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519)
팔왕가에서 해림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빠르게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 소문을 접한 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은 팔왕가가 어떤 단체인지 잘 알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러다가 운성과 천야교를 멸망시킨 세력이란 사실이 알려지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현재 강호에서 운성과 천야교 멸망은 가장 큰 사건이었다. 멸망한 문파는 다른 곳도 아니고 춘추오패의 두 곳이었다. 어떤 자들이 그들을 공격했는지 궁금했는데 드디어 밝혀진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팔왕가가 어떤 세력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서 나온 건 거의 없었다.
언제 생겨난 세력인지 어떤 자들인지도 알려진 게 없었다. 중원 무인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해림이 있는 안휘성을 주시했다.
천우황은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섰다. 그러자 내관들이 좌우측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긴한 이야기를 할 참이다.”
천우황은 내관들을 향해 나직하게 말하고는 문턱을 넘어선 상태에서 멈췄다.
“알겠습니다.”
내관들은 문을 닫고 물러갔다.
그러자 천우황은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안쪽에는 심무극이 보료에 기대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심각한 일인가 보군.”
심무극은 천우황의 얼굴만 보고도 사안의 경중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당했네.”
천우황은 심무극 건너편으로 앉으며 말했다.
“그들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건가?”
“초무극과 역천대 그리고 암흑오부족 연합군이네.”
“루하를 잡기 위해 전함을 타고 바다로 나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네.”
천우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당했다고?”
“닷새 전에 소식이 끊겨서 알아보았는데 이제야 발견했다고 하네.”
“발견했다는 건…….”
“전함은 침몰하고 나머지는 무인도에서 죽은 걸로 확인됐네.”
“전부?”
“수색대가 발견한 건 다량의 피와 살점 그리고 초무극의 시체뿐이네. 무인도 근처 해안에서는 침몰한 전함을 발견했고.”
“생존자는 한 명도 없다고 하던가?”
“그 무인도는 배로 이틀을 가야 하는 먼바다에 있다네.”
“굶겨 죽였구먼.”
심무황은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무인도에서 수백 개의 구덩이를 발견했다고 하였네.”
“구덩이면…….”
“우물을 판 흔적이라고 하더구먼.”
“물도 없었다면 더 힘들었겠구먼.”
“힘든 정도가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을 거네. 그래서 초무극을 공격한 거고.”
“초무극을 죽인 자들이 능천대라는 건가?”
“능천대 대원의 검 두 자루가 초무극의 몸에 꽂혀 있었다네.”
“그랬구먼.”
심무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원도 멸문했네.”
“마원도?”
심무극의 눈이 커졌다. 마원에 대한 건 처음 듣기 때문이었다.
“비어 있던 곳이라 멸문했다고 하기엔 그렇지만, 아무튼 마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네.”
“비어 있다는 건 무슨 뜻인가?”
“마원 무인들은 감숙성의 전가와 낙양에 있는 진가장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을 한 상태였네.”
“그 텅 빈 곳을 팔왕가에서 공격했다는 건가?”
“그들을 공격한 자들은 팔왕가가 아니라 환수각이었네.”
“환수각이면 춘추오패의 한 곳 아닌가?”
“맞네.”
“환수각이면 척사랑이 배신했다고 봐야 하는 건가?”
“그런 것 같네.”
“운성과 천야교, 마원이 멸망하고 환수각은 배신했으니까 남은 건 해림뿐이구먼.”
“그렇네.”
천우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내 생각에는 팔왕가에서 해림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낸 자가 루하인 것 같네.”
“그가 일부러 소문을 냈다는 건가?”
“그렇네.”
“왜?”
“그의 성격 알잖은가?”
“인도주의자라고?”
“아무리 다른 인격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본성은 바뀌지 않네. 그는 중원 전역이 전쟁터가 되는 걸 원하지 않을 거네.”
“그래서 해림 한 곳에서 승부를 낼 생각이란 말이군.”
“내 말이 맞을 거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어야지.”
“놈의 의도대로 행동하자는 건가?”
“지금 중요한 건 누군가의 의도가 아니라 누가 승리하느냐 하는 거네.”
“안휘성 전쟁에서 승리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건가?”
“그렇지 않겠는가?”
“흠!”
심무극은 생각에 잠겼다.
“만일 말이네.”
한참을 생각하던 심무극이 입을 열었다.
“말하게.”
“만일 우리가 패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가 패할 리가 없네.”
“가정을 해 보게.”
“그건…….”
천우황은 말끝을 흐렸다.
“지금까지의 관례에 따르면 황실은 전쟁의 승자를 무림의 주인으로 인정을 해 왔네. 물론 직접적인 의사표시를 하진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동의를 했다는 거네.”
“다시 말하지만 우린 패하지 않네.”
“우리 중 누구도 루하가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네. 그런데 그가 나타났고 최강의 적이 됐네. 세상일은…….”
심무극은 잠시 말을 끊고 차를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도 알 수 없네.”
“그럼 군을 출병시키는 수밖에 없네.”
“군?”
심무극은 천우황을 보았다.
“먼저 출병할 필요는 없고 근처에서 지켜보다가 아군이 패하면 그때 나타나서 투항을 요구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군을 보낸 사람이 나라는 걸 알 테니까 절대 투항하지 않겠지.”
“그는 군을 없애든지 도망을 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네.”
“어떤 방법을 택해도 놈은 반역의 덤터기를 쓰게 된다는 뜻이구먼.”
심무극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네.”
천우황 역시 미소를 지었다.
“군은 자네가 통솔하게.”
“내가?”
천우황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반역의 덤터기를 확실하게 씌우려면 대사공 정도 되는 사람이 대장군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오군도독부 도독을 부장으로 거느리면 더 확실해지겠구먼.”
“좋은 생각이네.”
심무극은 활짝 웃었다.
“이왕 왔는데 술이나 한잔 어떤가?”
심무극은 찻잔을 옆으로 치우며 물었다.
“좋지.”
천우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봐라!”
심무극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 * *
전국 각처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수의 무인들이 한곳을 향해 이동했다.
가장 먼저 무인이 발견된 장소는 변황과 중원의 경계 지점인 옥문관이었다.
피풍의를 걸친 무인 삼천여 명이 옥문관으로 이어진 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변황 사가 무인 이천 명과 신강, 흑지 무인 일천 명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태양제 혈사륵과 흑지 지존, 신강태존 태천야와 그의 딸 태월령이 달리고 있었다.
두 번째로 무인 무리가 발견된 장소는 사천과 호북성의 경계 지점인 무산이었다.
그들은 낮으로는 쉬고 밤에만 이동했다. 검은 피부에 갑옷을 걸친 이들은 환수각을 떠나온 기사들과 언데드들이었다.
세 번째로 무인 병력이 발견된 곳은 감숙성이었다. 무기를 찬 무인 삼천여 명이 동쪽으로 몸을 날렸다.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은 팔왕가의 한 곳인 전가 무인과 요색 봉란이 이끄는 만인물성 무인들이었다.
네 번째로 무인이 발견된 장소는 귀주성과 호북성의 경계 부근에서였다. 그들은 대천좌 헌원중천이 이끌고 있는 화가火家 무인들이었다.
다섯 번째로 무인이 발견된 곳은 절강성과 안휘성의 경계 지점이었다. 자색 무복을 입고 달려가는 무인 이천여 명의 선두에는 군자마검 최중헌이 있었다. 그렇게 중원 각처에서 무인들이 안휘성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달 스물닷새 되는 날 혈가로 스며들어 갔다. 혈가에 식량을 제공해 준 측은 대륙황가와 상천금가 두 상단이었다. 식량 공급 또한 철저하게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혈가로 들어간 이들은 금장생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 * *
“알아보았느냐?”
좌무백은 안으로 들어온 옥천환을 보며 말했다.
마가를 추격하던 그는 금장생이 해림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접하자마자 추격을 중지하고 안휘성 해림으로 왔다. 그리고 곧바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간밤에 암가 무인 오백 명이 추가로 들어간 걸 확인했습니다.”
“하면 그 안에 2만 명 가까이 들어갔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옥천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도 모았구나.”
좌무백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현재 자신이 보유한 병력은 모두 긁어모아도 일만 삼천 명이다. 그런데 적은 자신들보다 칠천 명이 더 많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손님 오셨습니다.”
그때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를 찾아온 손님이냐?”
옥천환이 물었다.
“심황을 찾고 있습니다.”
“그자군.”
좌무백은 빙긋 웃으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를 찾아온 사람은 광마투신狂魔鬪神 건륭이었다.
“어서 오시오.”
좌무백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
“다시 보니 좋군요.”
건륭은 빙긋 웃었다.
“내 제안은 생각해 보셨소?”
좌무백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난 구두 약속은 믿지 않소이다, 좌 대협.”
“그래서 이렇게 어명을 준비했소.”
좌무백은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륭 앞에 놓았다. 건륭은 종이를 펼쳤다. 거기에는 정이품正二品 무림장군에 봉한다는 어명이 적혀 있었다.
녹봉은 무려 이만 석이었다.
“그것 외에 강북 무림의 소유권을 허락한다는 교시도 함께 내렸소.”
좌무백이 말을 이었다.
“그건…….”
“해림 림주나 마원 원주도 있어서 그건 문서로 작성할 수 없었소. 그건 이해해 주시오.”
“알았소이다.”
건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에 대해서는 암묵적 동의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하면 된다.
“공격은 언제 할 거요.”
“혈가 주위로 병력을 배치해 놓고 기다리면 바로 알게 될 거요.”
“한배를 탔는데도 비밀로 할 작정이오?”
건륭은 좌무백을 쏘아보았다. 자신만 따돌림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이번 공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오.”
“끙!”
건륭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이 없다. 다만 혈가 근처에 병력을 배치하라는 건 조만간 공격한다는 뜻이니까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된다.
“며칠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요.”
“알겠습니다.”
건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그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의 숙소에는 고루시마 잔능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혈가 근처로 병력을 이동시켜 놓으라고 하더구나.”
“언제 공격한답니까?”
“그건 비밀이래.”
“비밀이라고요?”
잔능의 눈이 커졌다.
“공격 날짜를 아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하더구나.”
“……그자를 믿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잔능이 물었다.
“안 믿어.”
건륭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내가 그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세 가지 이익이 있기 때문이야. 첫째는 더 이상 황실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는 거고, 둘째는 합법적인 무림 세력을 세울 수 있게 됐다는 거고, 셋째는 장차 적이 될 소지가 있는 자들을 미리 없앨 기회를 얻었다는 거야.”
“그렇군요.”
잔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그 세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셋 중 가장 중요한 건, 더 이상 황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자신들에게 황실은 그만큼 높은 담이었다.
“그리고 이걸 받았어.”
건륭은 어명이 담긴 종이를 꺼내 보여 주었다.
“최곱니다.”
어명을 본 잔능은 활짝 웃었다.
“내 생각도 그래. 이제 병력을 이동시키도록 하자고.”
“알겠습니다.”
잔능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갔다.
“이제 내 시대가 온다. 이 건륭의 시대가.”
혼자 남은 건륭은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