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502화 (502/524)

황금가 (502)

대승이었다.

처음부터 패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첫 번째 승리가 가져다준 기쁨은 컸다.

‘그때로 돌아간 것 같군.’

좌무백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 당시에는 마가 가주가 아니라 마노왕이라 불렸다. 마노왕이란 칭호는 자신들이 내려 주었다. 노예들의 왕이란 뜻이다.

그들은 힘이 강해지자 반기를 들었고 기나긴 전쟁이 시작됐다. 그 누구도 노예가 자신들의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아울러 일시적인 현상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정신을 차리면 본래 상태로 돌아갈 거라고 믿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건 노예왕이 아니라 노예들이었다. 노예들은 노예왕에게 전쟁을 하자고 부추겼고 노예왕은 따랐을 뿐이다.

노예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이 전쟁터로 달려왔고, 자식이 죽으면 자식의 자식이 전쟁터로 왔다. 그리고 온몸으로 죽음을 맞았다. 처음엔 노예들이 밀렸다. 그러다가 대등해졌고 언제부터인가는, 노예들이 더 많이 승리했다.

방문자들에게 패배는 일상이 됐다.

열 번을 싸우면 일곱 번은 패하고 두 번은 무승부를 이뤘으며 한 번은 이겼다.

자신 또한 열에 한 번 정도는 승리를 했다.

그때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그런데 지금 기분이 그랬다.

마가와의 싸움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다. 방문자와 노예들과의 싸움이었다. 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흐읍!”

좌무백은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셔 온몸을 잠식하고 있는 열기를 식혔다.

“심황!”

그때 앞쪽에서 일행을 이끌던 카단이 다가왔다.

“말하라.”

“두 시진이 더 지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더 이상 척신천사마공을 펼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놈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저 아래 숲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흠!”

좌무백은 카단이 가리킨 숲을 보았다. 울창한 산림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식경은 쉬어야 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아래로 내려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좌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카단은 능천대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능천대 대원들은 일제히 지상으로 하강했다. 가장 먼저 내려간 카단은 짐을 가지고 다니는 대원들에게 천막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좌무백이 쉴 공간이었다.

천막 설치가 끝날 무렵 좌무백이 내려왔다. 좌무백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돌을 깎아 만든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신족 한 명이 뜨거운 차가 든 찻잔을 앞에 놓았다.

좌무백이 차를 마시고 있는데 고독혼이 안으로 들어왔다.

좌무백은 고독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성공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확실한 거냐?”

“네.”

“하면, 지금 천야교는 누가 장악한 상태냐?”

“부교줍니다.”

“천야교 부교주면 천사홍이구나.”

“아시는군요.”

“알다마다.”

좌무백은 빙그레 웃었다. 너무 오래돼 잊고 있었다. 다섯 문파의 수장들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 인간에게 배신을 당한 경험 때문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전장치를 했다.

그 안전장치가 바로 감시할 사람이었고 그들 모두는 요직을 차지했다. 천야교의 부교주 천사홍도 그때 집어넣은 사람 중 한 명이다.

“천사홍을 따르는 자들은 얼마나 된다고 하더냐?”

“흑화단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따르기로 했다고 합니다.”

“흑화단는 어떻게 됐느냐?”

“오백 명 중 삼백 명이 죽고 이백 명은 탈출했다고 합니다.”

“그럼 교주를 찾아오겠구나.”

“그들은 자신들의 교주가 주공의 노…… 아니 부하라는 사실을 모르니까요.”

고독혼은 노예라고 하려다가 얼른 부하라고 바꿨다. 방가려를 노예라고 하면 방가려와 같은 입장인 자신도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이었다.

“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장담할 수 없다.”

“장담할 수 없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금제를 푼 것 같다.”

“‘같다’라는 말은…….”

고독혼은 고개를 갸웃했다. 금제를 풀었다는 건지 아직 그대로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나도 정확하게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있다.”

좌무백은 차갑게 웃었다.

“오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느냐?”

“전령이 이곳과 그들이 있는 곳을 오가며 명령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마음만 먹으면 바로 알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오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고독혼은 밖으로 나갔다.

방가려가 좌무백의 연락을 받은 건 일각 후였다.

전령의 말을 듣는 순간 방가려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오라고?”

다른 때 같으면 군말 없이 나섰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까닭 모를 불길함이 바로 밖으로 나가는 걸 막았다.

“네.”

“다른 사람은?”

그래서 전령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다시 물었다.

“나는 교주를 불러오란 명령만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불렀는지 안 불렀는지 모른다는 말?”

“그렇습니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전령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교주님!”

초전전이 방가려를 불렀다.

“이상하지 않아?”

방가려는 초전전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작전 때문이라면 척사랑과 옥천환을 다 불러야 하잖아.”

“다른 분들도 불렀을 수도 있잖습니까?”

“보통 작전회의를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를 때는 전령 한 명에게 명령을 내리게 돼.”

“한 명이 세 곳을 돈다는 말이군요.”

“맞아.”

“옥 림주와 척 각주가 멀리 있어서, 한 명이 명령을 전달하기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

“물론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세 명을 함께 불러 명령을 내리게 돼. 즉 세 명에게 명령을 내렸다면 옥 림주나 천 각주 상황을 모를 리가 없다는 거야.”

“좋아요. 그건 그렇다고 하고요. 각주님만 따로 부른 이유가 뭘까요?”

“이유는 나도 몰라.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를 좋아해서 부르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거야.”

“그럼 혹시…….”

초전전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초 장로도 나와 같은 생각인가 보지?”

“그게 아니면 부를 이유가 없잖아요.”

“아무리 내가 금제를 풀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아직은 내가 필요해. 그리고 난 그자가 날 시험했을 때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처럼 연기를 했어.”

“그래서 그자에게 가시겠다는 건가요?”

“정말로 작전 때문에 부르는 걸 수도 있잖아. 대신…….”

방가려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떠날 준비를 해.”

“알았어요.”

초전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

방가려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있던 곳에서 좌무백 천막까지는 한 식경 거리였다. 천막 근처에 도착하자 주위를 살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불렀다면 주변에 신족들이 은신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천막 주변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었다. 천막 주변에 있는 자들은 좌무백의 호위이기 때문에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녀는 천막 앞으로 다가갔다.

“들어가시오.”

방가려를 알아본 경비가 자리를 터 주었다.

방가려는 안으로 들어갔다.

스윽! 스윽!

그녀가 안으로 들어간 순간 신족 수백 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천막 주변이 아니라 이십 장 높이 하늘에서 은신술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요소요소에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은신술을 펼쳐 몸을 숨긴 채였다. 안으로 들어간 방가려는 그런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먼저 분위기를 살폈다.

안에는 좌무백과 고독혼, 카단이 있었다.

좌무백은 의자에 앉은 채고 고독혼은 왼편에, 카단은 오른편에 서 있었다.

“부르셨어요?”

방가려는 먼저 인사를 했다.

“내 눈을 보아라.”

좌무백은 대뜸 말했다.

방가려는 시선을 들었다. 좌무백의 눈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이건?’

방가려는 잠시 당황했다. 일언반구 말도 없이 곧바로 대법을 펼친 것이다. 대법과는 상관없는 내공을 보유하게 됐지만 걸린 척해야만 한다.

“주인님!”

방가려는 좌무백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내가 네 주인 맞느냐?”

좌무백은 물었다.

“…….”

방가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지가 제압당한 자가 어떤 상황에 대해 판단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서 ‘네’라고 대답하면 인지를 한다는 뜻이고 그건 곧 제압되지 않았다는 걸 말한다.

‘큰일 날 뻔했네.’

방가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네 주인으로 명령을 내리겠다.”

좌무백은 방가려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역시 방가려는 대답이 없었다.

“지금 당장 자결하라!”

‘헐!’

고독혼은 내심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좌무백이 방가려가 아직 금제 상태인지 아니면 금제를 푼 상태인지 어떻게 알아낼지 궁금했다. 그 역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지만 ‘이거다.’ 하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좌무백은 자결을 지시함으로 해서 간단하게 해결해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할 테냐?’

고독혼은 방가려를 보았다.

방가려의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자살을 명한다, 방가려.”

좌무백은 더욱 크게 소리쳤다.

휙!

방가려는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오른손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그러쥔 채였다.

‘과연!’

고독혼은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그때 머리 위로 올라갔던 주먹이 아래로 향했다. 새하얀 주먹이 향하는 곳은 방가려의 정수리였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는 방가려를 보며 좌무백은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그…….”

멈추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방가려의 손가락이 펴졌다.

슈욱!

세 줄기 지풍이 좌무백을 향해 쏘아졌다.

“헉!”

좌무백은 질겁했다.

그는 급하게 양손으로 쳐 냈다. 그 순간 방가려의 양팔이 좌우 허공을 후려쳤다.

쇄액! 쇄액!

둔탁한 소성과 함께 새하얀 장력이 고독혼과 카단을 향해 날아갔다.

“죽일…….”

“차하!”

“타하!”

좌무백과 고독혼 그리고 카단이 거의 동시에 장력을 발출했다.

펑! 펑! 펑!

“윽!”

“웃!”

“억!”

요란한 소성과 함께 신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파앗!

좌무백 일행이 부딪친 반발력을 이용해 방가려가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찌익!

곧 뒤편 천막이 찢겨 나갔다. 방가려는 순식간에 오 장여를 날아갔다.

“잡아라!”

“죽여라!”

그녀가 천막에서 뛰쳐나오는 순간 사방에서 신족들이 몸을 날렸다.

“흥!”

방가려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공중제비를 돌면서 더욱 높이 올라갔다. 그녀의 양손에서 새하얀 광채가 폭사됐다.

퍽! 퍽퍽퍽! 퍽퍽!

쩌엉! 쩌엉! 쩌엉!

광채에 격중 당한 자들이 순식간에 얼음덩어리로 변했다.

“차하!”

방가려는 허공답보 신법으로 허공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포위망을 뚫고 멀어졌다.

휙! 휙!

좌무백과 고독혼이 동시에 밖으로 뛰쳐나오고 카단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갔다.

“도망치지 못한다!”

좌무백과 고독혼은 멀어지는 방가려를 향해 검을 내던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