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461화 (461/524)

황금가 (461)

역사 속으로

“말도 안 돼.”

상처기는 넋을 잃었다. 적이 강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건 강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들은 강한 무인이 아니라 절대자였다.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 그대로 있을 겁니까?”

금장생은 상처기를 보며 말했다.

“난…….”

상처기는 뒷걸음질 쳤다.

부하들이 죽었다고 자신까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살아서 복수를 해 주는 게 상관의 도리라는 생각이 뇌를 지배했다.

“결코 잊지 않겠다, 놈!”

상처기는 뒤돌아 몸을 날렸다.

퉁!

바로 그때 시위 놓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상처기는 곧바로 바닥을 찼다.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슈아악!

“허억!”

상처기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허공으로 솟구친 순간 반투명한 물체가 날아오는 걸 발견한 탓이다. 그것은 바로 검각 문도가 생성해 낸 기검이었다. 원래 기검의 목표는 상처기 뒤에 있는 금장생이었다. 상처기의 머리 위를 지나쳐 아래로 내리꽂힐 참이었는데 상처기가 몸을 띄우는 바람에 그의 몸으로 틀어박혀 버린 것이다.

퍼어!

“크악!”

상처기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목 바로 아래쪽에 커다란 구멍이 난 상처기는 전면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멍한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던 상처기가 전방으로 처박혔다.

“차하!”

금장생은 전력을 다해 전방으로 내달렸다.

그가 달려가자 조금 전 생성해 두었던 역장도 덩달아 앞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금장생과 불여하의 시야에 적이 들어왔다. 이검대 소속 일백 명이었다.

금장생과 불여하가 다가왔지만 이검대 대원들은 긴장하지 않았다. 상처기 일행과 마찬가지로 이검대 대원들은 금장생과 불여하가 자신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검을 날리지 못하도록 해야 해요.

금장생은 불여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알았어요.

불여하는 활을 옆으로 눕혀 시위를 당겼다.

활이 만곡으로 휘어지자 기시가 생겨났다. 기시는 총 넉 대였다.

파앙!

시위를 놓자마자 다시 당겼다가 놓았다. 이번에도 역시 네 발이었다.

파앙!

총 여덟 대의 기시가 허공을 갈라다.

그리고 곧이어 세 번째 기시도 허공을 갈랐다. 세 번째 시위를 놓는 동안에도 첫 번째 쏜 기시 넉 대는 아직 적의 몸통을 뚫지 않은 상태였다.

네 번째 시위를 당길 때 비로소 처음 쏜 기시가 적의 몸통을 뚫었다.

“커억!”

“크윽!”

“으윽!”

“억!”

이검대 대원들은 비명과 함께 풀썩풀썩 쓰러졌다.

“이건?”

방두만은 질겁했다.

그는 불여하가 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쏘는 걸 빤히 지켜보았다. 화살은 자신들이 있는 곳까지 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할된 공간을 뚫고 들어와 문도의 몸통에 틀어박힌 것이었다.

퍽! 퍽퍽! 퍽퍽! 퍽퍽!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에도 화살은 쉬지 않고 날아와 검각 문도의 숨통을 끊었다.

“지, 진형을 풀고 공격하라!”

방두만은 버럭 소리쳤다.

“이미 늦었습니다.”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금장생이 들이닥쳤다.

금장생은 철검무적검해를 펼쳤다.

“크아악!”

“아악!”

“으아악!”

무적검은 가차 없었다. 달려드는 검각 문도들을 잔인하게 도륙했다.

퍽! 퍽퍽! 퍽!

불여하의 화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검각 문도의 검을 피하며 화살을 쏘았다. 그녀가 화살을 쏘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손의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다. 시위를 당겼다가 놓으면 어김없이 검각 문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녀가 이렇듯 활 쏘는 속도가 빠른 건 화살을 뽑지 않고 시위만 당기기 때문이었다. 활을 쏠 때 가장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건 전통에서 화살을 꺼내 활시위에 걸 때까지다. 그런데 그녀는 기시를 쏘기 때문에 전통에서 화살을 뺄 필요가 없다. 당겼다가 놓으면 된다.

당연 빠를 수밖에 없었다.

일백 명이 죽임을 당하는 데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방두만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문도들과 함께 죽기보다는 진식이 무용지물이란 사실을 문주께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각 후 그는 오검대 대원과 문주 평천일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냐?”

평천일은 의아한 얼굴로 방두만을 보며 물었다.

“모두 당했습니다.”

“누가 당했다는 거냐?”

“삼검대와 제가 지휘하던 이검대까지 모두 당했습니다. 생존자는 저뿐입니다.”

“…….”

평전일은 할 말을 잃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삼검대와 이검대는 검각의 기둥이다. 그들이 무너졌다는 것은 곧 검각의 몰락을 뜻한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물었다.

“그자들이 그렇게 강했단 말이냐?”

“강한 것도 강한 거지만 그들에게는 진식이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진식이 무용지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여자가 우리를 보며 활을 쐈는데 공간을 건너뛰고 문도들 몸에 박혔습니다. 저는 화살이 공간을 건너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고 막을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각 조에서 한 명씩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기검을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각 조별로 한 명씩 살해한 게 분명합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화살뿐만 아니라 놈들도 공간을 건너뛰었단 말이냐?”

“네.”

방두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천일은 영호정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놈은 진식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습니다.”

영호정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직접 부딪쳐 싸우는 수밖에 없겠구먼.”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지.”

평천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금장생과 불여하가 나타났다.

“응?”

평천일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금장생과 불여하가 다가오자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대기가 변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금장생은 멈춰 선 채 평천일을 보았다.

“내가 보이느냐?”

평천일은 물었다.

“잘 보입니다.”

“으음!”

평천일은 신음을 내뱉었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질문에 바로 대답을 한다는 건 잘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공격을 하는 게 아니라 검각에서 우리를 없애려고 하는 것 같던데,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가요?”

“…….”

평천일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신은 검각을 침입했소.”

대답한 사람은 영호정이었다.

“나는 검각 문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당신네들은 방문 목적도 묻지 않고 바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요?”

영호정은 다시 물었다.

―무슨 짓인가, 부문주.

영호정이 협상을 시도하려는 것처럼 보이자 평천일이 엄하게 소리쳤다.

―이미 우린 문도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문주님. 싸움을 계속하면 전멸뿐입니다.

―그렇다고 항복을 하자는 건가?

―항복이 아니라 협상을…….

―그만두시오!

―문주님.

―웃음거리가 되는 건 한 번으로 족하오. 그리고 나는 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소.

―우리를 감싼 이건…….

영호정은 말끝을 흐렸다.

금장생이 만든 역장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꿀꺽 삼켰다. 평천일의 결심은 완강했다. 어떤 말을 해도 싸울 게 분명한데 굳이 역장 이야기를 해서 사기를 꺾을 필요가 없었다.

“사실 방문하려고 했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금장생이 말했다.

“그건 무슨 소리냐?”

“내가 황산에서 북진하다가 여기로 방향을 잡은 건 해림의 오른팔을 잘라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를 없애는 게 목적이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왕 없애는 거, 완전하게 지워 버리기로 했습니다.”

“우린 원수지간이 아닌 걸로 아는데…….”

“왜, 일벌백계란 말이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우린…….”

“일종의 예시가 되는 겁니다. 춘추오패 편에 서서 우리를 적대시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 보여 주는 보기 같은 거죠.”

“죽일!”

평천일은 부르르 떨었다.

“귀하도 날 잡아서 춘추육패가 되고 싶어 했으니까 피장파장 아닌가요?”

“우리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놈.”

“맞아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당신네들과 나 둘 중 한쪽이 사라져야 이 싸움이 끝나게 되겠지요.”

금장생은 무적검을 들어 평천일 일행을 겨냥했다.

“오세요.”

내기를 주입하자 무적검이 부르르 떨었다.

평천일은 금장생이 들고 있는 박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인이 드는 무기라고 하기엔 너무 볼품없다. 무기를 두고, 다 같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물건인데 굳이 멋지게 만들 필요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평천일은 이왕이면 멋진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무기는 늘 지니고 다니며 잠을 잘 때도 곁에 둔다. 어떤 경우에는 얼굴보다 무기를 더 기억하기도 하다. 무기는 무인인 자신의 분신이다.

목에 거는 목걸이나 귀걸이, 팔찌와는 다르다. 그것들은 지겨우면 바꿔 찰 수도 있지만 무기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걸로 하나만 평생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 늘 지니고 다니면서 외부에 노출되는 물건이라면 볼품없는 것보다 멋진 게 낫지 않을까.

물론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는 가정하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저 무기는 너무 형편없다.

마치 만들다가 쇠가 부족해 그만둔 것처럼 짧고 폭은 넓다. 균형감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냥 대충 두들겨 만든 도. 지급받는 게 아니라면 절대 들지 않는 검. 그래서 병사들만 드는 무기.

박도에 대한 평천일의 평가는 그 정도다.

그런데 상대가 박도를 들었다. 이제 막 무림에 출두하여 검을 살 돈이 없다면 박도를 든 무인을 이해할 수 있다. 쓸 만한 검은 상당한 금액을 지불해야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앞에 서 있는 자는 검각 문도 수백 명을 없앤 절대 고수다. 한 세력의 수장이기도 하다. 검을 살 돈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깔려 죽을 정도로 돈이 많은 거부와 소면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저자와 박도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

“그 박도…… 어디서 난 거냐?”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고 해도 이 질문은 해야 했다. 어쩌면 검천자 육성우 사조의 비전을 찾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 검의 출처가 중요한가요?”

“만일 네가 아무런 말도 없이 죽어 버리면 우린 오백 년 동안 찾아 헤맸던 검천자 사조님의 무공을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중요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렇군요. 이 검은 아주 중요한 거군요.”

“그게 검이란 말이냐?”

“생긴 건 박돈데 등에 날이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검이 맞습니다.”

“그건 가져온 거냐?”

평천일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여기서 얻었습니다.”

“아!”

평천일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질문을 했다.

“육성우 사조님의 무공은 얻었느냐?”

“그의 무공은 익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익힌 건 철검무적검햅니다. 검천무적마해도 익히고 싶었지만, 검각을 세운 사람의 무공으로 그의 후예를 없앤다는 건 좋은 모양새가 아닌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알고는 있다는 말아구나.”

“네 구결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각 문도 진영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통탄할 일이구나.”

평천일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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