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505)
팔은 밖으로 굽는 법이 없다
적순우는 백색 광채를 뚫고 들어갔다. 백색 광채가 온몸을 밀어냈지만 이를 악물었다.
휘익!
거대한 검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적순우는 천근추 수법을 이용해서 땅으로 뚝 떨어졌다. 그러고는 계속 달렸다. 머리 위로 대검이 지나갔다. 대검이 지나가면서 만들어 낸 기파에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철갑거인 앞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발이 날아왔다.
적순우는 바닥을 찼다.
처음부터 그녀는 다리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목표는 가슴이나 혹은 목이었다.
순식간에 철갑거인 목 앞까지 솟구친 적순우는 가슴을 향해 검을 힘껏 찔러 넣었다.
카카캉!
혈루 끝에서 솟구친 검강이 철갑거인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갔다.
쐐애액!
섬뜩한 소성이 그녀 귓전으로 들려왔다.
적순우는 왼편을 보았다. 거대한 손이 그녀를 향해 쏘아져 오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자신의 검을 보았다. 검강이 파고들어 간 깊이는 반 자에 불과했다. 이 정도로는 가슴속에 들어 있는 하트라는 녀석을 없애지 못한다. 최소한 한 자는 더 파고들어 가야 한다.
‘끙!’
얼굴을 찌푸린 적순우는 검에 내공을 쏟아부었다. 그녀가 내공을 쏟아부은 건 검강 끝이 하트에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검강을 풀면서 몸을 뒤로 튕겼다. 검강만 파고든 상태라 검을 뽑는 데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바로 그때 철갑거인의 손이 바로 옆까지 와 있었다. 적순우는 왼손을 쭉 내밀었다.
퍼억!
“크윽!”
그녀의 왼손과 철갑거인의 손이 부딪치자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적순우는 중심을 잃고 왼편으로 날렸다.
파앗!
파앗!
신족 두 명이 적순우를 향해 날아갔다.
턱턱턱!
활짝 펼친 날개가 나무와 부딪칠 때마다 커다란 나무가 뎅겅뎅겅 잘려 나갔다.
“차하!”
“타하!”
사사봉과 마자홍이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몸을 날리자 대여섯 명의 신족도 날개를 펼쳐 날아갔다.
그 순간 적순우의 검이 붉은 꽃을 만들어 냈다.
그녀의 독문 검법인 혈루적화검법血淚赤花劍法이었다. 철갑거인의 손과 부딪친 반발력으로 몸을 날리는 상태였던 터라 전 내공을 이용해서 검법을 펼칠 여력이 있었다.
그녀의 검 끝에서 솟은 붉은 꽃은 살짝만 건들어도 붉은 즙을 뿜어낼 것처럼 붉었다. 그것들은 모두 열 송이었다. 십적화十赤花는 혈루적화검법의 최강 초식이었다. 붉은 꽃 열 송이는 신족을 향해 날아갔다. 꽃이 날아오자 두 신족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 날개로 온몸을 감쌌다.
“차하!”
그 순간 적순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텅! 텅텅텅! 텅텅텅!
꽃송이들이 날개를 쳤다. 하지만 파고든 날개의 수는 다섯 장에 불과했다. 나머지 세 장은 뚫지 못하고 스러지고 말았다.
“이 정도로는…….”
퍽!
살기를 토해 내는 신족의 두 이마로 붉은색 지풍이 파고들었다.
“커억!”
“크윽!”
두 신족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들은 경악한 얼굴로 적순우를 보았다.
“우리도 너희들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
적순우는 차갑게 말하며 신족 앞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두 신족의 날개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이윽고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스악!
목이 완전하게 드러나는 순간 혈루가 허공을 갈랐다. 신족의 머리 두 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위를 조심해!”
바로 그때 사사봉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적순우는 급하게 머리가 떨어진 신족의 몸통을 찼다.
그녀의 신형이 뒤편으로 날아갔다.
퍼억!
조금 전 그녀가 있던 공간으로 대검이 떨어졌다.
“웃!”
적순우는 급하게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철갑거인의 검이 허공을 갈랐을 뿐인데 강력한 검풍이 그녀에게로 쏟아진 것이었다.
“헉!”
그녀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진득한 살기가 뒤편에서 감지됐다.
‘은신술!’
그녀는 내심 소리쳤다. 신족이 지닌 가장 큰 능력 중의 하나가 은신술인데 그걸 잊고 있었다.
‘왼편이다.’
살기의 위치를 감지하고는 곧바로 오른편으로 몸을 튕겼다.
푸욱!
하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신족의 검이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원래는 심장을 노렸던 건데 적순우가 솟구치면서 이동하는 덕분에 죽음을 면한 것이다.
“차하!”
적순우는 기합과 함께 혈루를 뒤로 휘둘렀다.
스악!
그녀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신족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퍼져 나갔다.
푸욱!
또 한 자루의 검이 그녀의 배를 뚫고 들어갔다.
“커억!”
적순우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혈루를 전방으로 휘둘렀다. 그녀의 배에 검을 찔러 넣었던 신족의 머리가 떠올랐다.
쐐액!
그녀 바로 앞에서 대기를 가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엔 창이냐?’
적순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혈루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푸욱!
먼저 창두가 그녀의 가슴을 뚫었다. 창두는 한순간에 등을 뚫고 나왔다.
턱!
적순우는 자신의 가슴을 뚫고 들어간 창간을 잡았다. 혈루를 든 오른손은 여전히 전방으로 내뻗은 채였다. 적순우가 더 이상 대항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신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놈!”
적순우는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창간을 쥐고 있던 왼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녀의 신형이 앞으로 쑥 나아갔다.
“헉! 커억!”
신족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는 자신의 목을 뚫고 들어간 검과 적순우의 몸통을 꿰고 있는 창을 보았다. 그의 얼굴엔 말도 안 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바로 너희들과의 전쟁에서 인간이 이긴 이유다. 놈!”
적순우는 오른손을 좌우로 움직였다. 곧 신족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신족의 머리를 잘라 낸 그녀는 검을 휘둘러 창을 잘랐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털썩!
다리를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순우!”
사사봉이 질겁한 얼굴로 다가왔다.
“우린 할 만큼 했지?”
적순우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한 정도가 아니라 넘쳐. 마가는 전보다 더욱더 강해질 거야.”
“맞아, 그렇게 될 거야. 게다가 그 녀석이 수수와 살아 주면 금상첨환데.”
“누구? 가짜 마왕.”
놀라운 말이었다. 두 사람은 금장생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응.”
적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수로 안 되면 염아까지 붙여 주지 뭐.”
염아는 사사봉이 사미염을 부르는 애칭이었다.
“시집도 안 간 처녀를 유부남에게 준다고?”
“미염이도 그 녀석을 싫어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그리고 총각에게 시집가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그 녀석 복이 터졌네.”
“그런데 어떤 녀석이야?”
“황금전가 셋째 아들.”
“가문은 나쁘지 않네, 뭐.”
“가문만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무너진 황금전가를 일으켜 세우기까지 한 능력 있는 녀석이야.”
“그 녀석이 마왕이 되면 황금전가와 대륙상단이 하나가 되는 건가?”
“그렇지.”
“염아를 무조건 녀석의 방으로 밀어 넣어야겠네.”
“그걸 봐야 하는데…….”
적순우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낮아졌다.
“넌 볼 수 있어. 그러니까…… 숙여!”
적순우는 버럭 소리치며 검을 쭉 찔렀다.
사사봉은 급하게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검 두 자루가 얽혔다. 한 자루는 천상기사단 대원의 검이고 다른 한 자루는 적순우의 검이었다. 힘차게 뻗어 내긴 했지만 적순우의 검은 신족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녀의 검 끝에서 신족까지 거리는 두 자였다. 반면에 신족의 검은 사사봉 머리 바로 위쪽에 있었다. 아래로 내리긋기만 하면 사사봉의 몸통이 두 쪽으로 나뉠 판이었다.
“차하!”
신족은 기합과 함께 검을 내리그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적순우의 검 끝에서 검강이 발출됐다.
검강은 그대로 신족의 목을 뚫었다.
“커억!”
신족은 경악한 얼굴로 적순우를 보았다. 적순우는 등에는 검이, 가슴에는 창이 꽂힌 상태다. 숨이 끊어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데 검강을 발출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인간은 모두 나처럼 해. 너희 신족과 다르다고.”
적순우는 손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툭!
그러자 신족의 머리가 뚝 떨어졌다.
“커억!”
적순우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순우야.”
사사봉은 안타까운 얼굴로 적순우를 보았다.
“여섯 놈을 잡았으면 할 만큼 한 거지?”
적순우는 활짝 웃었다.
“아냐. 하고도 남았어.”
“손자만 보면 완벽한 삶인데……. 수수나 미염이 중 아무나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마가를 물려줘. 알았지?”
“순우야.”
적순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사사봉은 적순우의 손을 꼭 잡고 소리 없이 오열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야.”
그리고 두 손에 내공을 주입했다. 전 내공을 끌어 올리자 가공할 열기가 적순우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푸스스!
적순의 몸이 머리부터 시작해서 가루로 변해 갔다. 사사봉은 가루로 변해 흩어지는 적순우의 모습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녀가 적순우를 가루로 만든 것은 장례를 지내 줄 상황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적순우의 몸이 모두 가루로 변하자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손이 아프도록 검을 그러쥐었다.
“죽인다아!”
그녀는 짐승처럼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오 장여를 날아가던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구백오십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백팔살인류百八殺人流를 바탕으로 펼치는 극한의 은신술이었다.
백팔살인류는 금장생이 얻어서 사미염에게 주었던 살인마후 사예린의 무공이다. 사사봉이 백팔살인류를 익힌 건 순전히 흥미 때문이었다.
살인마후殺人魔后 사예린은 사씨 가문에서 배출한 최강 무인으로, 그녀가 살았을 당시에는 마가 가주마저도 넘어섰다고 하였다. 그런 무공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팔살인류를 완성한 건 한 달 전이었다.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익혀서 그런지 몰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백팔살인무를 완성하고 나서도 실전에서 사용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전력을 다해 백팔살인류를 펼치고 있다.
“그래서…….”
강한 힘을 얻는 건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사사봉은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턱!
검날에 뭔가가 걸려들었다.
내심 기합을 내뱉으며 힘껏 잡아당겼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신족의 머리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곧 머리가 사라진 몸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술로 몸을 숨기고 있던 신족이었다.
사사봉이 신족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차린 건 백팔살인류 덕분이었다. 백팔살인류를 끌어 올리자 모든 감각이 극한으로 개방됐고 반경 삼 장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은신술로 숨어 있는 신족 또한 다르지 않았다.
오른편으로 이동한 사사봉은 허공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커억!”
비명과 함께 신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사봉의 검이 파고든 곳은 신족의 심장이었다. 사사봉은 손목을 틀면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신족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스악!
신족의 머리가 떨어지는 순간 자리를 이동했다.
슉슉슉!
조금 뒤에 그녀가 있던 자리로 서너 자루의 무기가 파고들었다. 하지만 검이 뚫은 건 빈 허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