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517)
왕 중의 왕
“저렇게 놔두고 가도 괜찮아요?”
불여하는 멀어지는 무인도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그녀가 타고 있는 선박을 비롯한 혈가의 모든 배는 왕관호를 빠져나와 먼바다로 항해 중이었다.
“지금 바로 싸우고 싶어요?”
“다 잡아 놓고 풀어 준 것 같아서 그래요.”
“놓아주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잡기 위해서 그래요.”
“확실하게 잡아요?”
“네.”
“저는…….”
불여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채로 금장생을 보았다.
“내가 마가 무인을 각 섬에 먼저 내려 준 이유가 뭔지 아세요?”
“적이 섬으로 상륙하면 기습해서 없애라고 내려 준 게 아니었어요?”
“날아다니는 자들을 무슨 수로 없애요?”
“그럼.”
“그들의 임무는 섬의 수색이었습니다.”
“섬을 왜 수색하죠?”
“물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배에 물이 부족해요?”
“우리가 수십 번도 더 목욕할 수 있는 물이 준비 돼 있으니까 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물은 왜…… 아! 그들 때문이군요.”
불여하의 얼굴이 활짝 갰다. 난제를 해결한 사람의 얼굴 표정이었다.
“맞아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침몰한 배에는 물이 남이 있지 않나요?”
“거기 물도 이미 바닷물과 섞여 남아 있는 건 없습니다.”
“그럼 그들은…….”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을 지닌 무인을 신에 빗대어 말하고, 무슨 무슨 신神으로 끝나는 별호가 많지만, 무인이 신이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아세요?”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거?”
“맞습니다. 일 장에 산을 무너뜨리는 무인이라고 해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건 신족, 마족, 엘프, 드워프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들 역시 먹지 않으면 죽어요. 물이 없으면 더 빨리 죽고요.”
“그렇네요. 더구나 물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인데.”
“결국엔 바닷물을 마시게 될 거예요. 그럼 물을 안 마시고 버틸 때보다 더 빨리 죽어요.”
“당신 엄청나네요.”
불여하는 혀를 내둘렀다.
설마 금장생이 이런 방법으로 적을 없앨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치렀던 많은 전쟁 중 가장 완벽한 승리가 될 것 같았다.
* * *
“물이 없습니다.”
육겁은 굳은 얼굴로 보고했다.
“억!”
초무극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물이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놈들이 배를 침몰시키고 명나라 수군만 없앤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들이 없다는 건 바다를 잘 아는 자들이 한 명도 없다는 걸 뜻한다.
평생을 숨어 살았던 암흑오부족이나 신족들이 바다에 대해 알 리가 없다.
“다, 당장 배로 가서 물을 꺼내 와라! 다른 사람은 섬에서 물을 찾아라!”
초무극은 사색이 돼 고함을 내질렀다.
최고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선뜻 물로 뛰어드는 자는 없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이 물로 뛰어들지 못하는 건 물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이었다. 수공을 익힌 적도 없고 물에서 놀아 본 적도 없어 수영을 못 하는 그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육겁!”
초무극은 육겁을 보았다.
“수, 수영을 못 합니다.”
“맙소사. 수영이 가능한 자는 없느냐?”
초무극은 소리쳐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염병할!”
결국 초무극이 나섰다. 그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침몰한 전함으로 갔다. 곧바로 보급품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럴 수가?’
그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담수를 담았던 통은 뚜껑이 열려 있었다.
누가 뚜껑을 열었든 간에 배에는 마실 물이 없다. 곧바로 자리를 옮겨 식량 창고로 갔다. 식량 창고는 적의 소행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식량이 들어 있던 자루들이 모두 찢겨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대원들은 궁금한 얼굴로 초무극을 보았다.
“무조건 물을 찾아내라. 찾지 못하면 우린 여기서 죽는다.”
초무극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신족들은 각 섬을 샅샅이 훑었다. 일부는 물을 찾고 일부는 혈가 무인의 배를 수색했다. 물을 찾기 위한 수색은 오래 걸렸다.
바위를 들춰보고 땅을 파고 나무를 뽑았다. 물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밤이 찾아왔다. 밤이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빼먹고 그냥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수색은 낮에만 해야 했다.
물과 식량이 없다고 생각하자 더 목마르고 더 배가 고팠다. 하루 종일 서른 개의 섬을 수색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수색을 시작했다.
바닷물을 바라보며 침을 삼키는 자들이 늘어났다. 수색을 하는 이들과 별개로 일부는 초무극의 지시로 샘을 팠다. 그들이 샘을 파는 데 사용하는 도구는 장력과 무기였다. 물이 나올 만한 곳을 골라 땅을 향해 무공을 펼쳐 구덩이를 팠다.
하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샘을 파고 수색을 하면서 닷새가 흘렀다.
상황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목마름과 기아에 점점 지쳐 갔다.
결국 갈증을 견디다 못한 신족 몇몇이 바닷물을 마셨다. 하지만 갈증을 견디지 못해 바닷물을 마시는 건 불을 끄기 위해 기름을 붓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더욱 목마름에 신음하다가 결국엔 숨졌다. 동료가 죽자 더욱 급해졌다. 신족들은 미친 듯이 땅을 팠다. 그들이 판 구덩이만 해도 백 개가 넘었다.
어느새 보름이 흘렀다.
“물이다! 물이 나온다!”
구덩이를 파던 대원의 입에서 기쁨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디냐?”
초무극은 전력을 다해 내달렸다. 평소 같으면 한달음에 도착할 수 있는 짧은 거리였지만 오늘은 한 참이 걸렸다. 그마저도 내려서서는 심하게 비틀거렸다. 우물 앞에 도착해서는 안으로 보았다.
대원 두 명이 정신없이 땅을 파고 있었다. 검으로 땅을 파낼 때마다 축축하게 젖은 땅이 나왔다.
“무, 물이 고인다!”
땅을 파던 사내가 소리쳤다. 사내의 말대로였다. 바닥에는 조금씩 고이고 있었다. 잠시 후 손바닥으로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 모였다.
사내는 얼른 두 손을 모아 물을 떴다. 흙탕물이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대로 입으로 집어넣었다.
“우엑!”
사내는 구역질을 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왜, 왜 그러느냐?”
초무극이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짠물입니다. 바닷물이란 말입니다.”
사내는 절규하듯 소리쳤다.
“아!”
초무극은 털썩 주저앉았다.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땅속에서 나온 물이 어떻게 짤 수 있냐고.”
대원 한 명이 구덩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고여 있는 물로 머리를 처박았다. 그는 정신없이 물을 마셨다.
“아! 시원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내는 구역질을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냥 마실래. 물이 저렇게 많은데 마실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대원 한 명이 실성한 것처럼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맞아. 어차피 죽는다잖아. 그럴 바엔 마시고 죽는 걸 택할래.”
또 한 대원이 바다로 걸어갔다.
“나도 마실래.”
“나도…….”
“나도…….”
수십 명이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그들 중에는 능천일대 대주 육겁도 있었다.
“뭐, 멈춰라!”
초무극이 소리쳤다.
“멈추면 물을 줄 겁니까?”
육겁이 고개를 돌려 초무극을 보며 물었다.
“…….”
초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인간을 믿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죽는 건 당신 때문이야.”
육겁은 다시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능천일대 대원 수십 명이 바다에 얼굴을 처박고 바닷물을 마셨다. 그리고 몸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
하지만 바닷물은 또 다른 갈증을 불렀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바닷물을 마셨다.
초무극은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해 줄 것도 해 줄 말도 없었다. 어쩌면 바닷물을 마시는 순간에 불과할지라도 갈증이 해소됨을 택한 저들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 부러웠다.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목으로 넘어가는 침은 없었다.
“당신 때문이야.”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무극은 고개를 돌렸다.
능천이대 대주 율강리가 차가운 눈으로 이편을 쏘아보고 있었다.
“나?”
초무극은 자신을 가리켰다.
“맞아. 과거에 노예였던 인간들이 주인인 우리를 배신했던 것처럼 너도 우리를 배신한 거라고. 우리 모두가 죽으면 그놈들이 오겠지. 그리고 네게 물을 줄 거야. 어때, 내 말이 틀려?”
“맞아.”
“저자 때문이야.”
“저놈이 그놈들과 공모해서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야.”
“인간 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
신족들은 초무극을 향해 다가갔다.
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몸에서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만일 초무극이 인간이 아니고 신족이었다면 책임 전가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 그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초무극에 전가해 버렸다. 그들에게는 초무극을 죽인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인지할 만큼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서 오는 분노를 누군가에게 풀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너희들은 상전이다.”
초무극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처음부터 난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노예 놈이 상전인 게 싫었다고. 네놈은 상전이 아니라 노예에 더 어울려.”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율강리.”
“비천한 노예 놈이. 죽여!”
율강리는 대원들에게 버럭 소리쳤다.
“차하!”
“타하!”
“하아!”
신족들은 초무극을 향해 몸을 날렸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초무극은 내기를 끌어 올렸다. 내공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지만 신족 나부랭이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양손에서 강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를 무림십패 서열 일위에 올려놓았던 제왕혼帝王魂이란 장력이었다.
퍼억! 퍼억! 퍼억! 퍼억!
그의 장력은 달려오는 자들의 가슴을 쳤다.
“아악!”
“으악!”
“크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신족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살기를 흘리며 초무극을 향해 달려들었다. 초무극의 양손이 더욱 빨라졌다.
춤을 추는 것처럼 오른편으로 왼편으로 앞으로 뒤로 빠르게 움직였다. 빠르게 움직이던 그의 팔이 어느 한 지점에서 정지할 때마다 검은색 덩어리가 신족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것은 제왕의 눈이라고 부르는 장력으로, 제왕혼의 가장 강한 초식이었다.
픽! 픽픽!
부딪치는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위력은 조금 전보다 더 강했다.
부딪치는 순간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신족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죽어 나갔다.
퍼억!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초무극의 이마를 쳤다.
주르르!
순식간에 피가 흘러내렸다.
“죽일!”
초무극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가 돌멩이에 맞은 건 부주의해서도, 상대가 강해서도 아니었다. 아이들 돌팔매 같은 속도로 날아오는 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으면 튕겨 나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니 과거엔 자신의 몸 일 장 근처까지도 다가오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머리를 쳐서 상처를 낸 것이다.
“크엉!”
초무극은 짐승처럼 포효하며 몸을 날렸다.
더 이상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무림십패 중 서열 일위라는 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무공이 더 강하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지만 신족들은 인정해 주지 않았다. 자신의 주장을 펼칠 기회도 없었다. 늘 한직에 머물며 꼭두각시처럼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게 자신의 삶이었다.
“크아아아아아!”
그동안 신족들에게 당했던 모든 수모가 분노로 폭발했다. 그는 살기로 둘러싼 무기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