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493화 (493/524)

황금가 (493)

뒤편에 있던 대원 이십 명이 레드선을 향해 몸을 날렸다. 죽음을 초월한 듯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레드선의 창이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한 건, 비마전 대원들이 오 장 안쪽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기다란 창이 물결처럼 비마전 무인들 사이를 헤집었다.

푹! 퍽! 푹! 퍽!

찌르고 치고, 치고 찔렀다. 레드선의 무기인 혈화창은 찌르기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창간으로 치면 몸통이 잘렸다. 혈화창은 기다란 창이기도 하면서 검이기도 했다.

“으악!”

“아악!”

“크악!”

비마전 무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저만치 나가떨어진 그들의 몸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십 명이 모두 쓰러지는 데 반 각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자 또다시 이십 명이 레드선을 향해 몸을 날렸다. 비마전 대원들도 상당수가 레드선에게 접근해 무기를 휘둘렀지만 흠집만 냈을 뿐 레드선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레드선은 창을 좌우로 휘두르며 앞으로 밀고 나왔다. 비마전 대원들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창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

장사앙이 버럭 소리쳤다.

자신들이 서 있는 계곡의 폭은 육 장. 철갑거인이 창을 좌우로 휘두르면 빠져나갈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 장사앙이 창을 잡으라고 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십 명이 레드선의 창을 잡기 위해 몸을 날렸다.

퍽! 퍼억! 퍽퍽! 퍽!

창을 잡기 위해 달려들던 대원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비마전 무인들은 달려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한 명이 창간을 잡았다. 손이 시뻘겋게 물들었지만 놓지 않았다. 그에 이어 다른 대원도 창간을 잡았다. 그리고 수십 명이 동시에 창간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윽!”

신무는 얼굴을 찌푸렸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들이 힘을 합치니 엄청난 압력이 돼 돌아왔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창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시죠.”

장사앙은 천파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어림없다.”

신무는 전 내력을 창에 집중했다.

웅!

순간 나직한 소성과 함께 창에서 새빨간 광채가 솟구쳤다.

“크악!”

“아악!”

“으아악!”

창간을 잡고 있던 자들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의 양손은 갈가리 찢겨 나가 더 이상 손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창간을 붙잡고 있던 자들을 떨쳐 낸 신무는 혈화창을 왼편으로 쓸었다. 천파가 그쪽을 통해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엎드려!”

장사앙과 천파는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퍽! 퍽퍽퍽! 퍽퍽! 퍽!

“크아악!”

“으아악!”

“아악!”

미처 엎드리지 못한 자들은 혈화창의 제물이 됐다.

콰앙!

왼편을 횡으로 쓸어 간 혈화창이 벽면으로 파고들어 갔다. 신무는 그 상태에서 뒤로 내달렸다. 도망치는 천파 일행을 쫓기 위해서였다.

차르르릉!

창두가 벽면을 파면서 이동하자 깊은 자국이 길게 생겨났다.

“창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라!”

장사앙은 뒤로 달려가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차하!”

“타하!”

“이얍!”

또다시 수십 명이 혈화창을 향해 달려들었다. 신무는 다시 혈화창에 내력을 주입했다.

“크악!”

“아악!”

비마전 대원들은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창간을 놓지 않았다. 손이 너덜너덜해지자 팔로 감싸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빌어먹을 자식들!”

신무는 곧바로 밖으로 나와서 레드선을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곧바로 도망치는 마원 무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도망치는 자들 후미를 따라잡은 그는 무자비하게 창을 휘둘렀다.

그의 창에서 창해파랑천결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수십 명이 그의 창에 죽었다.

“놈을 막아라!”

장사앙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비마전 대원 사십여 명이 신무를 향해 달려갔다. 그들이 빠지자 이제 남은 대원은 장사앙을 포함하여 열 명뿐이었다.

“빠져나왔습니다.”

장사앙은 천파를 보며 말했다.

“아직은 아니지.”

천파는 뒤를 흘끔 보았다. 적은 다시 철갑거인을 소환한 듯 조금 전 떠난 대원들이 무차별하게 죽어 나가고 있었다.

“저기만 넘어가면 됩니다.”

장사앙은 십 장 앞에 서 있는 벽을 가리켰다.

절벽이 무너지면서 생겨난 벽이었다.

“그렇구나.”

비로소 천파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천파는 내공을 더 끌어 올렸다.

그를 비롯한 열한 명은 곧 절벽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닥을 차며 솟구쳤다.

콰앙!

삼 장가량 솟구쳤을 때 반대편에서 커다란 소성이 터져 나왔다.

우르릉!

“무너진다!”

허공으로 솟구치던 대원 중 한 명이 겁에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이십 장 높이의 절벽이 그들을 향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돌이 일행을 향해 떨어졌다.

“차하! 타하!”

천파는 떨어지는 돌을 차며 계속해서 솟구쳤다.

“크아악!”

“아악!”

“으아악!”

허공으로 솟구친 자는 천파뿐이었다. 나머지 일행은 떨어지는 바위에 맞거나, 껴안고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추락한 그들 위로 수십 개의 바위가 떨어졌다.

척!

그 와중에 천파는 기어코 벽을 넘어 반대편으로 내려섰다.

“넌…….”

천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벽 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여성체 철갑거인이었다. 무혼은 밖으로 나와 아스를 돌려보냈다.

천파는 좌우를 보았다.

한 명 정도는, 아니 장사앙은 따라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한 명도 넘어오지 않았다.

“내가 수천 년 세월 동안 배운 게 있다면 절대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모든 실패는 과신으로부터 시작되거든.”

“내가 날 과신했다는 거냐?”

“과신하지 않았다면 우릴 쫓아오지 않았겠지. 안 그래?”

천파는 할 말이 없었다.

무혼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없애라는 명령을 받지도 않았는데 인마전을 동원해 앞을 막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저들과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전가와 해가를 없애고 영웅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들을 치는 바람에 인마전, 비마전, 원로전을 잃고 패자가 됐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지.”

“맞다. 그건 인정하겠다. 이번 일의 실패는 전적으로 나의 과욕에서 비롯됐다.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너를 없애겠다며 나서지도 않았을 테고, 부하들을 잃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완벽한 패배다.”

천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지 않네.’

무혼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가장 강한 자는 모든 걸 내려놓은 자다. 그런데 천파의 상태가 그랬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있다. 그건 바로 저승 가는 길동무로 널 데리고 가는 거다.”

파아앗!

천파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흘러나왔다.

입고 있는 장포가 바람을 머금은 것처럼 부풀어 오르고 산발한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곧이어 무혼을 바라보는 천파의 눈에서 시뻘건 광채가 폭사됐다.

“젠장!”

무혼은 욕설을 내뱉었다.

천파의 모습으로 보건대 생명의 기운이라고 할 수 있는 진원지기의 벽을 허문 게 분명했다. 진원지기의 벽을 허물게 되면 최소한 식물인간이 되거나 생명을 잃게 되지만, 내력을 다 쓰기 전까지는 과거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진다.

무림십패 중 서열 오위에 올라 있는 자가 현재보다 두 배나 강해진다면 그처럼 끔찍한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아스!”

무혼은 아스를 소환했다.

아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곧바로 소환했다.

“크앙!”

내력이 극에 이른 듯 천파는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헉!”

무혼은 재빨리 오른편으로 넘어졌다.

천파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피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스악!

천파의 도가 스쳤을 뿐인데 아스의 왼팔 장갑이 약간 찢겼다.

퍽!

아스는 왼손으로 바닥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크아아아앙!

천파의 괴성은 더욱 커졌다. 그는 아스를 쏘아보며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아스 앞까지 다가간 그는 자신의 애병인 무적패도無敵覇刀를 휘둘렀다.

천패도법天覇刀法의 일식인 지파地破였다.

진원지기를 끌어 올려 이성을 잃은 상태이긴 하지만 몸은 무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새카만 광채를 머금은 기운이 아스를 향해 밀려왔다.

“폭! 강! 풍!”

무혼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세 무공을 연거푸 펼쳤다. 폭의 기운을 강하게 만들어 바람과 함께 쏘아 보냈다. 그가 쏘아 보낸 기운과 천파가 펼친 지파가 부딪쳤다.

콰콰쾅!

둔탁한 소성과 함께 천파와 아스가 동시에 뒤편으로 날렸다.

콰앙! 콰앙!

아스와 천파는 벽을 뚫고 들어갔다.

크엉!

천파와 아스는 곧바로 뛰쳐나와 서로를 향해 쏘아져 갔다.

“차하!”

“우! 빙! 폭!”

기합도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천파가 펼친 무공은 천파天破였다. 강기로 이루어진 벽이 아스를 향해 나아갔다.

아스의 그랜드 크로스에서도 새하얀 기운을 머금은 기운이 쏘아져 나와 천파를 향해 밀려갔다.

카라랑! 카라랑! 콰앙!

서로를 밀어내는 듯하던 기운이 화탄처럼 폭발했다.

“윽!”

무혼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콰앙!

이어 등에서 둔탁한 소성이 들려왔다. 무혼은 입술을 만져 보았다. 턱이 축축했다. 두 번의 충돌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여기보다는 넓은 곳이 낫겠네.”

파앗!

무혼은 밖으로 몸을 날렸다.

크앙!

천파가 도를 휘둘러 왔지만 허공으로 솟구쳐 피하고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천파는 그를 놔주지 않았다. 무혼은 계속해서 천파와 도를 섞으며 자리를 이동했다. 진원지기가 점점 절정에 달해 가는 듯 천파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십여 합을 겨루고 나서야 좁은 구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네가 고생이 많다, 아스.”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도 많은 싸움을 했지만 장갑에 흠집이 난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중원에서는 수시로 흠집이 나는 것 같다. 아스에게 공연히 미안했다.

“건너가면 다시 원래대로 해 줄게.”

중원에서는 수리를 해 주고 싶어도 장비도 없고 마법사도 없어서 응급처치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대륙으로 건너가서야 완벽한 수리가 가능할 것 같다.

“그 전에…….”

무혼은 그랜드 크로스를 고쳐 잡았다.

전에는 드래곤을 찜 쪄 먹었던 자신과 아스다. 자신도 아스도 과거와 달라졌다고 하지만 인간 한 명을 없애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다시 한번 해 보자.”

무혼은 곧바로 바닥을 차고 몸을 날렸다.

십여 장을 솟구친 그는 달려오는 천파를 향해 그랜드 크로스를 내리그었다. 그랜드 크로스에 실린 힘은 화火, 강强, 패覇였다.

콰앙!

두 거력이 부딪쳤다.

아래쪽에서 솟구치던 천파는 지상으로 처박히고 아스는 허공으로 솟구쳤다.

크아앙!

천파는 곧바로 바닥을 차고 솟구쳤다.

그런 그를 향해 아스도 쏘아져 갔다. 아스의 그랜드 크로스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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