢰자들은 보통 인물들이 아니었다.

태풍에 의해 배가 난파되었다면 보통은 그냥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은 시체라도 데리고 오지 않는다면 지옥혈림을 산산조각 낼 것이라 협박했다.

‘훗. 그들은 혈림주께서 협박에 굴복한 줄 알겠지.’

혈림주는 의뢰자들이 그토록 애타게 찾는 물건이 궁금했다.

그리고 만일 물건을 찾는다면, 의뢰자들에게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휘익!

“악공님, 이것을 보십시오.”

흑귀 하나가 빠르게 다가와 햇볕에 말려놓은 물고기를 내밀었다.

“사람이 있군. 그놈 말고도.”

그들이 찾고자 하는 인물은 사지를 움직일 수 없다.

“크크크,. 이거…… 점점 확실해지는걸. 배가 나타난 것을 봤을 텐데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는 뜻이겠지.”

악공의 얼굴에 살기가 짙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