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94)
“뇌雷! 강强! 패覇!”
무혼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아스의 그랜드 크로스가 허공을 일자로 가르고 시퍼런 기운이 천파를 향해 쏘아져 갔다.
크어엉!
천패는 괴성과 함께 자신의 도를 휘둘렀다. 거대한 반월 모양의 강기가 가공할 속도로 쏘아졌다.
두 힘은 중간에서 부딪쳤다.
콰앙! 콰앙! 콰앙!
둔탁한 소성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그리고 두 물체가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지상으로 처박히는 건 천파고 하늘로 솟구치는 건 아스였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쪽은 아스였다.
아스는 몸을 돌려 아래로 떨어지면서 공격을 했고 천파는 올라오면서 공격을 했다. 그리고 무공이 부딪치면서 생겨난 반발력은 둘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보냈다.
그런 둘을 싸움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적사월 일행이었다.
“진원지기라는 거, 끔찍하구먼.”
금웅은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아는 무혼은 금장생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하다. 그런 강자가 철갑거인까지 타고 있는 상태다. 비록 키가 작다고는 하지만 무혼이 탄 철갑거인은 오 장에 달하는 자신들의 철갑거인보다 더 강하다. 즉 최강의 무인과 최강의 철갑거인의 조합인 것이다. 그런 저들을 상대로 천파는 견뎌 내고 있다. 아니 대등하게 싸운다.
진원지기를 끌어 올린 결과라고 하지만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패하네.”
적사월이 말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패하겠지.”
“시간 때문이 아니라 장소 선택이 잘못됐네.”
“장소 선택?”
금웅은 적사월을 보았다.
“그렇네.”
“어떻게 잘못했다는 건가?”
“저 둘을 자세히 보게. 서로를 향해 달려들어 무공을 펼쳤다가 튕겨지고 다시 달려들고 있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같은 상황 같지만 큰 차이가 있다네.”
“어떤 차이가 있다는 건가?”
“바로 내공 소모의 차이네.”
“내공 소모?”
금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 형은 공격을 하기 위해 장소를 옮길 때 내공을 전혀 쓰지 않지만 천파는 내공을 사용해서 솟구쳐야 하지 않는가?”
“아!”
금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진원지기를 끌어 올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천파는 자신이 처한 사실을 절대 알지 못한다는 거네.”
“무 형이 저 상황을 유도한 거구먼.”
“그렇네.”
적사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하여 무혼은 공격도 먼저 해야 한다. 천파가 선공을 취하게 되면 상황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지금 상황을 계속 끌고 가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머잖아 끝나겠군.”
금웅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일행은 말없이 싸움을 지켜보았다. 무혼과 천파는 계속해서 같은 방법으로 싸웠다.
둘의 싸움이 끝난 건 한 식경이 자나서였다.
크아앙!
괴성을 내지르며 솟구치던 천파가 오 장 위치에서 힘을 잃고 아래로 뚝 떨어진 것이었다. 길었던 싸움이 이제야 끝이 난 것이었다.
진원지기가 모두 사라지자 천파는 정신을 차렸다.
“이건 꿈이야.”
그는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꿈이 아냐.”
나직한 목소리가 근처에 들렸다.
천파는 고개를 돌렸다.
철갑거인 중 가장 작은, 여성체 철갑 거인 옆에 무혼이 서 있었다. 무혼의 가슴팍 또한 피로 젖은 채였다.
“맞아. 꿈이 아니지.”
피로 물든 무혼의 가슴팍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풋!”
이어 천파는 낮게 웃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자신은 아래쪽에서 위로 솟구치며 공격을 했고 무혼은 위에서 아래로 공격을 했다. 아래쪽에서 공격하는 자의 내공 소모가 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맑은 정신이었다면 불리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을 텐데 이성을 잃은 상태라 알아차리지 못하고 같은 공격을 계속했을 것이다.
“죽어 가는 마당에 위안이 되진 않겠지만 무공에 대해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돼.”
“쿡!”
천파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내게 묻고 싶은 거 없느냐?”
좌무백 일행에 대해 묻는다면 모두 가르쳐 줄 참이었다.
“내가 궁금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우리 춘추오패의 수장 다섯 명은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있다. 그리고 무림십패는 모두 세 사람에 의해 길러졌다. 그자들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느냐?”
“초인삼황을 말하는 거라면 이미 알고 있어.”
“……쿡쿡쿡!”
천파는 실없이 웃었다.
가르쳐 줄 것도 없는 자들인데 공연히 인심을 쓰려고 했다.
“자고 싶군.”
천파는 눈을 감았다. 급격하게 졸음이 밀려왔다.
“좋은 꿈 꿔.”
무혼은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천파는 무혼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 탓이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잠 속으로.
척! 척척! 척척!
적사월 일행이 무혼 옆으로 날아내렸다.
“괜찮소?”
적사월이 물었다.
“이 정도야 뭐.”
무혼은 어깨를 으쓱했다.
“약이라도 있으면 줄 텐데 불행히도 우리에겐 내상약이 없구려.”
“내상약은 내게 있소.”
금장생은 아공간을 열어 푸른 약병을 하나 꺼냈다. 샤이칸드리아 대륙을 떠나올 때 챙겨 온 비상약으로 포션이다. 마나 폭주나 혹은 역행으로 인해 부상을 입었을 때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포션을 한 병 마시고 아스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적사월 일행을 보며 말했다.
“먼저 운기행공을 해서 몸을 추스릅시다.”
그는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혼이 운기행공을 시작하자 적사월 일행도 절반으로 나눠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철갑거인에 탑승하고 난 후로 내기가 거의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라 운기행공으로 몸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운기행공에 들어간 사람은 적사월, 금웅, 혁군왕이었다.
“우린 차나 한잔하세.”
염라가 일행을 보며 말했다.
“차가 있습니까?”
신무가 물었다.
“데스퍼에 좀 넣어 두었네.”
“땔감은 내가 준비하겠습니다.”
고태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갑시다.”
신무가 고태백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나무를 주우러 간 사이, 염라는 데스퍼를 소환해 마법 공간에서 차와 찻주전자, 찻잔을 꺼냈다.
“화덕은 내가 만들지요.”
묵천야가 주변에서 돌을 주워 와 둥글게 쌓았다.
차 끓일 준비가 끝날 즈음 고태백과 신무가 나무를 가지고 왔다. 돌무더기 안쪽에 나무를 넣고 삼매진화로 불을 피웠다. 잠시 후 불길이 오르자 주전자에 물을 붓고 올렸다.
“부공삼매네.”
염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일행은 고개를 돌렸다. 무혼과 적사월, 금웅, 혁군왕, 네 사람이 허공에 둥실 떠올라 있었다. 그 상태에서 운기행공은 이어졌다.
일행은 운기행공을 지켜보며 차를 마셨다.
차를 두 잔째 마실 즈음 운기행공이 끝났다.
운기행공을 마친 일행은 모닥불가로 다가왔다.
“차 한 잔 하시겠소?”
염라가 무혼에게 물었다.
“주면.”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소.”
고태백이 차가 든 잔을 무혼에게 건넸다.
무혼은 찻잔을 받아 들고 아스를 소환했다. 모닥불 바로 옆으로 아스가 내려섰다.
“완벽한 상태였다면 엄청났겠구려.”
아스를 본 염라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의 말에 동의하듯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한쪽 가슴은 함몰되고 동체 곳곳에 쇠를 댄 자국과 검 등에 찢겨 나간 흔적이 남아 있어 흉해 보이지만, 그런 것들이 없다고 생각하면 거의 예술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엄청난 정도가 아니었소.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무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은 묻는 말에 대답밖에 못 하지만 과거엔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오천 년 전 최고의 마법사였던 아마조네스 드 샤이어가 그녀다. 그녀는 그랜드 크로스로부터 대륙을 구하기 위해 영혼 상태로 철갑거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강한 사내를 만나기 위해 오천 년을 기다렸다.
우연히 들어갔던 동굴 안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고 깨웠다.
금발, 푸른 눈동자, 황금색과 은색이 절묘하게 뒤섞인 동체. 그녀는 대륙의 모든 종족을 압도하는 여신이었다.
“보통 철갑거인이 아닌 모양이군요.”
염라는 아스라는 철갑거인에게 많은 사연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내 부인이오.”
“네?”
염라는 의아한 얼굴로 무혼을 보았다.
“원래 아스의 머릿속에 영혼이 들어 있었소.”
“자아를 가졌단 말이오?”
염라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렇소. 우리 둘은 처음 만났을 때 결혼을 했고 죽음이 아니면 해지되지 않는 영혼 계약을 맺었소.”
무혼은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네모난 금속판을 꺼냈다. 금속판은 쉽게 휘어질 정도로 얇았다. 그걸 아스 몸의 찢겨진 부분에 대고 내기를 끌어 올렸다. 내기가 금속에 가해지자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혼은 내기를 섬세하게 조절하여 바깥쪽보다 내부를 더 뜨겁게 했다. 어느 순간 금속 안쪽이 흐물흐물해졌다. 무혼은 재빨리 금속판을 붙였다.
표시는 좀 났지만 금속판은 완벽하게 붙었다. 다시 한 장을 꺼내 다른 부분에 대고 같은 작업을 했다. 그렇게 붙인 곳이 모두 스무 곳이었다.
“그분은 어떻게 됐소?”
무혼을 지켜보던 염라가 물었다.
“그녀와의 계약이 해지됐소.”
“그럼 지금은…….”
“지금 아스는 그녀가 아니라 순수한 타이탄, 아니 철갑거인이오.”
“그랬군요.”
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아니면 해지되지 않는 영혼 계약을 맺었다고 했는데 해지됐다고 했으니까, 철갑거인에 들어 있던 영혼이 소멸됐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시 찾을 거요. 그래서 반드시 살려 놓을 거요.”
“그분이 살아 있는 거요?”
“내가 이곳에 온 이유이고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오.”
“누군가 그분을 인질로 잡고 있군요.”
“그렇소.”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오?”
염라는 다시 물었다.
“아니오.”
“그럼?”
“죽은 드래곤이오.”
“죽은 드래곤이면?”
“언데드와는 다르오. 자아를 가졌고, 이성적이며 지극히 머리가 좋고, 엄청난 마법을 지녔고 영원한 생명을 사오.”
“신이군요.”
“아니오.”
무혼은 고개를 저었다.
“신이 아니면 뭐란 말이오.”
“그놈은 신보다 더 강하고 더 교활하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천 년을 기다리는 인내의 소유자이기도 하오.”
“그럼 무 형은 신보다 더 강한 자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거군요.”
“놈을 없애야 부인을 찾을 수 있으니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무 형의 사연을 듣고 싶군요.”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말해 드리리다.”
무혼은 아스를 돌려보내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공간을 열어 술을 꺼냈다. 그사이 운기행공을 끝낸 일행이 자리를 잡았다.
“염 형은 운기행공 안 하시오?”
다른 이들은 모두 운기행공을 하는데 염라만 하지 않기에 하는 말이었다.
“내기보다는 어둠의 기운에 더 많이 영향을 받는 몸이라서요.”
“어둠 속에만 있으면 저절로 치료된다는 말이군요.”
“네.”
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해 주겠소. 팔천 년 동안 세 번의 삶을 살고 있는 내 이야기를…….”
무혼은 천천히 자신의 사연을 풀어놓았다.
그가 염라 일행에게 자신의 사연에 대해 풀어놓는 것은, 수천 년을 건너뛰고 살아가야 하는 삶이 비슷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어둠 속을 쉬지 않고 달려가는 고단한 삶이 너무 힘이 들어서 그랬는지도.
아무튼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풀어놓았다.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팔천 년의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