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509)
초무극은 해림에서 이틀을 기다렸다. 물론 신족과 암흑오부족이 머물고 있다는 흔적은 완벽하게 지웠다. 옥부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초무극을 찾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움직임이 전혀 없는 거요?”
초무극은 옥부길을 보며 물었다.
“네. 안휘성에서 우리 해림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틀이면 모든 지역의 상황을 다 파악할 수 있고요. 더구나 그들은 적은 수도 아닙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옥부길은 말끝을 흐렸다.
“말해 보시오.”
“그게, 그들의 목표가 우리 해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해림이 아니라고요?”
해림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둔기로 뒷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 왔다. 지금까지 너무 해림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대주!”
초무극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네.”
육겁은 곧바로 달려왔다.
“지금 당장 하북성과 북경에 연락해서 대규모 병력이 지나간 흔적이 있었는지 조사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육겁은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인가?”
그가 들어오자 능천이대 대주 율강리가 물었다.
“우리가 헛발질한 모양이네.”
“헛발질?”
“어제 내가 뭐라고 했는가?”
“해림이 아니라 천야교가 있는 산동성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는 이제 깨달은 모양이네.”
육겁은 가장 빠른 부하들을 불렀다. 그리고 지시 사항을 전했다. 잠시 후 해림 하늘 위로 신족 열 명이 솟구쳤다. 날개를 활짝 편 그들은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들이 대규모 병력에 대한 소식을 접한 건 다음 날이었다. 신족이 아니라 해림에서 파악한 정보였다.
“며칠 전에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됐다고 합니다.”
옥부길은 초무극에게 말했다.
“빌어먹을!”
초무극은 벌떡 일어났다.
“지도 좀 주시오. 그리고 대주들도 불러 주고.”
“알았습니다.”
옥부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능천일대 대주 육겁, 이대 대주 율강리, 암흑오부족 중 아락, 하발, 아르카가 안으로 들어왔다.
“놈은 이곳이 아니라 여기로 갔다.”
초무극은 지도에서 천야교가 있는 산동성을 짚었다.
“천야교를 치러 간 거군요.”
육겁이 말했다.
“맞다.”
초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지금 가 봐야 늦은 거 아닙니까?”
“물론 천야교를 구하는 건 늦다. 나는 돌아가는 놈들을 칠 생각이다. 문제는 놈들이 어디로 이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초무극은 지도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손으로 줄을 그었다. 그가 가장 먼저 그은 줄은 하북성을 동서로 가르며 산서성으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두 번째 줄은 바로 안휘성으로 오는 길이었다.
“병력을 둘로 나눠서 길목을 지키자는 거요?”
아락이 물었다.
“지금으로선 그 방법뿐이다.”
“운성을 멸망시켰다면 약한 자들이 아니라는 건데 절반의 전력으로 막아 낼 수 있겠소?”
“자네들에게는 철갑거인이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닌가?”
“철갑거인은 그들에게도 있소. 그리고 철갑거인의 탑승 시간은 한 식경이오. 적이 철갑거인에 대해 모른다면 큰 이점이 되겠지만, 철갑거인의 약점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오.”
“그렇다고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운성을 비롯한 협력 문파를 하룻밤 만에 멸문시킨 자들이오. 그리고 우리가 이곳으로 온 건 해림과 힘을 합쳐 없애려고 한 거고. 그런 자들인데 병력을 둘로 나눈다는 건 문제가 있는 거 아니오.”
‘으음!’
초무극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아락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운성뿐만 아니라 협력 문파 여섯 곳은 물론이고 안휘성의 남궁세가까지 멸문시켰다. 그런 엄청난 전력을 가진 자들인데 둘로 나눈 병력으로 상대하는 건 무리다.
결국엔 놈들을 완벽하게 잡기 위해서는 한 곳을 정해야 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좋네.”
초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을 둘로 나눴다가 한편이 전멸당하는 것보다, 설사 놓치더라도 전력을 보전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바다를 이용할 겁니다.”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무극은 고개를 돌렸다. 방금 이야기를 한 사람은 옥부길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초무극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옥부길은 당황한 얼굴로 손과 고개를 동시에 저었다. 주제넘은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다를 이용할 거라고 하던데, 맞소?”
“그게…….”
옥부길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가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가 멸문하자 우리가 주목한 곳은 태양상인을 운영하고 있는 혈가였습니다. 원래 그곳에는 천여 명의 무인이 늘 상주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텅 비어 있더군요.”
“운성을 치는 데 그들이 동원됐을 거라고 보시오?”
“혈가만으로 운성을 치는 건 어렵겠지만 한 축을 담당한 것은 분명합니다.”
“좋소. 그럼 그들이 배를 이용해서 이곳으로 올 거라는 건 무슨 소리요?”
“태양상인의 주력은 동영과의 무역입니다. 그리고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구려.”
“맞습니다. 그리고 혈가의 배가 선착장에 있는지 확인해 보았는데 한 척도 없었습니다.”
사실 혈가 선착장에 배가 없는 것은 금장생이 다른 곳으로 빼돌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옥부길은 산동성에서 이곳으로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해 산동성 해안으로 가져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흠!”
초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초무극은 육겁 일행을 보았다.
“일리가 아주 없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다로 오지 않으면…….”
육겁이 말끝을 흐렸다.
지금은 예측이 아니라 확신을 바탕으로 일을 해야 한다.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 결정하기엔 사안이 너무 컸다.
“그들이 안휘성으로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옥부길이 말했다.
“말해 보시오.”
“제가 알기론 전투에서 패한 마가의 주력은 동쪽으로 도주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맞습니까?”
“맞소.”
초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가 주력이 동쪽으로 왔을 때 갈 만한 곳은 낙양의 진가장이나 즉 해가나 이곳에 있는 혈가 그리고 전에 팔왕가가 축제를 벌였던 천년곡뿐입니다. 그 세 곳 중에서 제게 선택하라고 한다면 천년곡으로 하겠습니다.”
“결국 그들도 안휘성으로 올수밖에 없다는 말이구려.”
초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옥천환이 해림의 주인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가 옥부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 림주를 제거하면 림주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림주가 되는 것과 가솔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건 다른 문제다.
그런데 옥천환은 전혀 반발이 없이 해림을 다스리고 있다. 가솔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옥부길일 것 같았다.
“제 생각일 뿐입니다.”
“좋소. 옥 대협의 말을 믿겠소.”
초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육겁을 비롯한 수뇌들을 보며 말했다.
“산동성에서 안휘성으로 올 수 있는 해로를 봉쇄하도록 해.”
“배는…….”
육겁이 초무극을 보았다.
“명나라 수군 전함을 이용해야지. 일대 대주는 바로 황실로 가서 어명을 받아 오고 이대 대주는 천야교로 사람을 보내서 상황을 파악하도록 해.”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육겁과 율강리가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는 수군 본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도록.”
“알겠습니다.”
아락과 하발, 아르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능천일대와 이대 그리고 암흑오부족 무인들은 해림을 떠났다.
* * *
산동성 태산 남쪽에 자리를 잡은 건 백 년 전이었다. 환희궁과 더불어 신비이궁이라 불렸던 천야궁이 그 전신이었다. 몸보다는 기예를 팔아 부를 축적했던 환희궁과 달리 천야궁은 세를 확장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천야궁 궁도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 무공이 흡정술이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 결국 강호인들의 미움을 산 천야궁은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궁주 여와가 문도들을 이끌고 정착한 곳이 바로 태산 남쪽 영지靈地라는 곳이었다.
그녀가 이곳을 택한 이유는 신령스러운 땅이라는 이름도 마음에 들었지만, 언제 지어졌는지 연원을 알 수 없는 석조 건물들이 곳곳에 늘어서 있어서였다.
그 석조 건물을 이용하면 총단을 세우는 데 돈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와는 그 석조 건물들을 보수하고 새로운 건물을 세워 천야궁의 이름도 천야교라고 고쳤다.
서른 채에 불과했던 건물은 지난 백 년 동안 오백 채로 늘었고 문도 수 또한 열 배 이상 늘어났다. 그리고 방가려가 교주가 되면서 춘추오패의 한 곳이 됐다.
“천야교에 피바람이 분 건 닷새 전입니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코에 커다란 점이 나 있고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은 하오밀문의 산동 지부장 양낙이었다. 양낙은 소문을 가장 빨리 듣는 귀를 가졌다고 하여, 사람들은 속이速耳라고 불렀다.
양낙 앞에는 금장생이 앉아 있었다.
금장생은 산동성에 도착하자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끝나자 하오밀문 산동 지부를 찾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부교주 천사홍이 교주가 없는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천야교를 장악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테고, 동조자가 있었겠지요?”
“나찰단, 요화단, 마녀단, 사갈단이 천사홍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게 아니고 함께 반란을 일으켰겠지요.”
금장생이 말했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렇습니다.”
“그럼 천사홍에게 굴복하지 않은 조직은 흑화단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됐죠?”
“천야교를 떠났습니다.”
“떠나요?”
“네.”
“천사홍이 그냥 뒀어요?”
“공식적으로는 천야교를 떠난 자들은 붙잡지도 않고, 어떤 해도 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조치를 취했겠죠?”
“천야교 최고수들로 구성된 살접대殺蝶隊를 출병시켰습니다.”
“산동성에는 천야교 휘하 문파가 다섯 곳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이곳에 와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천수해가天水海家, 망량귀가魍魎鬼家, 명왕장가明王長家, 귀문鬼門, 천장문天葬門, 다섯 곳이었다.
“맞습니다. 그들에게도 정예를 이끌고 천야교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방가려 교주와 손을 잡을까 봐 불러들인 건가요?”
“그런 말은 한 적은 없지만 우린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각 문파 문주들이 순순히 들어요?”
“살접대를 출병시킨 사실을 그들에게 미리 흘리고 나서 들어오란 명령을 내렸습니다.”
“천야교로 들어오지 않으면 살접대의 방문을 받게 될 거라는 협박을 먼저 한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 들어왔나요?”
“어제 천수해가를 끝으로 모두 들어온 상탭니다.”
“천야교의 병력 현황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 있습니다.”
양낙은 종이 몇 장을 금장생에게 내밀었다.
금장생은 종이를 받아 들고 살폈다. 천야교에 대한 것들이 적힌 문서였다.
“이것만 보면 되나요?”
“그것보다 더 자세한 보고서는 만들 수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어대상 문주님께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양낙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요. 일단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양낙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금장생은 양낙이 주고 간 종이를 펼쳤다. 맨 첫 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천야교 건물 배치도였다. 금장생은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중앙에 천야교의 중심인 천전天殿이 있었다. 천전은 오 층 건물이었다. 천전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건물이 호위하는 것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천전 조금 아래쪽에는 요화전妖花殿이 서 있었다. 천전보다 규모는 조금 작았지만 층수는 천전과 같은 오 층이었다. 요화전 동쪽에는 사갈전蛇蝎殿이 있고 서쪽에는 마녀전魔女殿있었다.
요화전 남쪽에는 나찰전羅刹殿이 있고 북쪽에는 흑화전黑花殿이 있었다. 각 전에는 천전과 마찬가지로 다섯 채의 건물이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대원들이 기거하는 건물이 분명한데 단순한 배치가 아니라 오행에 따라 세운 것 같았다.
그 외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특별히 기억해 둘 만한 것은 없었다.
금장생은 다음 장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