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대도
1화
펄럭펄럭!
거친 바람이 깃발을 때렸다.
찌지직-
얼마나 바람이 강한지 두꺼운 광목천으로 만들어진 깃발이 찢어졌다.
“망할……!”
턱수염으로 한쪽 얼굴을 가렸지만 깊은 상처 자국만으로도 거친 바닷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선장은 바람을 맞으며 인상을 구겼다.
바닷바람을 맞고 산 지 사십 년.
‘너무 강해.’
얼굴을 때리고 지나가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뮛들 하느냐?! 빨리 태우지 않고!”
거친 바람 소리를 뚫고 사내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흑의 사내들에게 끌려가는 이십 여 명의 죄인들.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른다.
밥 먹고 살기 위해서는 눈과 귀를 닫아야 했다.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보여서는 안 되는 더러운 일을 하는 중이다.
‘쳇. 나도 그런 놈들에게 빌붙어 밥을 먹고 살지만…….’
더러운 세상!
힘이 있는 자들의 세상이다.
흑귀라 불리는 그들은 중원 무림에서 감옥을 운영하는 지옥혈림의 개망나니들.
죄인들의 신분이 높고 낮음도, 죄질의 무거움과 가벼움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지옥혈림에 잡혀오는 순간 죄인일 뿐.
그들에겐 죄인들이 돈이며 상품이었다.
특히 지금 목적지인 지옥도는 지옥혈림이 운영하는 여러 지옥 중 특히나 가장 최악의 감옥이라 알려진 곳.
이곳에서 나오려면 무조건 시체가 되어야 한다는 악명이 자자한 곳이다.
“이봐, 선장.”
목에 스치기라도 하면 베일 정도로 예리한 목소리.
‘개잡종 대장 망나니 흑나찰.’
짜증 나게도 흑나찰이라 부르는 사내가 소리치면서 다가왔다.
바람에 검은 무복이 세차게 좌우로 펄럭였다.
부릅뜬 눈이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하다.
“뭐 하고 있어? 배 띄워.”
“대인, 지금 출항을 하면 위험합니다. 날씨가 곧…… 큰 바람이 불어올 것 같습니다.”
“죽고 싶나?”
흑나찰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헉.’
오랫동안 험한 뱃일을 한 선장이라도 무림인의 살기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게…….”
콰아악!
흑나찰의 귀수가 뻗어 나와 선장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알아. 나도 여기서 구른 지 수년이 넘었다. 네놈이 빨리만 움직인다면 태풍이 오기 전까지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어.”
“네에……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흑나찰은 선장을 내던지듯 손을 놓았다.
“젠장, 망할 새끼 도둑 때문에 하루를 허비했어.”
지옥도에 갈 배는 어제 출항했어야 했다.
‘하루 늦었으니 지랄하겠군.’
지옥도의 도주는 약속 시간에 민감하다.
씨이이이이잉-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흑나찰의 몸이 휘청했다.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밀릴 정도로 강한 바람.
하늘이 불길한 색으로 물들며, 점점 어두워져 갔다.
* * *
흔들흔들.
데구루루루-
배가 사방 좌우로 흔들렸다.
“아고고…… 죽겠다.”
산발로 풀어헤친 소년.
누렇게 변한 허름한 황의는 찢어져 엉망이고, 흑나찰에게 맞은 눈과 입술은 퉁퉁 부어 있다.
“망할, 흑귀가 대체 어떻게 알았지?”
십오 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은 청년이라고 하기엔 앳된 얼굴로 이를 갈았다.
연주 뒷골목에 위치한 소매치기 집단 벽화당 출신 고진유.
다섯 살 때 탁아소에서 벽화당 두목에게 팔려 간 뒤, 소매치기와 도둑의 세계에 몸을 담았다.
그가 탁아소에 어떻게 들어가게 됐는지는 모른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다른 고아들과 달리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어린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목패에 고진유,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후 십 년 동안의 벽화당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다.
벽화당 두목에게 기술을 배우는 동안 하루라도 구타를 당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은 소년은 시간이 지날수록 특유의 영민함과 뛰어난 기술로 그 세계에서 이름이 꽤나 높아졌다.
선천적인 재능인지, 기술을 한 번만 봐도 완벽하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영도수(無影盜手)’라는 별호까지 붙을 정도로.
그럼에도 십오 년의 탁아소와 벽화당 생활은 억압의 시기였다.
‘세상 자유롭게, 발길 닿는 대로 살고 싶다.’
하지만 두목은 고진유를 전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벽화당 수입의 절반 이상을 그가 벌어올 정도였으니까.
두목은 저녁 늦게 고진유를 부른 뒤 한 가지를 제의했다.
“부두목 자리는 어때?”
“그냥 떠날렵니다.”
“…….”
“이제 그걸 돌려주시죠.”
“뭐?”
“제가 어릴 적 지니고 있던 목걸이.”
고진유는 얼마든지 벽화당을 떠날 수 있었다.
그가 쉽게 떠나지 못한 이유.
어린 그의 목의 걸려 있던 목패가 두목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름만 적혀 있는 목패지만, 혹시라도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소중한 물건.
몰래 찾고자 해도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새끼가…….’
두목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이제는 힘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좋아. 네놈 물건이니 주긴 주지. 마지막으로 물건 하나를 훔쳐 와라. 그럼 목패를 주겠다.”
벽화당 두목의 마지막 명령.
고진유는 이를 받아들였다.
* * *
“다시 생각해도 열받네. 겨우 그딴 칠보옥 상자 하나 땜에 지옥혈림에다 의뢰를 한다고?”
그다음 날, 영주의 최고 부자 왕진만의 상단에 임시 일꾼으로 몰래 잠입한 고진유는 호위무사들이 잠시 교대하는 찰나, 빈틈을 노려 칠보옥으로 만든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식은 죽 먹기 수준의 의뢰였다.
하지만 고진유가 칠보옥 상자를 두목에게 넘기고 목패가 있는 장소로 향한 순간.
흑의 차림인 일단의 인물들이 그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하루 꼬박 지옥혈림에 쫓기면서도 놈들이 이런 잡도둑을 쫓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두목이 배신한 게 틀림없어. 왕진만 정도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물건 아닌가? 의뢰비가 칠보옥보다 열 배는 비쌀 텐데. 젠장, 돈 많은 놈들이 더 악질적……!’
쿠우웅!!
팔과 다리에 족쇄가 묶인 채 배가 흔들리는 방향을 따라 좌우로 온몸이 기우뚱거렸다.
“아 씨……! 이러다 지옥도에 가기 전에 구르다가 죽겠네.”
점점 크게 요동치며 흔들리는 게, 태풍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낑낑대던 소년은 맞은편 자리에 안대와 재갈을 찬 중년 사내를 힐끗 보았다.
‘저 사람은 무슨 죄를 졌길래 저렇게 꽁꽁 싸맸냐.’
흑귀들에게 바닥을 질질 끌려온 중년 사내는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흑귀 개새끼들. 사람을 걸레 취급하고 있어.’
지옥혈림에 무서움에 대해선 고진유 또한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여타의 무림 살인청부업체과 다른 곳.
중원에서는 차라리 지옥혈림에 갇히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젠장. 지금 누구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 나도 지옥도에 끌려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그때,
쿠우우웅!!
파도가 배의 측방을 때렸다.
덜컹!
몸이 공중으로 튀어오르더니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으아악!”
이번에는 충격이 앞전과 확연히 달랐다.
콰아아앙!!
그와 동시에 갑판 위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돛대가 무너졌어! 젠장,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런 태풍에 배를 띄우다니. 크크크!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지옥도에서 생고생하다가 죽는 것보다 물에 빠져 죽는 게 훨씬 낫군!!”
배에 일가견이 있는 죄수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뭐라고? 돛대가?’
소년의 눈동자가 다급해졌다.
‘망할, 망할! 이렇게 죽을까 보냐! 아직 여자 손도 못 잡아봤는데 총각 귀신으로 죽을 수 없어!’
콰아아앙!!
또 한 번의 굉음.
이번에는 암초에 부딪친 듯 소리가 묵직했다.
동시에 거친 바람과 파도를 따라 배가 뒤집혀지기 시작했다.
‘어…… 어…… 세상이 돈다?’
마치 허공에 뜬 것처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래에 있던 배 바닥이 머리 위에서 보였다.
파아아아앙!!
바닥에 떨어진 소년은 그대로 기절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입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어푸…… 커어억!”
소년은 눈을 떴다.
바닷물이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배가 거꾸로 뒤집힌 탓에 목숨은 건진 듯했다.
‘다, 다른 사람들은?’
주위에 다른 죄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암초에 부딪혀 구멍이 난 곳으로 휩쓸러 나간 듯했다.
소년은 다행히 족쇄에 달려 있는 사슬고리가 기둥 끝에 걸려 휩쓸려 가지 않았던 것.
하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바닷물이 안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씨이……!’
소년은 발버둥 쳤다.
죽더라도 그냥 죽을 수 없었다.
“이이이익!”
기둥 끝에 걸려 있는 족쇄를 잡아당기기를 수십 번.
“아아악!”
기합과 함께 당겼지만 손목이 끊어지는 듯했다.
밀려온 바닷물은 이제 콧구멍까지 찼다.
‘아…… 이렇게 죽을 순 없는데.’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또 한 번의 굉음.
암초에 다시 부딪힌 배가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그날 이후 삼 년이 흘렀다.
망망대해.
섬 외에 눈에 보이는 곳은 푸른 바다뿐.
위이이이잉-
귀신 울음이 섬 전체에 울렸다.
정확히 반시진에 한 번씩, 섬 주위에 소용돌이가 굉음을 내며 휘몰아쳤다.
“망할 귀신 소리.”
섬을 빠져나가고 싶어도 반시진 만에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재수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살긴 했지만 어쩌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진유가 눈을 뜬 섬은 괴도(怪島).
섬 꼭대기에는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화산섬이었다.
‘하필이면…….’
어쩌면 지옥도가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르는 곳.
섬 안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나무들이 가득했다.
육지에서도 이보다 큰 나무들은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듣도 보도 벌레들이 튀어나오는데, 뭐든지 팔뚝만 했다.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두려움에 처음에는 숲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삼 년이란 시간은 어릴 적부터 밑바닥에서 산전수전 구른 고진유가 적응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꼬르르륵-
배에서 먹을 것을 달라는 신호가 울렸다.
“오늘은 뭘 먹어볼까나?”
못마땅하게 바다를 바라보던 고진유는 허리에 찬 목검을 들고 섬 안으로 들어섰다.
우우웅-
찌리찌리-!
잡풀과 나무들 사이에서 괴이한 소리들이 났다.
“이것들이 전부 어디 갔을까? 눈에 안 보인다고 못 찾을 줄 알고?”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쓰윽 지은 고진유가 눈을 크게 뜬 채 최대한 기감을 넓혔다.
‘찾았다.’
오 장 정도 떨어진 거리.
그는 곧 성인 몸통만 한 나무 뒤로 슬금슬금 움직이는 기척을 찾아냈다.
‘멍청한 뚱땡이 놈!’
대충 어떤 놈이 숨어 있는지 느낌이 왔다.
타앗!
고진유는 몸을 날렸다.
바닥을 연이어 두 번을 튕기며 바위를 뛰어넘으면서 나무 뒤로 돌아섰다.
“아하하, 어딜 가려고?”
나무 뒤에 몸을 숨긴 황금색의 둥근 물체.
거대한 풍뎅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바르르-
황금 풍뎅이가 몸을 심하게 떨었다.
“오랜만. 드디어 여기서 만나는군.”
그동안 눈독을 들였던 목표.
치이이이-
황금 풍뎅이의 주둥이에서 노란 침이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머리 나쁜 새끼. 내가 또 당할 것 같냐!”
그동안 노란 침에 맞아 중독되어 며칠이나 고생했던가.
타아앗!
허리에 찬 목검이 손에 들리고, 날아오는 노란 침을 향해 떨어졌다.
매화토염(梅花討染).
핏핏핏핏핏-
볼품없는 목검에서 붉은 매화가 피어올랐다.
위로 매화 향이 은은하게 났다.
매화 꽃잎이 휘날리는 검공.
중원 무림에 오직 한 문파.
고진유의 목검에서 화산파의 무공, 십사수매화검법(十四數梅花劍法)의 초식이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