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66)
“혹시 제 머리카락이 빠진 것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진작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말을 하지 않은 거죠?”
“그건 나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게 반복된다는 건데요?”
“이별요.”
“제가 먼저 떠날까 봐서요?”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은 다시 겪고 싶지 않으니까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이 아니라 불여하는 무조건 먼저 죽는다. 그녀가 수명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신족보다 오래 살 수는 없다. 언젠가는 그녀를 잃게 될 테고 견딜 수 없는 슬픔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전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문득 자신의 전생이 루하였다는 걸 알기 전에도 극구 혼인을 꺼렸던 이유가 불여하와의 이별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여하는 물론이고 자식들과 헤어졌던 기억은 머릿속 어딘가에 숨겨진 채 저장돼 있다가 혼인에 대한 부적정인 사고를 키운 게 분명하다.
“하지만 당신은 익숙해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불행할 거예요.”
금장생은 신족 최고 신분이고 수명은 오천 년이다. 그동안 얼마나 살았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오랜 세월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세월을 견디며 살기 위해서는 이별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겠죠.”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볼래요?”
“어떻게요?”
“오늘만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세요?”
“얼마든지 가능해요. 왜냐면 제가 그렇게 살고 있거든요. 저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하늘에 감사해요. 저뿐만 아니라 일곱 분도 그럴 거예요. 왜냐면 우리는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조금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그리고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면 내일 아침 해를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해요. 처음엔 기도가 무척 간절했어요. 잠을 자는 게 무섭기도 했고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가 ‘일어나지 못하면 또 어때? 지금까지 잘 살았잖아.’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마음이 편해졌어요. 더군다나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과거의 남편까지 만났잖아요. 수천 년 만에 만난 남편과 헤어지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 또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난 뒤에는 잠자리로 드는 게 더 이상 무섭지 않았어요.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당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불여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렸다.
눈물은 금장생의 얼굴로 뚝 떨어졌다.
금장생은 불여하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얼굴이 금장생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노력해 볼게요.”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하고는 입을 맞췄다.
멈췄던 열풍이 다시 불었다.
호수 옆에서 밤을 보낸 두 사람은 다음 날 새벽에 길을 떠났다. 두 사람이 복우산과 웅이산이 만나는 지점에 도착한 건 이틀 후였다.
금장생과 불여하는 산 아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봉우리 위에 섰다.
두 사람의 눈에 수백 채의 고루거각이 들어왔다.
“저기가 어디죠?”
불여하는 금장생이 저 아래쪽에 보이는 고루거각을 목표로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운성雲城입니다.”
“아!”
불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요.”
“저기로 갈 거예요?”
불여하는 운성을 가리켰다.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냥 들어간다고 하면 들여보내 줘요?”
“그렇진 않을 거예요.”
“그럼 어떻게 들어갈 거죠?”
“이제 찾아봐야지요.”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 * *
운해평雲海坪.
복우산 북쪽 끝자락과 웅이산 남쪽 끝자락이 만나는 부분에 거대한 평원의 이름이다. 그 운해평의 가장 안쪽에 남북 수십 리에 달하는 성벽이 세워져 있다. 만리장성을 축소시켜 놓았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곳을 소장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성벽이 만들어진 유래가 몇 가지 내려오는데, 그중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건 고대에 하남성을 장악했던 거대 가문이, 방어를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다. 거대 가문이 어딘지, 누구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다만 고대 가문의 한 곳이란 것만 전해져 내려왔다.
운성이 그곳에 똬리를 튼 것은 백 년 전이었다.
하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발전을 시작한 건 오십 년 전 육문 성주 때부터였다. 사교성이 좋았던 육문 성주는 무림의 많은 문파나 인사들과 교류를 가졌고 그 결과 유능한 무인들을 영입할 수 있었다. 육문 성주가 관심을 가졌던 또 다른 분야가 무공 수집이었다. 그는 광적이라고 할 정도로 무공 비급을 수집했다. 어딘가에 유명한 무인의 무공이 나타났다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획득하여 운성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해서 비고에 비급이 쌓이자 더 많은 무인들이 모여들고 강해진 운성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강한 문파로 강한 무인이 모여드는 건 강호무림의 생리였다. 어느새 운성은 하남성을 완벽하게 장악하였고 철전혼 성주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직사각형의 탁자는 긴 변이 이 장이고 짧은 변은 일 장 반가량 됐다. 약간 붉은빛을 띠는 나무는 쇠처럼 단단하면서도 은은한 열기를 뿜어낸다는 열화신목이었다. 탁자 표면에는 복잡한 뭔가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건 바로 중원 전도였다.
탁자를 중심으로 모두 일곱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차를 마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기운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는 이들은 운성의 수뇌들이었다.
상석에서 좌우측에 앉은 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삼십 대 중반 사내는 성주 철전혼의 아들 철검우였다.
철검우의 가장 큰 특징은 큰 키였다. 키는 거의 팔 척에 달했고 눈은 부리부리했다. 어깨는 넓고 가슴은 떡 벌어졌으며 다부져 보인다.
철검우는 전형적인 호상虎像의 사내였다.
상석의 철검우를 중심으로 오른편에 세 명, 왼편에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오른편 맨 앞에는 육십 대 중반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이웃집 할아버지를 보는 것처럼 인상이 온화했다. 키는 아주 작아 오 척에 불과했다. 무인의 기질이 전혀 풍기지 않는 이자는 문룡文龍 공손보기다.
공손보기는 운성의 군사로 적룡 철전혼과 함께 운성이룡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철전혼이나 공손보기 둘 중 한 사람만 없었어도 운성은 춘추오패가 되지 못했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나이를 먹어 감이 많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여전히 운성의 기둥이었다.
공손보기 건너편에는 삼십 대 중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남궁창하로 부성주 남궁무위 아들이었다. 남궁창하는 일찍부터 뛰어난 머리를 인정받아 차기 군사로 거론되는 인재였다.
남궁창하의 가장 큰 단점은 남을 잘 인정하지 않는 오만함인데, 많은 이들은 그러한 성격은 나이를 더 먹으면 고쳐질 거라고 생각한다.
공손보기 오른편에는 철검우보다 더 덩치가 커 보이는 자가 앉아 있었다. 구레나룻을 기른 이자는 묵운각의 각주 염마도閻魔刀 여강이었다. 여강 오른편에는 팔다리가 유난히 길고 키가 크며 왜소한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그는 적운각 각주 암뢰비도暗雷飛刀 사공표였다.
염마도 여강 건너편에는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어지간한 남자보다 키가 더 큰 이 여자는 백운각 각주 일소천화검一笑天花劍 염소홍이었다. 염소홍 옆에 앉은 음침한 인상의 사내는 귀영조鬼靈爪 용백으로 연운각의 각주였다.
군사 공손보기를 제외한 여섯 명은 모두 성주 철전혼의 제자였다. 여강 일행의 나이가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각 각의 각주라는 중책을 맡은 건 철전혼의 결정이었다.
운성은 무림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식이라고 해서 성주 자리를 물려줄 수가 없었다. 제자들 중 가장 접합한 인물을 뽑아 성주에 앉히는 게 관례였다. 철전혼 또한 그렇게 해서 성주가 됐다.
철전혼의 여섯 제자는 모두 차기 성주 후보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철전혼이 각 각의 각주로 여강 일행을 앉힌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아들인 철검우에게는 소성주라는 직위를 내렸다. 소성주는 성주가 자리를 비울 때나, 와병 등 특별한 이유로 업무를 볼 수 없을 때 성주를 대신하는 자리였다.
아들에게 운성을 물려주기 위한 포석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없었다.
오늘 회의도 철검우가 성주 대행의 권한으로 소집했다.
“내가 회의를 소집한 건 근래 강호무림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요.”
철검우는 진짜 성주가 된 것처럼 말했다.
“특이한 징후라도 감지한 겁니까?”
공손보기가 물었다.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건 철이 부족한 것 말고는 별다른 징후는 없소.”
“철이 부족하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공손보기가 다시 물었다.
“혹시 나이 때문에 귀에 이상이 생긴 거요?”
철검우는 공손보기를 빤히 보며 물었다.
“제 귀는 이상 없습니다, 소성주.”
“나는 철이 부족하다고 했소, 군사.”
“그게…….”
공손보기는 말끝을 흐렸다.
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면 이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왜 철이 부족하다고 하는지 그게 알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철검우는 군사가 그런 것도 파악하지 않고 뭐 했냐는 듯 힐난하고 있다.
하급 기관에서 올라온 정보가 군사인 자신을 통해 소성주에게로 올라가면 철이 부족한 이유를 파악하고 있겠지만, 현재 운성의 보고 체계에서 군사인 자신은 배제돼 있다. 설사 철이 부족한 이유가 보고서로 작성돼 올라왔다고 해도 자신이 알 리가 없다.
철검우에게 힐난받을 상황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가 철광석을 모두 사들여서 우리 운성 창고가 텅 비었다는 말입니다.”
철검우 대신 남궁창하가 말했다.
“철광석을 누가 사 갔는지는 알아냈는가?”
공손보기는 물었다.
“황금철장 주인이라고 하더군요.”
“황금철장은 하남성의 모든 대장간을 거느린 곳인데…….”
공손보기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요?”
철검우가 의아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얼마 전 황금철장의 주인이 하남성에 있는 모든 대장간을 인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남성 모든 대장간의 주인은 한 사람이라는 거요?”
“그렇습니다.”
“으음!”
철검우는 남궁창하를 보았다.
“거기까지는 아직 파악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남궁창하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됐네. 그보다 각 문파에서 연락은 왔는가?”
“모두 참석하겠다는 회신이 왔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철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알면 안 되는 일입니까?”
공손보기가 철검우를 보며 물었다.
“내가 말 안 해 줬소?”
“무슨…….”
“말을 해 준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구려.”
“무슨 일이 있습니다.”
“거창한 건 아니고 운성총회를 개최하기로 했소.”
철검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운성총회요?”
공손보기의 눈이 커졌다.
운성총회는 하남성에 있는 운성 휘하 모든 문파 문주들이 운성으로 들어와 회의에 참석하는 걸 말한다. 운성총회는 부모가 돌아가신다거나 하는 정도의 큰일이 아니면 불참이 허락되지 않는 중요한 회의다. 그러다 보니 연초와 구양절 두 번만 개최한다.
그런데 철검우가 시기도 아닌데 운성총회를 개최한다며 각 문주를 부른 모양이었다.
성주도 없는 상황에서.
“강호무림이 어수선하지 않소.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도 없고. 이런 때일수록 동맹을 견고하게 해 놓아야 할 것 같아서 운성총회를 개최하기로 한 거요.”
“운성총회 개최는 성주님 권한인 걸로 압니다.”
“그래서 난 자격이 없다는 거요?”
“자격이 없다는 게 아니라 각 문파 문주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자들이 감히 운성에서 하는 일에 반감을 갖는단 말이오?”
철검우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아니라…….”
공손보기는 말끝을 흐렸다. 어휘 선택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중요한 총회라면 성주님이 계실 때 개최하면 소성주의 권위가 더 살지 않겠느냐고 했어야 했다.
“어떤 자가 반감을 갖는지 총회에서 보면 알게 되겠지. 남궁 군사는 들으시오.”
철검우는 남궁창하를 대놓고 군사라고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소성주님.”
“황금철장 주인에게 모레 여기로 오라고 하시오.”
“만나 보시겠습니까?”
“철광석이 아예 없다고 하지 않았소?”
“구하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전에 구입할 때보다 열 배 이상 비쌉니다.”
“일단 그자를 데리고 오시오. 이왕이면 부인도 동반하라고 하시오.”
“알겠습니다.”
“참! 각 문파 문주들에게도 가족을 동반하라고 했소?”
“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족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잘했소.”
철검우는 흡족하게 웃었다.
‘으음!’
공손보기는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가족까지 대동하라고 했다는 건 현 문주뿐만 아니라 차기 문주들에게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겠다는 의도다. 아무리 차기 성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해도 아직 성주가 정정한 상황에서 너무 앞서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