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522화 (522/524)

황금가 (522)

세월 속으로

악인곡 무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밖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금세 절망적인 얼굴이 됐다.

아무리 달려도 담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 막혔습니다.”

“나갈 수 없습니다.”

남쪽과 북쪽과 서쪽으로 이동했던 자들이 겁먹은 얼굴로 소리쳤다.

“무슨 소리냐?”

건륭은 잔능을 보며 물었다.

“진식이 구축된 모양입니다.”

“진식?”

“네.”

“동쪽에 나가는 길이 있다!”

“동쪽으로 가면 된다!”

동쪽으로 갔던 이들이 소리쳤다.

유공이 동쪽을 열어 준 건 건륭 일행과 좌무백을 이간질시키기 위해서였다.

“가자.”

건륭은 동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달려가는 중에는 화탄은 계속해서 떨어졌고 악인곡 무인들은 죽임을 당했다.

부하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건륭은 동쪽으로 내달렸다. 잠시 후 그들 앞에 혈가의 동쪽으로 나가는 문이 나타났다.

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건륭과 잔능은 곧바로 문을 나왔다. 혈가 동문 앞은 벌판이었다. 건륭과 잔능은 곧바로 문을 빠져나왔다.

“응?”

건륭이 달리는 속도가 느려졌다.

전방에는 아무것도 없는 어둠뿐이다. 그런데 왠지 모를 불길함이 온몸을 잠식해 왔다. 마치 저 멀리서 이편을 향해 밀려오는 새카만 비구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 뭐지?”

그는 중얼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가던 잔능이 물었다.

“이상하지 않아?”

건륭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그게…….”

건륭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게 뭔지 딱 꼬집어서 말할 수가 없었다.

“어?”

잔능의 입에서 놀람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왜 그래?”

건륭은 다급하게 물었다.

“문도들이 서 있습니다.”

“서 있다고?”

건륭은 시선을 들었다. 잔능의 말대로였다. 문도들은 갈 길을 잃은 사람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건륭은 앞으로 가며 물었다. 그가 나아가자 악인곡 문도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텄다.

“저기를 보십시오.”

문도 한 명이 전방을 가리켰다.

“……?”

건륭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백여 장 건너편에 거무튀튀한 물체가 서 있었는데 그 수가 엄청났다. 그런데 풍기는 기운이 특이했다. 언뜻 보기엔 사람 같은데 생의 기운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마치 귀신들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대원들의 발길을 잡은 모양이었다.

“별것 아니다, 가자.”

건륭은 태연한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거무튀튀한 물체는 더욱 선명해졌다.

예상대로 그것들은 사람이었다.

검은색 갑옷을 입고, 검은색 투구를 쓰고 있었다. 족히 천여 명 이상은 될 것 같은데 어디에서도 활력은 감지되지 않았다.

“누구냐!”

건륭은 버럭 소리쳤다.

파앗!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투구를 쓴 자 한 명이 이편을 향해 내달렸다.

“잔능!”

건륭은 잔능을 불렀다.

파앗!

적을 없애라는 명령임을 알아차린 잔능이 몸을 날렸다. 그와 갑옷을 걸친 자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잔능은 전 내공을 끌어 올렸다. 상대가 어떤 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대충 할 수가 없었다.

앙상한 그의 손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갑옷 입은 자의 무기가 튀어나와 잔능의 손을 막았다.

‘무기도 검네.’

잔능은 내심 중얼거렸다. 휘두르는 검도 갑옷만큼 검었다.

창!

잔능의 팔과 상대의 검이 얽혔다. 고루마공을 익힌 잔능의 팔은 금강불괴지신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잔능의 왼팔이 갑옷을 입은 자의 심장을 때렸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갑옷을 입은 자의 심장에서 터져 나왔다. 전력을 다한 잔능의 무공은 실전십패라는 명성에 걸맞게 강했다.

푸스스!

갑옷을 입은 자가 순식간에 가루로 변했다.

잔능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휙! 휙!

두 걸음 물러났을 때 적진에서 두 명이 튀어나왔다. 그들의 움직임도 상당히 빨랐다.

“얼마든지 환영해 주마.”

잔능은 두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달려오는 자들을 공격했다. 두 명과 오 초 정도 겨뤘을 때였다.

“저, 저, 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잔능의 뒤를 보았다. 놀랍게도 조금 전 잔능에게 죽임을 당해 가루로 변했던 자가 살아나고 있었다.

“잔능, 위험하다!”

건륭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가 위험하다는 거지?’

잔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 두 명을 향해 고루마장을 펼쳤다.

퍽! 퍽!

그의 장력은 정확하게 갑옷을 입은 자의 심장을 때렸다.

푸스스! 푸스스!

갑옷을 입은 자의 몸이 가루로 변했다.

“피해라, 잔능!”

건륭의 외침이 다시 들려왔다.

“둘 다 없앴습…….”

푸욱!

“커억!”

잔능의 입이 쩍 벌어지고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명치를 뚫고 검 끝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오른팔을 뒤로 휘두르며 몸을 돌렸다.

퍼억!

몸을 돌린 그가 발견한 건 조금 전 가루로 변했던 자였다. 방금 공격으로 떨어져 나간 듯 오른팔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는 멍한 얼굴로 갑옷을 입은 자를 보았다.

갑옷을 입은 자는 왼팔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퍼억!

“크아악!”

잔능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머리가 박살 난 잔능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척! 척척척! 척척!

잔능의 죽음이 신호탄인 모양이었다. 가만히 서 있던 자들이 악인곡 무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갑옷을 입은 자들은 앞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좌측과 우측 그리고 조금 전 악인곡 무인들이 나왔던 동문 쪽에 새카맣게 깔려 있었다.

악인곡 무인들은 완벽하게 포위된 상태였다.

“어디서 이런 자들이…….”

건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중원에서 가장 강한 세력인 춘추오패와 팔왕가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다. 양측 어느 쪽도 병력을 다른 곳으로 돌릴 형편이 아니다. 그런데 저 앞에 있는 자들은 만여 명에 육박한다.

―‘죽은 자들의 군단’이라 부른다.

건륭의 귓전으로 전음이 파고들었다.

“죽은 자들의 군단?”

―한 번 죽은 자들이라 다시는 죽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생명체는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반드시 죽는다!”

건륭은 버럭 소리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결코 상대가 겁나서가 아니었다. 일생을 쏟아부었던 대업을 더 이상 이어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몸을 떤 것이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고, 공격하라!”

건륭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우와아!”

“와아아아!”

악인곡 무인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악인곡 무인들이 공격을 시작한 그 시각, 팔왕가 무인들도 공격을 시작했다.

공격의 시작은 탈취한 철포였다.

“쏴라!”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일천 기의 철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허공을 가른 화탄은 해림 진영으로 떨어졌다.

“화탄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쏴라!”

금장생을 대신해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아수수였다. 혈가와 마가 무인들은 계속해서 철포를 쏘았다.

“무슨 일이냐?”

좌무백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처음 그는 철포 소리가 혈가 쪽에서 들려오는 걸로 여기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철포 소리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콰앙! 콰앙!

그때 머리 바로 위에서 화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좌무백은 당황했다. 철포를 준비한 건 자신이고 화탄은 혈가를 향해 날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편을 향해 날아오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 아무도 없느냐!”

좌무백은 다시 소리를 내질렀다.

“목소리는 아직 정정하구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넌?”

좌무백의 눈이 커졌다.

“정말 오랜만이오, 삼장로.”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금장생이었다. 금장생은 들고 있던 물체를 좌무백 앞으로 던졌다. 좌무백을 시중들던 신족들의 머리였다.

“루, 루하!”

좌무백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렇소. 한때 당신들이 숭배하며 떠받들었던 신왕 루하요.”

금장생은 좌무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쿡!”

이내 안정을 되찾은 좌무백은 피식 웃었다.

“너는 상급 신족 중 가장 약했다, 루하. 역대 신왕 들 중에서도 가장 약했고.”

자신을 비롯한 장로들이 신왕을 내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약하기 때문이었다.

“라헬 장로가 내 손에 죽었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요?”

“그건 라헬이 약해서지 네가 강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겠느냐? 철갑거인을 불러내겠느냐? 아니면…….”

“삼장로는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나는 이걸로 해결하고 싶다.”

좌무백은 양팔을 들어 올렸다.

“좋은 방법입니다.”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그 역시 철갑거인을 불러내 일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허락한 걸로 알겠다.”

파앗!

좌무백은 곧바로 금장생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금장생이 라헬을 이긴 게, 라헬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비아냥대긴 했지만,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라헬을 이겼다는 건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빠른 시간에 끝내지 않으면 자신이 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게다가 금장생의 여유 있는 얼굴을 보자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딱 세 번만 공격하겠습니다.”

금장생은 왼팔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악마수에서 백색의 원반이 좌무백을 향해 쏘아졌다.

“허억!”

금장생을 향해 쏘아져 가던 좌무백은 질겁했다. 그는 다섯 번이나 위치를 이동해서 악마수로 펼친 백안을 간신히 피했다. 그가 막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 금장생의 오른팔이 허공을 갈랐다.

반투명한 광채를 발하는 소도가 좌무백을 향해 쏘아져 갔다. 좌무백은 전력을 다해 오른편으로 몸을 날렸다.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반투명한 소도가 수십 개로 늘어났다. 모두 백여덟 개로 늘어난 소도는 좌무백의 몸통으로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커억!”

좌무백은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건 데스 케이나인!”

좌무백은 경악한 얼굴로 자신의 몸과 금장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피할 여유도 없이 상대방의 몸에 수십 개의 구멍을 뚫어 버리는 가공할 무기. 그가 아는 한 그런 무기는 데스 케이나인뿐이었다.

“마족의 제사장 하울라로부터 얻은 건데 데스 케이나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군요.”

“지, 지금 하울라라고 했느냐?”

좌무백은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이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금장생은 오른손 손바닥을 폈다. 그러자 가드헬이 솟아 나왔다.

“가드헬!”

좌무백은 비명처럼 소리쳤다. 신족의 무기인 데블헬이 가장 얻고 싶어 했던 무기라면 가드헬은 가장 없애고 싶어 했던 무기다. 그런데 그 무기의 주인이 바로 한때 신족의 왕이었던 루하였다.

“이걸로 죽으면 설사 생이 남았다고 해도 환생이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겠죠?”

“어차피 남은 생도 없다.”

좌무백은 체념하듯 말했다.

“미련은 남지 않겠군요.”

금장생은 가드헬을 밀었다.

슉!

순식간에 허공을 가른 가드헬이 좌무극의 심장을 뚫었다.

좌무백은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그는 가루로 변해 가는 자신의 심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털썩!

그는 곧 무릎을 꿇었다.

“시, 신왕!”

푸스스!

그 말을 끝으로 좌무백은 가루로 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