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515)
선단이 항해를 멈춘 건 이틀 후 점심 무렵이었다.
차를 마시던 금장생은 선실을 나왔다.
“무슨 일 있나요?”
선수로 나가 있는 도쿠가와 신켄을 보며 물었다.
“저길 보십시오.”
도쿠가와 신켄이 전방을 가리켰다. 금장생은 시선을 모았다. 그러자 수십 척의 배가 시야에 들어왔다.
“선박이네요?”
“네. 그런데 어선이 아닙니다.”
“어선이 아니면…….”
금장생은 도쿠가와 신켄을 보았다.
“전함입니다.”
“명나라 수군이란 말인가요?”
“네.”
도쿠가와 신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은 전함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서른 척 가까이 됐다.
“전함이 저렇게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경우가 있나요?”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그럼 저들의 목표는 우리겠군요.”
둥둥둥둥! 둥둥둥둥!
바로 그때 요란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전함의 속도가 빨라졌다.
“신풍도 쪽으로 가요.”
위에서 오다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장생은 고개를 들었다. 오다아이가 돛대 위로 올라가 있었다.
“신풍도로 간다!”
도쿠가와 신켄은 크게 소리쳤다.
“신풍도다!”
“신풍도로 간다!”
이어 복창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선단이 방향을 먼바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른 척의 전함이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갈랐다.
전함의 갑판에는 신족과 암흑오부족 무인들이 도열한 채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돛대 위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역천일대 대주 육겁은 전방으로 시선을 모았다. 정찰병의 말처럼 이편을 향해 다가오던 배들이 먼바다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육겁은 급히 지휘소로 올라갔다. 선장실 위쪽에 있는 지휘소에는 초무극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놈들이 눈치챈 것 같습니다.”
지휘소 안으로 들어가 보고했다.
“정발야를 불러와라.”
정발야는 명나라 수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이었다. 초무극이 타고 있는 전함을 비롯한 서른 척의 배에는 명나라 수군과 신족들이 함께 타고 있다. 명나라 수군은 노를 젓고 신족들의 수발을 들었다.
초무극의 부하인 초인사 대원들도 수군으로 위장해 배에 타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곧 갑옷을 걸친 자가 올라왔다. 장군도를 찬 이자가 지휘관인 정발야였다.
“저쪽으로 나가면 뭐가 있느냐?”
초무극은 먼바다로 나가는 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백여 개의 무인도가 있습니다.”
“뱃길은 잘 아느냐?”
“작전구역이 아니라서…….”
정발야는 말끝을 흐렸다.
“모른다는 거냐?”
“죄송합니다.”
정발야는 고개를 숙였다.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전속력으로 쫓아라.”
“알겠습니다.”
정발야는 고개를 숙이고 아래로 내려갔다. 곧 요란한 북소리가 퍼져 나갔다.
전력을 다해 노를 저으라는 신호였다.
츄아악! 츄아악! 츄아악!
전함이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갈랐다.
초무극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방을 바라보았다. 도망치는 배들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일 터였다.
“신족의 왕이었던 자가 신족과 전쟁을 치렀던 자들의 후손의 수장이 되다니 역사는 참…….”
초무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노예 후손이면서 신족 편에 섰으니까 그게 그건가?”
이내 피식 웃었다.
운명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신족의 왕이었던 자는 신족과 싸우고, 노예의 후손인 자신은 인간들과 싸운다.
“원래 세상이라는 게 옳고 그른 것 없지. 내 신념과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 차이만 있을 뿐.”
하루를 꼬박 항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섬이 보였다. 무인도라고 해서 몇 걸음 걸으면 반대편이 나오는 그런 작은 섬 정도로 생각했는데 멀리서 보는데도 상당히 크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끝에서 끝까지 이천 장은 될 듯하다. 그런 섬이 좁쌀처럼 박혀 있었다.
도망치던 배들이 섬과 섬 사이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명나라 수군이 섬 근처에 도착한 건 반 시진 후였다.
초무극은 바닥을 차고 솟구쳤다. 십 장 높이까지 솟구쳤지만 모든 섬이 다 보이지 않았다.
―육겁, 가마를 가져와라!
육겁에게 전음을 보냈다.
곧 신족들이 가마를 가지고 올라왔다. 초무극은 가마를 타고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삼십 장 정도까지 올라가자 비로소 무인도가 다 보였다.
무인도는 남북으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십 리는 돼 보였다.
“그런데…….”
초무극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 무인도 안으로 들어간 배들이 보이지 않았다. 한두 척이라면 섬 그늘에 숨었을 거라고 하겠지만 적은 스무 척이나 된다.
“드러나지 않는 장소가 있다는 거네.”
초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로.”
그는 가마를 들고 있는 자들에게 말했다. 곧 가마가 아래로 내려갔다.
이십 장 높이까지 내려오자 섬이 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섬은 기암괴석이 따로 없었다. 한가운데가 일자로 갈라진 섬이 있는가 하면 거대한 동물의 갈비뼈처럼 생긴 섬도 있었다. 저런 형태의 섬이라면 스무 척 아니라 이백 척도 숨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려가자.”
초무극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가마를 몰던 이들이 아래로 내려갔다.
배는 무인도 입구에서 멈춰 서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육겁이 물었다.
“해도는 준비했느냐?”
“여기 있습니다.”
육겁은 들고 있던 양피지를 내밀었다. 양피지에 그린 군용지도였다.
“진입해라.”
“금세 어두워질 겁니다.”
육겁이 우려 어린 얼굴로 말했다.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길도 모르고, 바다 위다. 이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적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하게 했다.
“너희들에게는 우리 인간에게 없는 날개가 있다. 다급하면 하늘로 올라가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냐?”
초무극은 비아냥대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육겁은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전함은 무인도 안으로 들어갔다. 수로가 좁아져서인 듯 바깥쪽보다 물살이 거칠었다. 자칫 잘못하면 암초에 걸려 전함이 부서질 수도 있는 험한 곳이었다.
배는 좌우를 살피면서 천천히 나아갔다.
어둠은 금세 찾아왔다. 무인도 군락으로 들어선 지 반 시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주위는 어둠으로 들어찼다. 달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오늘 밤에는 달도 뜨지 않았다.
“너무 어둡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암초를 만난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정발야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일대주.”
초무극은 육겁을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불을 밝히고, 위로 올라가서 정찰을 해라.”
“알겠습니다.”
육겁은 아래로 내려갔다. 곧 각 전함에 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수백 명의 신족이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갔다.
“정 장군.”
초무극은 정발야를 불렀다.
“네.”
“진영을 구축할 만한 섬이 있느냐?”
“지금 물때가 썰물이라 물살이 거칠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건 위험합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닻을 내리는 게 낫습니다.”
“만일 여기서 진영을 구축한다면 어떤 형태를 취할 거냐?”
“한가운데 대장선을 두고, 십자형으로 배치할 생각입니다. 각 전함은 측면 갑판을 붙여서 옮겨 다닐 수 있게 하고요.”
“율강리와 함께 진영을 구축해라.”
초무극은 역천이대 대주 무혼마제 율강리를 보았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아래층 선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암흑오부족 수장들이 앉아 있었다.
“여기서 진영을 구축하기로 했소.”
율강리는 하발 일행을 보며 말했다.
“말하시오.”
“대장선을 중심으로 십자 형태의 진형을 구축하기로 했소.”
“십자 형태?”
하발은 정발야를 보았다. 작전을 세운 자가 정발야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간단합니다.”
정발야는 그림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중앙에 대장선을 두고 남북으로 열세 척, 동서로 열세 척을 배치하고, 남은 세 척은 순찰선으로 활용하는 배치였다.
“암흑오부족 전함을 외곽으로 배치하도록 하시오.”
듣고 있던 율강리가 말했다.
아락과 하발은 율강리를 빤히 보았다. 위험한 쪽을 암흑오부족에게 맡기려는 술수가 빤히 보였다.
“지휘관의 명령이오.”
율강리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쿡!”
아락은 피식 웃었다.
“명령을 듣지 않을 참이오?”
율강리는 도발적인 표정으로 아락을 보았다.
“우리 전천사가 선봉에서 목숨 걸고 싸울 때 너희들은 뭐 했는지 아느냐?”
아락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모르오.”
율강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너처럼 목숨을 건질 궁리만 했다. 승리하기 위해 머리를 짜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위험에서 멀어질 수 있는지 그것만 궁리했단 말이다. 그러다가 승리할 기미가 보이자 공훈을 차지하기 위해 우리를 가장 먼저 쳐 냈다. 가장 열심히 싸웠던 우리를 말이다.”
“나는 그 결정에 관여하지 않았소. 그리고 따지고 싶으면 세 분 장로께 가시오. 지금은 내 말을 따르시오.”
“…….”
아락은 율강리를 노려보았다.
율강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조소까지 머금었다. 눈싸움은 한동안 지속됐다. 시선을 먼저 돌린 사람은 아락이었다.
“우리 전함을 댈 곳을 말해라.”
“쉽소. 동서남북 네 곳의 가장 외곽에 대면 되오.”
“알았다.”
아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도 가야겠군.”
아락에 이어 하발도 나갔다. 그에 이어 아르카도 나갔다.
“만족하시오?”
하발은 아르카를 돌아보며 물었다.
“뭘 말인가?”
“신족의 개가 된 지금 상황을 말하는 거요.”
“세 장로의 부하가 되는 걸 선택한 건 내가 아니라 자네들이네. 그리고 자네들이 날 배신하지 않았다면 지금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네.”
“권력의 맛에 취해 이성을 잃은 사람은 당신이었소.”
“자네들은 나보다 더 오랜 세월을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 텐가?”
“우린 공정하게 다스렸소. 권력에 취하지도 않았고.”
“공정하다는 건 누구 기준인가? 자네들 기준 아닌가? 나도 자네들에게 밀려나기 전까지는 공정하게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했네. 불만을 가진 백성들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단 말이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무튼 우린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책벌레 놈들의 꼭두각시 노릇만 하고 있구먼. 뭐…… 타고난 팔자가 그러면 따라야지 별수 있는가.”
아르카는 피식 웃으며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그는 그의 전함에 올랐다.
“우리도 가세.”
하발이 먼저 자리를 뜨자 아락은 자신의 전함으로 몸을 날렸다.
슈우욱! 슈우욱! 슈우욱!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응?”
아락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퍽! 퍽! 퍽퍽!
콰앙! 콰앙! 콰앙! 콰앙!
화살로 보이는 것이 여러 척의 전함으로 떨어지더니 폭발했다.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아락은 시선을 들었다.
삼백여 장 밖에 전함 다섯 척이 서 있었다.
화탄이 장착된 화살을 쏜 배였다. 아락은 곧바로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그의 전함으로 날아갔다. 그의 전함도 공격을 받은 전함 중 한 척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천사군단 군단장 쿤카르가 아락을 맞았다.
“피해는?”
아락은 쿤카르를 보며 물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습니다.”
둥! 둥둥둥! 둥둥! 둥둥둥둥! 둥둥! 둥둥둥둥!
바로 북소리가 들려왔다.
쿤카르는 얼른 선장실로 몸을 날려 갔다. 잠시 후 바로 돌아왔다.
“쫓으라는 명령입니다.”
“사실이냐?”
아락은 얼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