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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486화 (486/524)

황금가 (486)

천험곡 혈전

이미 심무극의 배에 올라타 버렸다. 다른 배는 원하면 내려서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지만 심무극의 배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함께 가는 수밖에 없다.

가족이 먼저 내리기 전까지는.

“그럼 이번 일은 자네들에게 맡겨도 되겠구먼.”

심무극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신왕을 없애는 일입니까?”

듣고 있던 하발이 물었다.

“그의 얼굴을 꼭 보고 싶네. 몸통 말고 얼굴만 말이네.”

“그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하남성 운성으로 가면 그자를 볼 수 있을 거네.”

“알겠습니다.”

하발을 비롯한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카, 자네는 망설이지 않겠지?

심무극은 아르카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놈의 목을 칠 기회가 생겼을 때를 말하는 겁니까?

아르카가 전음으로 물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겠네.

심무극은 싱긋 웃었다. 신왕이 아니고 그놈이라고 칭했다는 건 가차 없이 목을 치겠다는 뜻이다. 아르카와 하발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바로 출발해야 할 거네.”

심무극은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한 시진 후에 동화문 밖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아락은 먼저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그는 그의 처소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선 순간 안쪽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무슨 일로 부른 거예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헤리아였다. 황실로 들어온 그녀는 주려아 근처에 숨어 있다가 아락 처소를 오가곤 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잠시 나갔다 와야 할 것 같다.”

“지금요?”

“응.”

“혼자 가나요?”

“전사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

“출병이군요.”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금세 끝날 게다.”

“알았어요.”

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외출복을 챙겨 주었다. 옷을 갈아입은 아락은 헤리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방에서 나갔다.

그가 처소를 나서자 각 건물에서 검은 옷을 입은 암흑신족 대원들이 나와 아락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암흑신족의 수는 육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이 동화문으로 이동하는 그 시각, 하발과 아르카도 전사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일행이 만난 곳은 약속 장소인 동화문 해자 밖이었다.

“갑시다!”

“출발하라!”

“출발하라!”

우렁찬 외침과 함께 천오백여 명의 암흑종족 전사들이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떠나는 그 시각, 황제 심무극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 앞에 세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얼굴에 흉터가 길게 나 있는 매서운 인상의 중년인은 역천일대 대주 혼세비마混世飛魔 육겁이었다. 육겁이 앉은 자리는 맨 오른편이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무표정한 표정의 중년인은 역천이대 대주 무혼마제無魂魔帝 율강리다. 그리고 왼편에 앉은 자는 십대초인의 최장자라고 알려진 제왕 초무극이었다.

“방금 암흑종족 수장들에게 임무를 줘 보냈다.”

심무극은 아락 일행에게 준 임무에 대해 말했다.

“저희는 어떤 일을 하면 됩니까?”

역천일대 대주 혼세비마 육겁이 물었다.

“그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감시하다가 필요하면 개입해도 된다.”

“알겠습니다, 신왕.”

“지휘관은 초무극이다.”

“네?”

육겁과 율강리는 당황한 얼굴로 심무극을 보았다.

신족이 어찌 인간의 지시를 받느냐 하는 얼굴이었다.

“저 아이 이름이 무극인 건 내가 지었기 때문이다, 육겁.”

심무극이 차갑게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신왕.”

육겁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지었다는 말은 곧 아들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중원을 다스리기 위한 포석인가?’

육겁은 내심 생각했다.

전 같으면 심무극이 인간을 특급 대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황제가 되고 난 후에, 인간은 인간이 다스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따를 수밖에…….’

“지금 당장 출발해라.”

“알겠습니다, 신왕.”

세 사람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어디서 볼까요?”

육겁이 초무극에게 물었다.

중급 신족이 하급보다 못한 인간에게 공대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신왕의 이름을 이은자라면 달라진다. 게다가 초무극의 실력은 중급인 자신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공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상전인 게 기분 나쁘시오?”

초무극은 두 사람을 가만히 보며 물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초 대협은 신왕의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입니다.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건 성을 물려받은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육겁은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신족 이름이 아니고 중원 이름이오.”

“원래 이름이 됐건 중원 이름이 됐건 상관없습니다. 신왕의 이름 한 자락을 물려받았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럼 내가 말을 놓아도 되겠군.”

“하대는 상관의 권리입니다.”

“좋다.”

초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흠!’

육겁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초무극은 단지 ‘좋다’라는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신왕인 심무극이나 천우황 못지않다.

“신족은 날개를 펼치는 데 시간 제약이 있다고 하던데, 맞는가?”

초무극은 하대를 반하대로 바꾸었다. 그러자 사방을 완벽하게 옭아맨 것 같던 기운이 풀어지며 훈훈해졌다. 초무극은 목소리 하나로 주변 환경을 바꾸어 버리는 엄청난 능력자였다.

“그, 그렇습니다.”

초무극의 말투가 반하대로 바뀌자 육겁의 말투는 더욱 공손해졌다. 조용한 자가 더 무섭다고, 반하대의 말투가 반말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 탓이다.

“궁금하네.”

“같은 내공을 사용한다고 했을 때 두 배씩 늘어난다고 보면 됩니다. 가장 낮은 직급인 하급이 날개를 펼치는 시간은 두 시진입니다.”

“하면 중급은 네 시진, 상급은 여덟 시진이란 말이구먼.”

“그렇습니다. 하지만 중급과 상급도 전력을 다해 날개를 펼쳐 이동하면 두 시진밖에 사용하지 못합니다.”

“대신 하급보다 두 배는 빠르겠지?”

“네.”

“좋네. 가마를 준비하게.”

“타고 가시겠습니까?”

“부하들은 하늘을 날아가는데 수장이란 자가 땅바닥을 기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대신 가마는 가장 가벼운 걸로 준비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수좌.”

육겁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내 처소에 있겠네.”

초무극은 그의 처소로 향했다.

육겁은 처소로 들어가자마자 부하를 시켜 가마를 준비했다. 초무극은 가장 가벼운 걸로 하라고 했지만 부하 된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재질이 단단하고 지붕과 벽이 있지만 밖을 볼 수 있는 걸로 준비했다. 가마꾼은 총 여덟 명이었다.

날개를 펼쳐도 간섭이 되지 않도록 손잡이를 조정한 후 초무극의 처소로 갔다.

“멋진 가마구먼.”

초무극은 흡족하게 웃고는 가마에 올랐다. 그가 타자 가마꾼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쳤다. 가마는 둥실 떠올랐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가마는 삼십 장 높이에서 멈췄다.

초무극은 고개를 돌렸다. 역천일대와 이대 일천 명이 날개를 펼친 채 가마를 중심으로 포진해 있었다. 학의 날개를 본뜬 거대한 학익진이었다.

“가지!”

초무극은 나직하게 말했다.

“출발하라!”

“출발하라!”

“출발하라!”

출발 명령이 좌우측으로 전달됐다.

역천일대와 이대 대원들은 일제히 날개를 펄럭였다. 그러자 그들의 신형이 허공을 뚫고 쏘아져 갔다.

* * *

미창산은 한중漢中 분지와 파촉巴蜀 사이에 가로놓인 대파산맥의 한 구간이다.

사천에서 섬서성으로 혹은 섬서성으로 오가는 유일한 통로인 대죽로大竹路가 있는 산이기도 하다.

촉도지난으로 불리는 잔도가 있는 곳 또한 미창산이다. 미창산에서 섬서성까지 거리는 사백 리 길로 결코 가깝지 않다. 높이는 구백 장 정도지만 대죽로 말고는 넘을 수 없을 만큼 험준하다.

일 년에 이백일 정도가 흐릴 정도로 날씨가 좋지 않다 보니 맹수와 독물의 천국이 됐다.

무혼 일행이 미창산에 도착한 건 출발한 지 하루 반나절 만이었다. 객잔에 들러 음식을 챙긴 일행은 곧바로 미창산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미창산에 적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왔습니다.”

검은색 조爪를 다섯 손가락에 끼운 자가 거구 사내 앞에 허리를 꺾으며 보고했다.

턱수염이 무성하고 무인보다는 산적에 더 어울릴 것 같은 덩치를 가진 이자는 마원의 인마전人魔殿 전주 도천마부 과홍이었다. 과홍의 허리에는 자루가 두 자 정도 되는 커다랗고 검은 도끼가 걸려 있었다. 일반 도끼보다 세 배나 더 큰 도끼인데도 과홍의 덩치가 워낙 커서 그런지 앙증맞아 보였다.

그 도끼가 바로 과홍을 인마전 전주로 올려 준 흑마부黑魔斧였다.

“인원은?”

“열한 명입니다.”

“어떤 자들이라고 했지?”

과홍은 옆에 서 있는 문사 차림의 사내를 보았다.

독잔마수毒殘魔手 외자항.

그는 원래 독조대毒爪隊의 평대원이었다. 그랬던 그가 독조대의 대주는 물론 인마전 부전주가 된 것은 한 가지 사건 때문이었다.

독을 연구하던 그는 간혹 자신의 몸에 독을 시험하곤 했다. 보통은 시험을 해도 큰 문제 없이 끝나곤 했는데 한 번은 달랐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몸으로 퍼진 독은 왼팔로 몰아넣고, 머리로 퍼진 독은 왼눈으로 보냈다.

그런 다음 왼팔을 자르고 눈알을 뽑아 버렸다. 그 사건으로 인해 외자항은 왼팔과 왼눈이 없는 불구가 됐다. 하지만 독은 그에게 불행만 안겨 준 게 아니었다. 그 독으로 인해 그는 만독불침이 됐고 일 갑자의 공력을 얻어, 무공은 전주인 과홍과 비슷한 경지까지 올랐다.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다고 느낀 과홍은 평대원이던 외자항을 부전주로 앉히고 독조대를 맡겼다. 동료들은 스스로 왼팔을 자르고 눈알을 뽑아 버린 행태를 두고 독하고 잔혹하다고 하여 외자항에게 독잔마수라는 별호를 지어 주었다.

“초특급 강자라고 합니다.”

외자항이 말했다.

“초특급이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지?”

“무림십패와 견줄 수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외자항의 얼굴이 어떤 기대로 인해 잔뜩 상기됐다.

과홍은 외자항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외자항이 흥분한 이유를 잘 안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 강한 외자항은 무림십패와 싸워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물론 상급자에게 말한 게 아니고 부하들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인마전의 부전주 신분으로 마원 원주급과 싸운다는 건 어불성설.

아마도 비무를 하는 꿈만 꾸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 왔으니, 흥분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고하를 가려 보고 싶은 거냐?”

과홍은 물었다.

“기회가 온다면 못 할 것도 없지요.”

외자항이 도전적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꿈보다 작전이 우선이라는 걸 명심해라.”

“먼저 기회를 주시면 안 됩니까?”

“그건 안 된다. 작전이 먼저다. 단, 도망치는 놈을 쫓아가서 싸우는 건 허락하겠다.”

“……알겠습니다.”

외자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각 대주는 이쪽으로 와라.”

고개를 끄덕인 과홍은 뒤편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세 사람이 과홍 옆으로 몸을 날려 왔다.

과홍 못지않은 덩치를 가진 자는 도끼를 들었고 한 명은 죄수 목을 칠 때 사용하는 회자도劊子刀를, 마지막 한 명은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칼 두 자루를 허리춤에 꽂고 있었다.

부마斧魔 악부인, 장도마長刀魔 백난이, 쌍수도雙手刀 방낙, 세 사람은 도부대屠斧隊, 회자대劊子隊, 백정대白丁隊의 대주들이었다.

“우리가 작전을 펼칠 장소는 천험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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