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467화 (467/524)

황금가 (467)

운성

회의는 그 후로도 한 시진 이상 이어졌다.

공손보기가 회의장을 나온 건 어둠이 밀려온 후였다. 나온 사람은 그 혼자였다. 여섯 사람은 함께 술은 한잔 하겠다며 회의실에 남았다.

안에서 철검우와 남궁창하 그리고 여강 일행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휴우!”

공손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운성 내에서는 철검우에 대한 말들이 많다. 성주도 아니면서 성주보다 더 강한 권력을 행사한다며, 도대체 운성의 성주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수시로 터져 나오곤 한다.

다만 외부로 표출되지 않을 뿐이다.

문제는 그런 사실에 대하 성주 철전혼이 귀를 닫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슬쩍 운을 떼 보았다.

직접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조금만 눈치가 있는 자라면 소성주가 권력 남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철전혼 성주는 ‘나이를 먹으면 나보다 훨씬 나은 성주가 될 거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지켜봐 주시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자식에 대한 흠을 잡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후로 철검우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고 이제는 거의 성주 행세를 하고 있다.

“이제 은퇴할 때도 된 거지.”

공손보기는 나직하게 중얼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그의 뒤통수로 철검우 일행의 웃음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 * *

“워!”

마차 한 대가 운성 성문 앞에서 멈췄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경비를 서던 이철석이 정중하게 물었다. 손님을 정중하게 대하는 건 경비의 기본이다.

하지만 방금 이철석은 다른 때보다 더욱 공손하게 물었다. 보통 때는 고개를 숙이거나 하진 않는데 오늘은 목례까지 했다. 그가 이렇듯 극진하게 맞은 건 그간의 경험 때문이었다. 경비를 서다가 터득한 것 중의 하나는 마차가 고급일수록 타고 있는 자의 신분도 높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확신했다.

“황금철장 장주십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도쿠가와 신켄이 마차에서 내려 경비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황금철장 장주?”

이철석은 황금철장이 어떤 문파인지 기억해 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황금철장이란 무림 문파가 떠오르지 않았다.

“네.”

“실례지만 어디에 있는 무림 문파인지…….”

이철석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금철장은 무림 문파가 아니고 낙양에 있는 대장간 이름입니다.”

“……씨펄!”

이철석은 욕설을 내뱉었다.

황금철장이란 문파를 알아보지 못해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은 급격하게 경멸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대장장이를 신분이 높은 자로 착각하고 공대를 한 사실이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운성에서 온 서찰을 보여 드려야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철석의 얼굴에서 비웃음을 발견한 도쿠가와 신켄이 물었다.

“그건 필요 없고 안에 있는 사람만 확인하면 되오.”

이철석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장주께서 내려야 합니까?”

도쿠가와 신켄은 다시 물었다.

“장주뿐만 아니라 마차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내려야 하오.”

원래는 운성을 찾아온 손님에게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이철석이 마차 안에 탄 사람을 모두 내리라고 한 것은 배알이 뒤틀려서다.

관리도 아니고 무림 세력의 수뇌도 아닌 하찮은 대장장이에 불과한 자가 마차를 타고 거들먹거리는 게 꼴 보기 싫었고, 마차만 보고 고관대작일지도 모른다고 미리 확정해 버린 자신은 더욱 싫었다.

벌컥!

마차 문이 열리고 남녀가 내렸다.

두 사람은 금장생과 불여하였다. 낙양으로 가서 황금철장에 들렀다가 운성에서 초대장이 왔다는 소식을 류로부터 들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도쿠가와 신켄에게 연락을 해서 바로 이곳으로 왔다.

“둘이 전부?”

이철석은 금장생과 불여하를 빤히 보았다.

그의 시선은 특히 불여하에게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인시가 되면서 피부가 밝아지긴 했지만 피부는 여전히 연한 갈색이고 푸른 눈동자와 이국적인 얼굴이 눈길을 끌었다. 아니 이철석의 생각에 대장장이가 거느리기엔 너무 과분한 여자였다.

“우리가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금장생이 물었다.

“그건 뭐지?”

금장생 허리춤에 걸린 박도를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금장생은 박도를 풀어 이철석에게 내밀었다.

“그따위 쓰레기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집어넣어.”

“이거 괜찮은 무긴데.”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무적검을 허리에 걸었다.

“들어가도 됩니까?”

도쿠가와 신켄이 물었다.

“들어가쇼.”

이철석은 대문 위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잠시 후 커다란 문이 열렸다. 그사이 금장생과 불여하는 마차에 올랐다.

금장생이 탄 곳은 마차 안이 아니라 마부석의 도쿠가와 신켄 옆이었다. 마차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 성벽 아래 뚫린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안내를 맡은 지복성입니다.”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노인이 금장생과 도쿠가와 신켄을 향해 인사를 했다.

“숙소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금장생은 노인을 보며 물었다.

“저기 보이는 건물까지만 가면 됩니다.”

지복성은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기와가 얹혀 있는 다른 건물과 달리 노인이 가리킨 건물은 기와가 없었다. 건물의 색도 검었다.

“다른 건물과 다른 것 같은데, 이유가 있습니까?”

“특별히 검게 지은 게 아니라 너무 오래돼서 검게 보입니다.”

“얼마나 오래됐기에 그런 거죠?”

“언제 지어졌는지 모릅니다. 전설에 의하면 역사 이전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선을 돌려 운성을 살폈다. 운성은 가장 안쪽에서부터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며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운성의 구조를 머릿속에 새겼다.

삼 각 정도를 달린 마차가 삼 층 건물 앞에 멈췄다.

“여기가 세 분이 머무실 곳입니다.”

“오늘 나가는 게 아니었나요?”

건물이 숙소처럼 보이자 금장생이 물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그렇군요.”

“마차는 저기에 두시면 됩니다.”

지복성은 마당 한편을 가리켰다.

말과 마차를 보관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으로 마차를 몰고 가서 세워 놓고 지복성 곁으로 갔다.

지복성은 금장생 일행을 데리고 일 층 안쪽으로 갔다.

“여기 두 개를 사용하면 됩니다.”

지복성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방 두 개를 가리켰다.

“친절하게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지복성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저는 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럼 쉬십시오.”

지복성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금장생과 불여하는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약간 고급 객잔처럼 침실과 응접실로 구성돼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금장생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운성에서 사람이 온 건 한 시진 후였다.

저녁 식사 초대였다.

금장생과 불여하는 밖으로 나왔다. 사방은 캄캄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숙소에서 한 식경 정도 걷자 불이 환하게 밝혀진 건물이 나왔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있는 것 같죠?

불여하가 전음으로 물었다.

―모두 강한 무인들입니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기세가 감지될 정도면 강자들이란 뜻이었다. 금장생과 불여하가 도착하자 문이 열렸다.

‘많네.’

금장생은 살짝 놀랐다. 자신이 알기론 운성 성주 철전혼은 풍찬노숙 중이다. 그런데 운성에서는 수십 명이 모여 연회를 벌이고 있다. 물론 잔치 수준은 아니지만 최고 권력자가 외부에서 고생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다.

금장생과 불여하가 들어서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흠! 당신은 역시 너무 예쁜 게 문제예요.

―머리카락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머리를 왜 잘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죠?

―환속한 스님이라고 하세요.

―화, 환속한 스님?

―네.

―그건…….

“하하하! 어서 오게.”

철검우가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금장생과 불여하를 향해 갔다.

“나는 운성의 차기 성주 철검우네.”

철검우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장생입니다.”

금장생은 철검우의 오른손을 살짝 잡았다.

“이분은…….”

철검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까이서 본 불여하가 너무 아름다웠던 탓이었다.

“제 부인입니다.”

“아! 그렇구먼. 자넨 엄청난 미인을 부인으로 얻었구먼.”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로 자넨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물불을 안 가리고 쟁취하는 성격입니다.”

“그건 나와 비슷하구먼.”

“나는 미인을 얻었지만 성주님은…… 아, 죄송합니다. 소성주님은 그렇지 않죠.”

“고로 자네가 더 낫다?”

“미인을 얻는 능력만 그렇다는 겁니다.”

“하하하! 그건 인정하겠네. 자네 부인은 내가 본 여자들 중 최고네.”

철검우는 엄지손가락을 추어올려 금장생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대장장이인 절 부른 건…….”

금장생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먼저 우리 동료들을 소개시켜 주겠네.”

철검우는 금장생과 불여하를 노인 곁으로 데리고 갔다. 검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뿌리는 걸로 보건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검객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철선문鐵仙門 문주 철선검객鐵仙劍客 부양호 대협이네.”

금장생은 과거 천객 일호일 때 암기했던 기록을 떠올렸다.

철선문

하남성 북부 안양 소재.

문주는 철선검객 부양호. 부양호는 일류검객으로 불러도 손색없다. 약점은 문란한 성생활. 상당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 매일 밤 그의 방으로 들어가는 여자는 세 명이다. 여자들과 밤새 관계를 갖고 아침이면 녹초가 돼 잠든다.

따라서 부양호를 없애려면 관계를 갖고 난 새벽을 노려야 한다.

“반갑습니다, 장생입니다.”

금장생은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반갑네. 부양호네.”

부양호 역시 포권을 취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철검우는 곧바로 자리를 옮겼다.

“이 사람은 벽운관의 관주 뇌마신군 벽운양이네.”

그는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중년인을 소개했다.

금장생은 기억을 더듬었다.

벽운관은 하남성 북서부 심양에 있는 무림 문파다. 벽운관의 가장 큰 특징은 화탄의 일종인 벽력탄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벽운관의 모태는 운벽가다.

운벽가는 군에 소속돼 화탄을 만들어 납품하였는데, 그 기술을 바탕으로 벽력탄 제조에 성공한다. 화탄 제조 기술이 절정에 이를 즈음 무림 문파를 세우는데 그 문파가 바로 벽운관이다.

“장생입니다.”

금장생은 포권을 취하며 벽운양을 살폈다.

얼굴은 둥글고 중간 키에 통통한 자였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손이었는데 갈색과 흰색이 뒤섞여 있었다. 화기를 다루는 자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세 번째로 소개를 받은 자는 하남성 동부 복양에 있는 백호당 문주 지중천이었다. 당당한 체격은 철호鐵虎라는 별호에 어울렸다.

“이 사람은 신주의선가 가주 천수신의天手神醫 황보충 대협이네.”

철검우는 육십 대 후반의 노인을 소개했다.

“처음 뵙습니다, 장생입니다.”

금장생은 인사를 했다.

그가 알기로는 신주의선가는 무림과 상관없는 의원이다. 그런 곳마저 운성 휘하일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소개받은 사람 중에 가장 강자인 것 아요.

황보충을 살피던 불여하가 전음을 보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금장생도 같은 생각이었다. 황보충은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초극 강자였다.

‘저 정도면 나와 여하가 무공을 익힌 사실을 알아차릴 텐데.’

지금 금장생과 불여하는 대부분의 내공을 숨기고 반 갑자 정도만 드러낸 상태다. 이 안에 있는 자들 중 아직까지 알아본 자는 없었다. 그런데 황보충은 알아차릴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굉장한 검을 가지고 있군요.”

황보충이 금장생의 박도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끙!’

금장생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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