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523화 (523/524)

황금가 (523)

“커억!”

좌무백에 이어 죽어 가는 자가 또 있었다.

그자가 있는 곳은 혈가 앞 벌판이었다. 사내의 심장에는 다른 사내의 손이 파고들어 가 있었다.

헐떡이며 자신의 심장에 손을 찔러 넣은 자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건륭이었다.

“너, 넌 누구냐?”

사내의 손이 심장을 그러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륭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부하 오천 명이 죽어 갈 때 적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아니 죽었지만 모두 살아났다. 목을 잘라도, 몸통을 잘라도, 가루로 만들어도 다시 살아났다.

내공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곳에 있는 일만 명은 모두가 불사신이었다. 그들이 휘두른 검에 찔리고 베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공이 바닥났다. 그때 나타난 자가 바로 이자다.

불사신들을 부하로 거느린 자.

“나는 엘이다.”

엘은 주먹에 힘을 주었다.

퍽!

뭔가 터지는 소리가 건륭의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주르르!

목을 타고 넘어온 피가 입가로 흘러내렸다.

곧 건륭의 고개가 푹 꺾였다. 엘은 손을 뽑았다.

건륭의 몸속으로 들어가 심장을 터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엘은 고개를 돌려 해림이 있는 곳을 보았다. 해림 위쪽에는 천족 수십 명이 떠 있었다. 그리고 황금색 날개를 가진 자가 무차별하게 신족을 없애고 다녔다.

“루하!”

엘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루하가 아니었더라면 ‘죽은 자들의 군단’을 깨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최악의 선택을 강요한 자가 바로 루하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루하.”

엘은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동하자 ‘죽은 자들의 군단’이 그 뒤를 따랐다. 한 식경 후 그가 도착한 곳은 해림 근처 야산이었다. ‘죽은 자들의 군단’은 야산을 완벽하게 포위했다. 그리고 사냥감을 몰듯 위로 올라갔다.

“웬 자들…… 아악!”

“누구…… 으악!”

“크아악!”

야산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처음엔 십여 명씩 들려오던 비명은 곧 수백 명으로 변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야산은 인간이 죽어 가면서 내지르는 비명으로 가득 들어찼다.

‘죽은 자들의 군단’의 먹이로 전락한 자들은 군인이었다. 이들은 철포를 쏘았던 자들이자 대사공 천우황이 이끌고 온 병력이었다.

악인곡 무인도 상대가 되지 않았던 ‘죽은 자들의 군단’인데 무공도 익히지 않은 군인들이 상대가 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군인들은 ‘죽은 자들의 군단’이 아무렇게 휘두른 무기에도 죽어 나갔다.

어쩌다가 운 좋게 공격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끔찍한 광경의 목격자가 돼야만 했다. 그리고 곧바로 죽임을 당했다.

십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죽임을 당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싸움을 시작한 지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아 오군도독부 도독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천우황만 남았다.

“도대체 저들은…….”

천우황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저런 조직은 없었다.

“가만.”

문득 기억 저 안쪽에 묻었던 한 가지가 떠올랐다.

“‘죽은 자들의 군단’이란 말이냐?”

그는 버럭 소리쳤다.

짝! 짝! 짝! 짝!

허공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천우황은 고개를 들었다. 엘을 비롯한 신족 수십 명이 날개를 펼친 채 허공에 떠 있었다.

“너는 엘?”

천우황은 놀란 눈으로 엘을 보았다.

“엘이 아니고 엘 헤임 헬이다.”

“네가 헬이었단 말이냐?”

천우황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자신들이 ‘죽은 자들의 군단’ 계획을 철회하게 만들었던 자의 이름이 바로 엘 헤임 헬이다.

“주, 죽지 않았단 말이냐?”

“부활했다.”

“누가 널…….”

푸욱!

“커억!”

천우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의 출현에 너무 놀라 아무 생각도 못 하는 사이에 ‘죽은 자들의 군단’의 공격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그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퍼억!

천우황의 배에 검을 찔러 넣었던 자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고 몸통은 곧 가루로 변했다. 하지만 천우황의 몸으로 파고든 검은 그대로 남았다.

푸욱! 푸욱!

이번에는 두 자루가 뒤에서 천우황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천우황은 빙글 돌면서 손을 휘둘렀다. 굳이 공격하겠다는 의사보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퍽! 퍽!

‘죽은 자들의 군단’ 두 명의 머리가 박살 났다.

푸욱! 푸욱! 푸욱! 푸욱! 푸욱!

이번엔 다섯 자루였다.

“크아악!”

천우황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총 여덟 자루의 검이 박히자 그의 동작은 현저하게 느려졌다. 몸을 돌리는데도 한참 걸렸다. 그런 그의 몸으로 수십 개의 검이 더 꽂혔다.

털썩!

천우황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몸으로 다시 수십 개의 무기가 꽂혔다. 잠시 후 천우황은 고슴도치처럼 변했다.

그 상황인데도 천우황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가 허공에 떠 있는 엘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엘은 천우황 옆으로 내려갔다. 그는 천우황의 머리로 발을 올렸다.

“넌 절대 성공 못 한다, 헬.”

“그건 네 생각이고.”

엘은 발에 힘을 주었다.

퍽!

천우황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이어 몸통에 발을 올리고 삼매진화를 펼쳤다. 잠시 후 천우황의 몸통은 가루가 돼 흩어졌다.

“가자!”

엘은 앞장서 걸었다.

그의 목적지는 해림이었다. 그는 해림에 있는 자들을 모두 없애고 ―물론 금장생까지 포함해서다― 심무극이 있는 북경으로 갈 참이다.

일만에 달하는 ‘죽은 자들의 군단’이 몰려가는 광경은 마치 검은 구름이 땅으로 내려와 나아가는 것 같았다.

한 식경을 걷자 해림 앞에 도착했다.

어느새 아침이 됐는지 동녘이 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그때 금장생은 팔장군들과 함께 신족들을 없애고 있었다. 능천일대 대주 육겁과 이대 대주 율강리는 이미 금장생의 손에 죽었고 나머지 신족들 또한 죽어 나가는 중이었다. 날개를 펼쳐 하늘로 솟구쳐도 소용없었다. 그런 자들은 가장 먼저 금장생에게 죽었다. 넉 장밖에 안 되는 날개로 열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금장생을 떨쳐 내는 건 불가능했다. 수백 장 거리도 금세 따라잡혀 죽임을 당했다.

수백 명이 그렇게 죽자 더 이상 하늘로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생!”

무혼은 금장생을 부르며 몸을 날렸다.

“왜 그러십니까?”

금장생은 허공으로 솟구치며 대답했다.

“저거 뭐냐?”

무혼은 해림 동문을 가리켰다.

“저들은?”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아니 전에 본 적이 있는 복장이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

무혼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온통 불길한 기운으로 둘러싸인 자들이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적이다, 쳐라!”

그들을 발견한 팔왕가 무인들이 달려들었다.

곧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비명도 안 지르네?”

“아무래도 후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후퇴?”

“내가 아는 존재들 같거든요.”

“다시 살아난다.”

“놈들이 살아난다.”

공포에 전 외침이 들려왔다.

“언데드네?”

“언데드가 아닙니다.”

“그럼?”

“리치라고 했습니다.”

“저것들이 모두 리치라고?”

무혼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한 리치는 죽일 방법이 없는 최악의 몬스터다. 한 객체만 있어도 도시 하나가 몰살을 당하는데 저들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렇게 들었습니다.”

“말도 안 돼. 만일 저들이 리치라면 언데드 기운을 모두 흡수…….”

바로 그때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이 죽은 자들의 군단을 향해 달려갔다. 무혼은 말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양측은 거칠게 부딪쳤다.

결과는 한 식경 후에 드러났다. 무혼의 언데드 군단은 단 한 군도 살아남지 못하고 ‘죽은 자들의 군단’에 흡수되고 말았다.

“후퇴하라!”

“팔왕가 무인들은 서문으로 후퇴하라!”

금장생은 철수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 떨어지자 팔왕가 무인들은 해림에서 빠르게 빠져나갔다.

“놓치지 마라. 신족 군단은 저들을 죽여라!”

엘도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죽은 자들의 군단’ 진영에서 천여 명이 날아올랐다. 그들은 물러나는 팔왕가 진영으로 내리꽂히며 공격을 했다.

팔왕가 무인들은 곧바로 반격했다.

캉! 캉캉캉! 캉!

하지만 그들의 검은 ‘죽은 자들의 군단’의 몸을 뚫지 못했다. 강기를 머금은 검만이 적의 몸통을 잘랐다. 하지만 적은 죽지 않는 자들.

“아악!”

“으악!”

“크악!”

처절한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팔왕가 무인들은 다친 동료들을 부축하여 물러났다. 물러나는 와중에도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해림 담을 넘은 팔왕가 무인들은 북으로 길을 잡았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승리했다.”

아직 ‘죽은 자들의 군단’의 출현을 알아차리지 못한 해림과 마원 무인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들의 함성은 금세 ‘죽은 자들의 군단’에 묻히고 말았다.

“아악!”

“크악!”

“아아악!”

죽은 자들의 군단은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가며 해림과 마원 무인을 없앴다. 살아남았던 신족도 다르지 않았다. 땅에 있던 자들은 해림과 마원 무인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하늘로 날아오른 자들은 검은 날개를 가진 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죽은 자들의 군단’이 해림을 완벽하게 정리하는 데 반 시진이면 족했다. 그 정리 속에는 해림의 림주 옥천환과 마원의 원주 천파도 들어 있었다.

해림을 완벽하게 끝장낸 ‘죽은 자들의 군단’은 물러서고 있는 팔왕가 무인들을 뒤쫓았다.

처음엔 팔왕가 무인들이 물러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거리는 좁혀졌고 보름이 지나자 따라잡혔다.

팔왕가 무인들은 쉬어야 하는 인간인 반면, ‘죽은 자들의 군단’은 먹지도 싸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팔왕가 무인들은 싸우면서 물러나고, 물러나면서 싸웠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후우!”

금장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죽은 자들의 군단’을 없앨 방법이 없었다.

“접니다, 부영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자운영과 권말남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군요.”

금장생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군이 출병했습니다.”

“그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 규모가 우리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얼마나 되는데요?”

“오십만 명입니다.”

“…….”

금장생은 할 말을 잃었다. 말이 좋아 오십만 명이지 그 정도 인원이면 무공의 고하는 의미가 없다. 무조건 이편이 당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많은 인원을 동원할 줄은 몰랐네요.”

“처음이 아닙니다.”

“그럼?”

“이곳에서 대사공 천우황이 이끌던 십만 명이 몰살당했습니다. 천우황도 죽고요.”

“우린 싸운 적이 없는데…… 저들이군요?”

금장생은 저 멀리서 검은 구름처럼 다가오는 ‘죽은 자들의 군단’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죽은 자들의 군단은 서두르지 않았다. 언젠가는 따라잡을 수 있다는 생각 탓인 듯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쫓아왔다. 저들에게는 두 시진을 비행하면 한 식경 이상을 쉬어야 하는 비행시간 제약도 없고, 철갑거인의 탑승 시간 제약도 없다. 게다가 철갑거인이 일천 기나 된다. ‘죽은 자들의 군단’은 힘으로는 없앨 방법이 없다.

“그렇습니다.”

자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명을 철회할 방법은…….”

“그자를 제거하고 다정성모 공주님께서 전권을 행사하는 방법뿐입니다. 그리고 영반과 제독께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기 전에 청부를 이행하길 원하십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운영 옆에 서 있는 권말남을 보며 말했다.

“가서 무 형을 불러 주세요.”

“알았어요.”

권말남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금장생과 무혼은 숲길을 걸었다.

“무 형이 얻은 그 무기 말입니다.”

“신족의 최강 무기라는 데블헬?”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블헬이 어쨌다는 거지?”

“데블헬은 대마족 무기일 뿐 아니라 ‘어둠의 힘’을 소멸시키는 유일한 신깁니다.”

“저 녀석들을 없애는 유일한 무기라는 거네?”

무혼은 대번에 금장생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네.”

“어떻게 하는 건데?”

무혼은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금장생은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 얼굴은 마지막이겠지?”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마지막이 될 겁니다. 눈도, 코도, 귀도, 입도, 성기도 모두 마지막입니다.”

“그렇겠지. 그럼 작별 인사를 해야겠네.”

무혼은 빙긋 웃고는 자리를 떴다. 그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바타르였다.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하자 바타르는 ‘나는 네 영혼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겉모습은 상관없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척사랑이었다.

무혼이 지인을 만나고 다니는 사이 금장생도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을 만났다. 가장 먼저 아수수를 만났고 두 번째로 사미염을 만났다. 세 번째로 불여하와 팔장군을 만나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외에도 친했던 이들을 만나 작별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진영을 떠난 건 작별 인사를 시작하고 한 시진 후였다.

오일 동안 북쪽으로 쉬지 않고 내달린 두 사람은 산동성과 북경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멈췄다.

“만일 실패하면 어떻게 되지?”

무혼이 물었다.

“제가 말한 대로 될 겁니다.”

“종말?”

“네.”

“네가 실패하면?”

“무 형이 성공하고 내가 실패하면 팔왕가 식솔들은 멸망하고 중원인들은 신족의 노예로 전락하겠지요.”

“악수나 하자.”

무혼은 손을 내밀었다.

“날 믿어요?”

금장생은 무혼의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

“너는 내가 믿는 유일한 사람이야.”

“내가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당신을 살려 내겠습니다.”

“고맙다.”

무혼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오히려 고맙지요.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는 않은데.”

“그거…… 강시가 되면 정신을 얼마나 잃고 있어야 하지?”

“그건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언젠가는 인시, 아니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좋아. 일단은 그 정도 희망만 있으면 돼. 간다.”

무혼은 손을 놓고 산동성 쪽으로 몸을 날렸다. 무혼을 지켜보던 금장생은 무혼의 모습이 수평선 너머로 잠겨 들자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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