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90)
수백 명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선두에서 달리고 있는 자는 마원의 원주 천파였다.
“얼마나 남았는가?”
천파는 옆에서 달리고 있는 진무양을 보며 물었다.
“저깁니다.”
진무양은 전면을 가리켰다.
천파는 시선을 들었다. 벌판 너머로 소뿔처럼 우뚝 솟은 절벽이 보였다.
“속도를 내게.”
“알겠습니다.”
진무양은 내기를 끌어 올렸다. 빠르게 한 식경을 내달린 마원 무인들은 천험곡 입구에 도착했다.
마원 무인들은 주변을 살폈다. 인마전에서 나온 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인마전 무인은 보이지 않았다.
“좋지 않군.”
천파는 얼굴을 찌푸렸다.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여기로 온다는 사실을 과홍은 잘 안다. 그렇다면 상황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라도 대원을 이곳으로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그건 곧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뜻이 된다.
“서두르게.”
“알겠습니다.”
일행은 다시 달렸다. 이번에는 거의 두 배의 속도였다. 한참을 달리던 일행이 멈춘 곳은 인마전과 무혼 일행이 싸운 싸움터였다.
“여기서 싸움이 있었습니다.”
주위를 살피던 진무양이 말했다.
“싸움이 있었다면 아군이 됐든 적이 됐든 시체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구먼.”
“저도 그게 좀 이상하긴 합니다.”
진무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패했다고 하도 인마전 무인들의 시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었다.
“일단 더 가 보세.”
마원 무인들은 다시 걸었다.
계속 전진하던 마원 무인들이 멈춘 곳은 폭이 좁아지는 구간 초입이었다.
천파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원 무인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정찰하게.”
천파는 진무양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진무양은 정찰조를 짜서 폭이 좁은 구간으로 집어넣었다. 들어갔던 대원들은 반 시진 정도 지나자 나왔다.
“매복은 없습니다.”
“……가자.”
천파는 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곧 폭이 좁은 구간으로 들어섰다.
천파는 고개를 들어 절벽을 보았다. 좌우측 절벽이 금세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공연히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매복은 없다고 했으니까.’
그는 자신을 다독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이 이상한 점을 발견한 건 오십 장 정도 들어갔을 때였다.
“여기…….”
앞서가던 진무양이 말끝을 흐렸다.
시체처럼 보이는 게 있었다. 진무양은 그 물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갔다. 가장 먼저 그가 본 것은 도끼였다.
“악부인.”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 도끼는 도부대 대주 악부인의 무기였다. 그는 시체 앞으로 가서 뒤집었다.
푸욱!
“커억!”
진무양의 입에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자신의 단전에 검을 찔러 넣은 자를 보았다. 악부인으로 꾸미고 있던 자는 무혼이었다.
“너, 너는…….”
“무혼이라고 해.”
“무슨 일인가?”
뒤편에서 천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휙!
무혼은 진무양의 단전으로 박아 넣었던 검을 뽑아내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원 무인을 보았다.
“웬 놈이냐?”
천파는 버럭 소리쳤다.
“이런 사람.”
무혼은 진무양의 몸통을 향해 오른발을 내질렀다.
퍼억!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진무양의 신형이 뒤편으로 훨훨 날아갔다.
턱!
천파는 진무양을 잡았다.
“구, 군사!”
“죄송합니다, 주공.”
진무양의 고개가 뚝 떨어졌다.
“군사!”
천파는 다시 한번 소리쳤다. 하지만 진무양은 대답이 없었다.
“죽일 놈!”
천파는 무혼을 노려보았다. 진무양과 그는 사십 년 지기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승승장구한 것 같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어려움을 함께 헤쳐 온 사람이 진무양이다.
진무양이 없었다면 자신도 없었을 거라고 천파는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죽으면 차기 원주는 진무양으로 내정까지 해 두었다. 가족보다 더 가족 같았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죽은 것이다.
천파는 진무양을 내려놓았다.
휙!
바로 그때 무혼은 뒤편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도망치지 못한다!”
천파는 짐승처럼 포효하며 무혼을 쫓아갔다.
“원주!”
원로전 전주 원추가 천파를 불렀다. 하지만 천파는 대답이 없었다. 미친 듯이 내달렸다.
“빌어먹을! 가세.”
원추는 일행을 보며 소리쳤다.
파앗! 파앗!
원로전 원로들이 일제히 원추를 쫓아 나아갔다.
“전력을 다해 원주님을 따라가라!”
비마전 진영에서도 고함이 터져 나왔다. 곧 비마전 무인들은 전력 질주했다.
―다 들어왔으면 던지시오.
무혼은 달려가면서 전음을 보냈다. 그가 전음을 보낸 사람은 마나탄을 들고 있는 신무였다. 신무는 절벽 위에서 대기 중이었다.
―알았소.
전음을 받은 신무는 마나탄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이미 절벽은 완벽하게 파악한 상태고 마나탄은 절벽 안쪽에 깊숙이 묻어 두었다. 터뜨리기만 하면 완벽하게 무너져 계곡을 막아 버릴 것이다.
휙!
신무는 허공으로 솟구쳤다.
십 장 높이까지 솟구친 그는 좌측과 우측을 향해 동시에 마나탄을 내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마나탄은 절벽에 난 구멍으로 파고들어 갔다.
텅!
처음엔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콰앙! 쾅쾅쾅! 쾅쾅쾅! 쾅쾅쾅! 쾅쾅!
그라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 위에서 쏟아진 바위는 아래쪽으로 떨어지더니 이십 장 높이의 벽을 만들었다.
신무는 새로 생겨난 벽 위에 섰다.
“여기로 오는 놈은 모두 내 손에 죽는다.”
신무는 창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무슨 소리냐?”
미친 듯이 달려가던 천파는 엄청난 폭발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원주.”
뒤따르던 원주가 천파를 불렀다.
“내가…….”
천파는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직 피해를 입은 건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방금 그건 무슨 소리요?”
“대원을 보냈으니까 바로 알게 될 겁니다.”
콰콰쾅! 쾅쾅쾅! 쾅쾅! 쾅!
“억!”
앞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폭발 소리에 천파는 깜짝 놀랐다. 그의 시선이 전면으로 향했다. 이십여 장 떨어진 곳은 절벽이 눈사태가 난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절벽이 무너져서 생긴 벽의 높이는 이십 장이 넘었다.
그 절벽 위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묵천야였다.
“팔왕은 어디 있느냐?”
전방을 향해 소리치는 천파의 목소리엔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인마전 무인들이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여기 있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전면에 무혼이 나타났다.
“놈!”
천파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소용돌이쳤다.
“원주!”
원추가 천파를 불렀다. 또다시 이성을 잃고 날뛸까 봐 걱정이 됐다.
“난 괜찮소.”
천파는 손을 저었다.
“뒤쪽도 차단됐습니다.”
뒤편으로 갔던 자가 소리쳤다.
천파는 무혼 일행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새로 생긴 벽 위에 있는 자들 두 명까지 합치면 아홉 명에 불과하다. 적이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아홉 명이고 아군은 오백 명이나 된다. 게다가 백 명은 마원에서 가장 강하다는 원로들이다. 이런 전력의 우위에서 패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파는 자신들에게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들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지금 우리를 포위한 거냐?”
천파는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도망치면 쫓아가서 없애야 하는데 그럼 번거롭잖아. 이렇게 한꺼번에 몰아넣고 쳐 죽이면 힘도 시간도 적게 들거든.”
“우리가 오백 명이나 된다는 걸 잊은 모양이구나. 그리고 우린 인마전 대원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특별한 걸 준비했어.”
“특별한 거?”
“이제 보게 될 거야. 아스!”
무혼은 아스를 소환했다. 곧바로 무혼 옆에 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건?”
천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장에 달하는 거대한 동체. 가슴이 나오고 허리는 들어가고 얼굴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이 장에 달한 키가 크게 보이지 않을 만큼 완벽한 비율의 몸매도 지녔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괴물체가 지닌 강인함이다.
아름다운 외모 속에는 천하를 굽어보는 강함이 숨어 있다.
무혼은 아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곧 아스의 마법 공간에 자리했다. 마법 공간 안에는 장도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 수라와 함께 사용했던 그레이 훼일이다. 저 녀석을 그레이 훼일이라 지은 건 고래를 자르던 도이기 때문이다.
무혼은 그레이 훼일을 들고 섰다.
“처, 철갑거인?”
천파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는 강호무림에 철갑거인이 존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그 말에 의하는 철갑거인의 키는 오 장이고, 장갑은 도검으로 뚫을 수 없는 특수한 쇠로 돼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키가 오 장이나 되는 사람 형상의 쇳덩어리가 움직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설사 움직인다고 해도, 단 일 초에 오륙 장을 이동하고, 순식간에 동작을 바꾸는 무인과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게다가 무인에게는 강철도 두부처럼 잘라 낼 수 있는 강기罡氣가 있다.
몇 합이 지나기도 전에 조각조각 잘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뒤에도 몇 번 들었지만 그때마다 웃고 말았다.
그런데 실제로 보게 된 것이다.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저런 게 움직인다면…….”
원로전 전주 원추의 심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철갑거인이 움직이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광 제.
원추는 바로 옆에 서 있는 노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 노인은 원로전 원로 중에서 신법이 가장 뛰어난 비영신飛影身 광우치였다.
광우치는 원추를 돌아보았다.
―삼중마와 함께 시험해 보게.
―알겠소.
광우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뒤에 있는 세 명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들은 천중마天中魔 과허, 지중마地中魔 전죽, 인중마人中魔 정하였다. 과허는 칠척장신으로 키가 아주 크고 전죽은 오 척 단구고 인중마 정하는 중간 키다.
장대처럼 큰 과허가 천중마가 되고 오 척 단구의 전죽이 지중마란 별호를 얻는데, 키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만큼 두 사람은 키로 완벽하게 구분됐다. 성격도 키만큼이나 판이한데 키가 큰 과허는 느긋하고 전죽은 화를 참지 못하는 다혈질이며 정하는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하다.
키도 다르고 성격도 완전히 다르지만 세 사람은 평생을 함께하였고 합격술에 있어서는 강호 최강이란 평가를 들었다.
원추가 광우치와 삼중마를 내보낼 생각을 한 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철갑거인이 한 기뿐이지만 다른 자들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철갑거인이 커다란 쇳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걸 부하들에게 보여 주지 않으면 사기가 떨어져 싸움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휙!
휙휙휙!
비영신 광우치와 삼중마가 몸을 날렸다. 그들은 아스 앞으로 내려섰다. 삼중마는 정면으로 서고 광우치는 왼편에 섰다.
“나는 네가 무인처럼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추가 크게 소리쳤다.
무혼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잔뜩 경직된 얼굴로 철갑거인을 바라보고 있는 비마전과 원로원 대원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무혼은 그레이 훼일을 가슴 앞으로 세웠다.
“으음!”
아스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랜드 크로스를 가슴 앞으로 세우자 여기저기서 신음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