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514)
그 이유
천야교를 정리하고 금장생이 향한 곳은 하오밀문 산동 분타였다.
“믿지 않았는데…….”
금장생을 본 양낙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흑화단이 빠졌다고 해도 천야교 전력은 최강이었다. 그래서 금장생에게 정보를 넘기면서도 성공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예상을 뒤엎고 천야교를 멸망시켜 버린 것이다.
“이걸 전해 주시오.”
금장생은 위쪽에 붉은색이 칠해진 죽통 아홉 개를 내밀었다. 하오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천급 정보가 담긴 첩지를 넣은 죽통이었다.
“어디로 전할까요?”
“장소는 죽통에 적어 두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급으로 보내겠습니다. 혹시 중간에 분실될 수도 있으니까 한 장씩 더 적어 주십시오.”
“알았어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편으로 자리를 옮겨 글을 썼다.
팔왕입니다.
다음 달 말까지 안휘성 해림으로 와 주세요.
그날 우리의 마지막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활을 꼭 준비하세요.
이름을 빼면 세 줄에 불과한 간단한 글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간단하지 않았다. 금장생은 해림과의 전쟁으로 무림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
모두 아홉 장을 작성해서 입구가 붉게 칠해진 천급 죽통에 집어넣었다. 그 죽통을 한편에 대기하고 있던 양낙에게 건넸다.
양낙은 죽통을 들고 나갔다.
잠시 안으로 들어왔다.
“차 드시겠습니까?”
양낙이 물었다.
“한 잔 주세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양낙은 얼른 밖으로 나갔다. 곧 차 두 잔과 주전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차를 금장생 앞으로 놓았다. 주전자를 자기 옆으로 놓고 건너편으로 앉았다. 금장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예상외로 차가 훌륭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주 좋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을 황홀하게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차였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양낙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하오밀문 문도잖습니까.”
양낙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지부장님이 해 줄 일은 소문을 내는 겁니다.”
“소문요?”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툭!
어두컴컴한 공간에 액체가 떨어졌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거리는 삼 장이었다.
툭! 툭! 툭!
더 많은 액체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툭! 툭! 툭! 툭! 툭! 툭! 툭! 툭!
액체가 떨어지는 공간은 엄청나게 넓었다. 족히 백 장은 돼 보였다. 바닥으로 떨어진 액체는 먼저 떨어진 액체와 섞여 하나가 됐다. 그리고 수로로 보이는 길을 따라 흘러갔다.
수로는 길이 삼 장 일곱 치, 폭 두 자, 높이 두 자 정도 되는 기다란 용기와 이어져 있었다. 마치 관처럼 보이는 용기는 뚜껑으로 덮여 있고 액체는 용기 한편에 나 있는 작은 구멍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런데 용기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광활한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모든 용기에는 수로가 이어져 있었다. 수로를 타고 흘러온 액체는 용기 안으로 들어갔다.
번쩍!
어디선가 빛이 나타나 지하 공동을 환하게 밝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액체를 확인할 정도는 됐다. 거미줄처럼 엉킨 수로를 따라 움직이는 액체는 바로 피였다.
조금 전 나타났던 빛이 용기 앞으로 다가왔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사내의 손에는 고대에 사용됐지만 지금은 사라진 마법등이 들려 있었다.
사내가 등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바로 엘이었다.
엘은 마법등을 옆에 놓고 용기 앞으로 갔다.
맨 위쪽 용기의 뚜껑을 잡고는 옆으로 밀었다.
그르릉!
나직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피가 흘러가는 수로는 뚜껑 아래쪽으로 나 있어, 뚜껑이 열려도 위치가 바뀌거나 하지 않았다.
안에는 검은색 갑옷을 입은 시체가 들어 있었다. 시체의 피부는 갑옷처럼 검고, 손을 대면 바로 부서지는 목내이처럼 바싹 마른 상태였다. 부릅뜬 눈은 움푹 들어가고, 광대뼈는 한껏 튀어나왔으며, 입은 쩍 벌린 상태였다.
하지만 떨어져 나간 신체는 없었다.
수로를 통해 흘러내린 피는 정확하게 시체의 얼굴로 떨어졌다. 그런데 떨어진 피는 옆으로 흘러내리지 않았다. 피부를 따라 흘러내려야 정상인데, 검은 피부는 솜처럼 피를 흡수했다. 피는 계속해서 검은 피부 시체의 얼굴로 떨어져 내렸다.
“너희들은 내가 다시 살아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엘은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눈앞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영지라고 불리는 이곳은 ‘죽은 자들의 군단’을 묻었던 장소다.
‘죽은 자들의 군단’을 만들었던 그들은 군단장과 부군단장 두 명을 제거하고 ‘죽은 자들의 군단’을 묻고 마법진을 구축해서 영원히 폐쇄했다.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 군단장과 부군단장 두 명이 바로 상천인, 마천인, 중천인으로 불렸던 자신들이다.
“상천인, 마천인, 중천인의 전설을 만들어 낸 사람이 나라는 건 몰랐을 거다.”
엘은 히죽 웃었다.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이상 언젠가는 깨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수천 년의 세월은 의미가 없다.
다시 깨어났다는 게 중요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죽은 자들의 군단’ 일만 명. 일천 기의 철갑거인.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 없다.
게다가 운까지 따라 주고 있다.
‘죽은 자들의 군단’을 깨우는 매개체는 인간의 피였다. 일만 명을 깨우기 위해서는 최소한 오백 명 이상의 피가 필요했다. 이곳에 도착해서 인간을 잡아 와 피를 모으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지상에서 전쟁이 일어나 천여 명 이상의 피가 지하로 스며든 것이다. 그 피는 하나도 남김없이 아래로 떨어져 죽은 자들의 군단의 몸으로 흡수된다.
둥!
갑자기 어디선가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은 마법등으로 손을 뻗었다.
휙!
마법등이 손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마법등을 들고 곧바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그는 광장 구석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거무튀튀한 것들로 채워진 투명한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이 기둥은 ‘죽은 자들의 군단’의 심장을 모아 둔 영혼의 그릇이다. 기둥 위쪽에도 수로가 연결돼 있었다. 그 수로를 통해 계속해서 피가 떨어져 내렸다.
둥!
또다시 조금 전 들었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투명한 기둥에서 저녁노을 같은 광채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이놈만 통제할 수 있다면 완벽한데…….”
엘은 입맛을 다셨다.
‘영혼의 그릇’은 죽은 자들의 군단이 가진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 약점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 영혼의 그릇을 자신의 몸속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상급 신족이라고 해도 일만 개의 영혼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받아들이는 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미쳐 버리게 될 테고 ‘죽은 자들의 군단’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둥둥!
또다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은 시선을 모았다. 이번에는 약간의 움직임도 목격됐다. 더불어 기둥에 틈이 생겼는지 피가 아래로 흘러내려 가는 것도 보인다.
둥둥둥둥!
이번에는 네 번이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인데 벌써 힘을 뿜어내고 있다.
“쿡!”
엘은 피식 웃고는 자리를 떴다.
‘죽은 자들의 군단’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걸음을 옮기던 그가 한곳에 멈췄다.
거기에는 관 열 개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모두 빈 관이었다. 이곳으로 와서 가장 놀란 점이 있다면 바로 저 텅 빈 관이다. 관의 머리맡에는 일번부터 십번까지 적혀 있다. 이곳에 있는 일만 명 중 가장 강한 열 명이란 뜻이다.
관이 텅 비었다는 건 누군가 시체를 들고 나갔다는 뜻이 된다. 왜 시체를 가지고 나갔는지 알 수 없지만 공연히 찜찜했다.
“그래 봐야…….”
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영혼의 그릇’을 가져가지 못하면 시체에 불과할 뿐이다. 잠시 후 그는 조금 전 뚜껑을 열었던 관 앞에 도착했다.
관 속 시체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죽만 앙상하게 남아 있던 피부가 약간 부풀어 올라 있고 쩍 벌어진 입도 조금씩 제 모양을 찾아 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 ‘영혼의 그릇’ 앞으로 갔다. 그는 ‘영혼의 그릇’ 위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왼손 집게손가락 손톱을 오른손 손목의 동맥 부분에 댔다.
내공을 끌어 올려 천천히 아래로 그었다.
손목이 쩍 갈라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그의 동맥에서 흘러나온 피는 다른 피와 함께 영혼의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기다려라. 크로헬, 카이헬, 레드헬. 그리고 루하.”
그는 다른 피와 섞여 ‘영혼의 그릇’으로 퍼져 나가는 자신의 피를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천야교를 멸망시킨 금장생과 마가, 혈가 무인들은 곧바로 항구를 향해 내달렸다.
운성을 없애고 천야교로 향할 때는, 남쪽에 해림이 있어 적을 속일 수 있었지만 이젠 누가 봐도 해림이 목표라는 걸 알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적 또한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는 걸 살필 테고, 조심한다고 해도 들킬 수밖에 없다.
결국 해림으로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완전 사라지는 거고, 그런 장소는 바다뿐이다.
새벽에 배에 올랐다.
배는 모두 스무 척이었다. 혈가 무인들이 배를 조종했다. 항구를 벗어나 큰 바다로 나갔다.
육지가 가물가물해지자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금장생과 불여하는 오다아이와 함께 승선했다. 배의 이름은 태양호였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도쿠가와 신켄이 금장생을 보며 말했다.
“다음 달 말경에 도착할 수 있도록 천천히 가세요.”
“가는 도중에 있는 섬에서 며칠 쉬었다 가는 건 어떨까요?”
“쉴 만한 섬이 있어요?”
“해적들의 근거지도 있고, 동영인들이 만든 쉼터도 몇 군데 있습니다.”
“그런 곳으로 가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요. 신야가 아는 곳으로 가요.”
“알겠습니다.”
도쿠가와 신켄은 고개를 숙였다.
금장생은 바로 선실로 들어갔다. 그의 선실은 이 층이었다. 침실, 응접실, 욕실이 분리된 고급 객잔의 객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욕실에서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부연, 당신이에요?”
“……네.”
당신이란 말에 잠시 멈칫했던 금장생은 이내 대답을 하고는 문을 닫았다. 세월 때문인지 아직은 당신이란 말이 낯설었다.
아울러 부연이란 이름도.
“마침 잘 왔어요. 등 좀 밀어 주세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금장생은 장포를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작은 욕실 안은 수증기로 들어차 있었다. 욕조는 특별한 게 아니고 나무로 만든 통이었다. 통은 두 사람이 들어가면 공간이 남지 않을 정도의 넓이였다.
“당신은 안 씻어요?”
“씻어야죠.”
“그럼 들어오세요.”
아수수는 자신이 들어가 있는 통을 가리켰다.
“둘이 들어가기엔 너무 작지 않나요?”
“부부가 목욕하기엔 충분한 공간이니까 걱정 말고 들어오세요.”
“알았어요.”
금장생은 옷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생각대로 통은 좁았다. 다리도 구부려 교차해야 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목욕을 하니까 더 좋잖아요.”
불여하는 빙긋 웃으며 금장생의 몸에 물을 끼얹어 주었다.
“비누칠해 줄게요.”
불여하는 일어나서는 한편에 놓인 비누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거품을 냈다.
“당신은…….”
“당신 먼저 해요.”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일어섰다.
“등부터 하게 돌아요.”
금장생이 돌자 불여하는 등과 엉덩이를 문질러 주었다. 그런 다음 몸을 돌려서는 다시 비누 거품을 내 앞을 문질렀다. 알몸 여자가 바로 앞에서 비누칠을 해 주자 금장생의 몸은 곧바로 반응했다.
“당신 욕구불만인가 봐요.”
불여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금장생의 하체로 향해 있었다.
“그거야 뭐…….”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랜만에 아내 역할 한번 해 볼까요?”
불여하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을 한 채 손을 아래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