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85)
자운영과 염라가 돌아온 건 반 시진 후였다.
“줄었습니다.”
자운영의 첫마디였다.
“어떻게 줄었다는 거요?”
무혼이 물었다.
“우릴 쫓는 쪽은 마원의 원주 천파와 그의 부하들뿐이오.”
염라가 대답했다.
“그럼 나머지는…….”
“두 명을 잡아 확인해 봤는데 아는 게 없었소.”
“흠!”
무혼은 턱을 쓰다듬었다. 뭔가를 생각하던 그는 권말남을 보았다.
“그들이 움직일 방향은 운성이 있는 하남성과 마가가 있는 섬서성이에요.”
“마가로 간다고?”
“여기서 마가까지는 사흘이면 가지만 하남성까지는 전력 질주하면 닷새, 싸울 힘을 보충하면서 가면 엿새 이상 걸려요. 게다가 하남성에 도착했을 때 운성이 무사하다는 보장이 없어요.”
“그래서 하남성보다 마가로 갈 거다?”
“제가 그들이라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렇군.”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떨어져 있소?”
그는 염라를 보며 물었다.
“두 시진 거리를 두고 쫓아오고 있소.”
“나는 마가로 바로 가고 싶은데, 당신들 생각은 어떻소?”
이미 작전을 알아차렸는데 굳이 환수각까지 갈 이유가 없다. 그보다는 마가로 가서 그들을 돕는 게 나은 선택이다.
“그렇게 하는 게 낫겠소.”
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따라오는 자들은 어떻게 할 거죠?”
권말남이 물었다.
“우린 그자들보다 이틀이 늦었어. 즉 마가가 당하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미친 듯이 달려야 한다는 뜻이야. 뒤따르는 놈들을 없앤다며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어.”
“그럼 출발해요.”
“갑시다.”
무혼은 염라 일행에게 말하고는 곧바로 바닥을 찼다. 그의 신형이 전방으로 쭉 나아갔다. 그에 이어 다른 이들도 일제히 바닥을 찼다.
무혼 일행이 있는 곳에서 섬서성의 마가까지는 사천성을 남북으로 가로지는 먼 길이었다.
식사는 물론 잠도 최소한으로 자고 가야 했다.
“저분에게 부탁하면 좀 더 빨리 갈 수 있지 않나요?”
자운영은 권말남과 나란히 달리는 바타르를 가리키며 무혼에게 말했다.
“관직에 얼마나 있었지?”
무혼이 물었다.
“십오 년입니다.”
“그럼 빚을 진다는 게 어떻다는 걸 알지 않아?”
“두 분은 친구 아닌가요?”
“친구?”
“네.”
“아냐.”
“그럼?”
“바타르와 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함께하는 거지 친구가 아냐. 그리고 인간과 드래곤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어.”
“그렇군요.”
자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저 녀석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는 거야.”
우스갯말이라고 할지라도 바타르에게 부탁을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타르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 중원의 마나 밀도가 농밀하지 못해 일어난 현상이다. 그가 중원으로 막 넘어왔을 때 하트뿐만 아니라 몸도 완벽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중원에서 생활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마나 밀도가, 물속으로 떨어뜨린 먹물처럼, 점점 낮아졌다. 드래곤에게 마나는 생명과 마법의 원천이다.
마나가 옅어졌다는 건 곧 힘이 떨어졌다는 걸 뜻한다. 처음엔 온몸과 하트에 저장된 마나로 어떻게 버텨 나갔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하트도 불안정해졌다. 몸에 이상을 느낀 바타르는 그때부터 무공에 집중했을 것이다.
“힘이 약해질 수도 있는 겁니까?”
“군자산 알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내공을 쓰지 못하게 하는 독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원의 공기는 바타르에게 군자산과 같아.”
“아!”
자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바타르의 상태를 이해는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바타르에게 부탁을 하지 않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마가가 멸망해도 상관없다는 거야.”
“신족만 잡으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맞아.”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혼 일행이 나아가는 방향이 달라졌다는 걸 천파 일행이 알아차린 건 저녁 무렵이었다. 정확하게 알았다기보다는 이상하다고 느낀 정도였다. 그때 이틀 전에 연락했던 부문주 진무양이 진영으로 찾아왔다.
“수고 많으십니다, 원주님.”
진무양은 천파가 없는 동안 마원을 총괄하고 있었다.
“수고는 무슨……. 그보다 내기 지시한 일은 처리했는가?”
“네. 만마전萬魔殿과 천마전天魔殿은 전가戰家가 있는 감숙성으로 보냈고, 지마전地魔殿, 인마전人魔殿, 시마전屍魔殿은 하남성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원로전 원로가 모두 왔습니다.”
“잘했네. 병력은 언제 출병시켰는가?”
“어제 아침입니다.”
“연락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하남성으로 보낸 곳 중 한 곳을 미창산으로 돌리도록 하게.”
“미창산이면 사천성과 섬서성 경계에 있는 산 아닙니까?”
진무양은 머릿속으로 지형을 그리며 물었다.
“지금 우리가 쫓고 있는 자들을 없앨 참이네.”
“그들이 미창산을 넘을 거라고 보십니까?”
“지금 상황으로 보건대 놈들의 행선지는 마가네. 마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미창산을 넘는 거고.”
천파는 무혼 일행의 목적지가 마가라는 걸 확신했다.
“알겠습니다.”
진무양은 고개를 숙였다.
“원로들은 어디 있는가?”
“저쪽에서 대기 중입니다.”
“가지.”
천파는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천파는 원로 고수 백여 명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원주님.”
노인들은 일제히 천파를 행해 포권을 취했다.
“어려운 걸음을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천파는 노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백발노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는 원로전의 전주 백발마노白髮摩老 원추였다. 백발마노 원추는 백발마노라는 별호보다는 십보필살十步必殺이란 말로 더 유명한 고수였다. 총 열 개의 암기를 무기로 사용하는데, 먼저 끝낼 기회가 있어도 상대의 목숨을 취한 건 열 번째 암기를 사용해서 생겨난 칭호였다.
“마원 문도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천파의 공대가 마음에 든 듯 원추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상황이…….”
천파는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럼 서둘러야겠군요.”
이야기를 듣고 난 원추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서 출발하시지요.”
“출발하세.”
천파는 진무양을 돌아보며 말했다.
“출발하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숲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마전飛魔殿 대원 사백 명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비마전은 원주 직할대로 천파가 북경으로 갈 때 수행해 갔던 조직이었다.
검은 옷을 걸친 비마전 무인들이 움직이자 마치 검은 숲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가시죠?”
그들에 이어 천파와 진무양 그리고 원로전 원로들이 몸을 날렸다.
* * *
실내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있는 실내 벽에는 촛불도 아니고 등잔도 아닌 등 하나가 붙어 있었다.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마법등이었다. 마법등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은 현 황제인 심무극과 대사공 천우황이었다.
“야심한 밤에 어쩐 일인가?”
천우황이 물었다. 그는 막 잠자리에 들려다가 심무극의 호출을 받고 온 참이었다.
“심황으로부터 연락이 왔네.”
“무슨 내용인가?”
“루하가 이쪽에 있다고 하네.”
“이쪽?”
천우황의 눈이 커졌다.
“그렇네.”
심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황이 쫓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쫓기는 것처럼 하면서 혼자만 빠져나와 안휘성으로 향한 모양이네.”
심무극 역시 해림이 멸문했다는 보고를 받은 터라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안휘성이면 해림이 목표였다는 건가?”
“멸문했다는구먼.”
“혼자?”
“루하가 아무리 신왕이고 마신이 있다고 하지만 혼자 해림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네.”
“마가 무인을 동원했단 말이구먼.”
“그렇겠지.”
“심황은 어떻게 한다던가?”
“이쪽으로 와 봐야 닭 쫓던 개밖에 안 될 거라 생각한 모양이네.”
“하면?”
“능천대를 이끌고 마가로 향했다네.”
“루하의 근원을 부숴 버리겠다는 건가?”
“그렇네.”
“그답군. 하면 이곳에 있는 루하는?”
“우리에게 맡아 달라고 하였네.”
“흠!”
천우황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현재 황실에 남아 있는 신족은 주천대와 역천대 그리고 아락과 하발, 아르카가 이끌고 있는 암흑오부족이다. 그들 중 믿을 수 있는 자들은 주천대와 역천대뿐이다. 암흑오부족은 협조를 하기로 했지만 대사를 믿길 정도로 신뢰하진 않는다.
“아락과 하발을 불러 주게.”
“그들은 너무 위험하네. 만일 상대가 루하고, 마신의 주인이란 걸 알면 바로 돌아서 버릴 거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인간에게만 통용되는 게 아니네. 아니 인간보다 자손이 귀한 신족이나 마족 드워프, 엘프가 더 혈육에 집착한다네.”
“그게 무슨…….”
천무황은 의아한 얼굴로 심무극을 보았다.
“그들의 가족은 버려진 땅에 없다네.”
심무극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면?”
“나만 아는 곳으로 옮겼네.”
“풋!”
천우황은 피식 웃었다. 역시 심무극이다. 자신은 아락과 하발을 잡아 놓은 물고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심무극은 그들을 키울 어항까지 준비한 것이다.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이상 배신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둘을 불러오겠네.”
“아르카도 함께 부르게.”
“알았네.”
천우황은 밖으로 나갔다.
아락, 하발, 아르카가 안으로 들어온 건 한 식경 후였다.
“자는데 깨운 거 아닌가?”
심무극은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초저녁에 잠은 무슨…….”
세 명은 심무극 건너편으로 앉았다.
“그래, 지내는 건 어떤가?”
심무극은 세 사람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다들 얼굴이 좋아진 것 같았다.
“햇빛이 좋아서 그런지 전보다 훨씬 좋습니다. 살도 좀 찐 것 같고요.”
아락이 말을 올렸다. 따르기로 한 이상, 행동은 물론이고 말투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좋다니 다행이구만.”
“그런데 어쩐 일로…….”
아락이 물었다.
“몸에 찐 살 좀 빼라고 불렀네.”
“얼마든지 시켜 주십시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네.”
“말씀하십시오.”
아락이 말했다.
“만일 루하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텐가?”
“루하라면…… 우리 신족의 왕을 말하는 겁니까?”
아락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렇네.”
“신왕께서 살아 있단 말입니까?”
“질문은 내가 먼저 했네.”
“그건…….”
아락은 선뜻 대답을 못 했다. 단 한 번도 신왕이 살아 있을 거란 생각을 해 보지 않아서였다.
“단, 그는 과거의 신왕이 아니고 인간의 모습이네.”
“살아 있군요.”
아락은 신음처럼 말했다.
“그렇네.”
“그래서 우리 가족을 모처로 옮긴 겁니까?”
“알고 있었는가?”
“며칠 전에 알았습니다.”
“자네들이 내 밑으로 들어오자마자 살 곳을 마련하라고 지시를 내려 두었네. 내가 장담하건대 버려진 땅보다 훨씬 좋네.”
“위치는 알려 주지 않을 겁니까?”
“내 입장을 이해해 주었으면 하네. 하지만 완전히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니네. 자네들의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들여보내 주는 건 가능하네.”
“그나마 다행이군요.”
아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 텐가.”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 아닙니까?”
아락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