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59)
“그게 무슨 뜻인 것 같소?”
평천일은 조금 전 동쪽을 맡았던 이악소의 말을 떠올렸다. 이악소가 맡은 방향에서 상대한 자는 팔왕이었다. 이악소는 팔왕이 철검을 들었다고 하였고 검각 문도를 공격할 때 철상의 자세를 취했다고 하였다.
철검과 철상의 자세. 그 두 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그자가 검총만상대진의 비밀을 풀었을 거라고 보십니까?”
영호정은 되물었다.
“우리 문도들 중 철상의 자세를 모르는 문도는 한 명도 없네. 어쩌면 철상을 제작한 칠검존보다 더 자세하게 알지도 모르네. 이악소가 팔왕이 검법을 펼칠 때 취한 자세가 철상과 비슷하다고 했네.”
“하지만 무적검은…….”
“철검이란 말을 듣자 문득 무적검은 우리나 혹은 강호 무인들이 만들어 낸 말일 뿐이고 철검자 나욱은 철검이라고 했을 거란 생각이 들던데, 부문주는 안 그렇던가?”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영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악소는 처음엔 철검이라고 했다가 나중엔 박도라고 정정했다. 하지만 철검을 들고 철상의 자세를 취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받은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아울러 철검무적검해와 철검자라는 두 가지에 나온 철검은 군에서 흔히 사용하는 박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 때문에 오백 년 동안 무적검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다. 시작이 잘못됐는데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리가 없다.
“문제는 철검이 무적이 맞는지 하는 거구먼.”
“그건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만일 놈이 철검무적검해와 검천무적마해 중 하나라도 얻었다면 반드시 회수해야 하네.”
평천일은 단호한 얼굴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영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천일은 뒤편에 서 있는 검각사노를 돌아보았다.
“하명하십시오, 문주.”
시선이 마주치자 춘설일검 이육노가 말했다.
“오검대를 데리고 나를 따라오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이육노는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평천일과 영호정과 오검대 대원 일백 명은 안개를 헤치고 내달렸다.
* * *
먹구름 아래에서 검은 점 수백 개가 배회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먹이를 찾는 까마귀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밤새 철새 도래지를 찾아온 철새 같기도 했다. 그들 중 수십 개가 지상 가까이 내려왔다. 그러자 비로소 확실한 정체가 드러났다.
좌우측에 두 개씩 총 네 개의 날개를 지닌 신족이었다. 날개 표면에서는 황금색 광채가 은은하게 흘렀다. 은은한 황금색 광채와 네 장의 날개는 이들의 신분이 중급임을 뜻했다.
아래로 내려온 자들은 능천일대 대원들이었다.
대주 천검신노 이약선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래를 훑었다. 하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건 짙게 낀 운무뿐이었다. 운무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곳에서는 알 수가 없다.
그는 다시 날갯짓을 해 수평으로 날았다. 운무가 낀 곳은 동서 오 리, 남북 오 리로 상당히 넓었다.
반 시진 전에 운무 안쪽으로 부하 열 명을 들여보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진식이란 소린데…….”
계속 날아가던 이약선의 눈에 절벽처럼 뚝 끊긴 운무가 들어왔다. 마치 누군가가 칼로 잘라 낸 것처럼 운무가 절벽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운무의 높이는 이십 장이다. 부하들에게는 이십 장을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가 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런데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건 진식의 방해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절벽 형태의 벽을 바라보다가 날갯짓을 했다. 그의 신형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오십 장 높이에서 카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느냐?”
카단은 물었다.
“현재로선 운무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저 운무가 진식에 의해 생성된 거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그렇겠지. 아무튼 계속 살펴라.”
그는 자리를 뜨며 말했다.
잠시 후 그는 검각에 도착했다. 검각의 각 건물들은 진식과 상관없는 듯 어둠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가장 높은 건물의 맨 위층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곳은 검각 문주 평천일의 집무실이었다. 그곳에서 좌무백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팔왕을 쫓는 각 세력에서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기 위함인 듯 창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어떠냐?”
카단이 들어오자 좌무백이 물었다.
“현재로선 진식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부하들은 들여보내 보았느냐?”
“네. 열 명을 들여보냈는데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이거 받아라.”
좌무백은 종이 한 장을 카단에게 던졌다.
카단은 종이를 잡아챘다.
“무림오패 배치도다. 팔왕이 밖으로 나오면 가장 가까이 있는 세력에 연락을 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카단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카단이 나가자 좌무백은 몸을 돌렸다. 뒷면 벽에는 중원 전도가 걸려 있었다. 무림 지도인 듯 무림의 각 세력이 검게 칠해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검각으로 향했다. 팔왕 일행이 만일 검각에서 살아 나온다면 어디로 갈지 경로를 예상해 보았다.
“사천이나 운남인가?”
좌무백은 금장생이 아무런 이유 없이 남쪽을 택한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의 시선이 지도를 훑었다. 그러다가 한곳에 멈췄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사천의 환수각과 운남의 마원이었다.
“가서 철전혼과 천파를 불러와라.”
밖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가 철전혼과 천파를 더 신뢰하는 건 남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 신족 장로였을 때부터 중요한 일은 남자에게만 맡겼고 그 습관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자는 집안일만 잘하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옥천환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부르지 않은 건 원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네.”
대답이 들려오고 자리를 뜨는 기척이 들렸다.
철전혼과 천파가 들어온 건 한 식경이 조금 더 지나서였다.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놈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좌무백은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북서쪽으로 가면 사천이고 귀주성을 지나면 운남입니다.”
철전혼이 대답했다.
“환수각과 마원 중 둘 중 한 곳을 노리고 있다는 거냐?”
“지금 그놈이 싸우고 있는 검각은 해림의 산하단쳅니다. 물론 파운양이 림주로 있을 때 맺어진 협정이긴 합니다만.”
“놈이 검각을 공격하는 이유가 해림 때문이란 말이구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철전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벌써 전쟁을 시작했구나, 루하.’
좌무백은 내심 중얼거렸다.
상대가 마가의 마왕이라면 전쟁보다는 가문으로 돌아가기 위한 행보 쪽에 더 무게를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하라면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루하는 팔왕 자리를 놓고 라헬과 비무를 했다. 승자는 패자를 부하로 부릴 수 있는 비무였다.
정확하게 비무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옆에서 보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살려 주려고 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전력의 누수를 가져올 수도 있는 상황을 무시하고 라헬을 없애 버렸다.
그로 인해 루하의 의도는 분명해졌다.
그는 강호무림엔 관심이 없다. 그의 목적은 복수다. 겉모습은 어수룩하게 보이지만 실제 루하는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의 성격상 복수를 하려고 했다면 대충 끝낼 리가 없다. 주변을 완벽하게 정리하고 나서 황실로 쳐들어올 게 분명하다.
검각을 없애는 것 또한 가지치기의 일종이다.
“검각 서쪽에서부터 사천으로 이어지는 천라지망을 구축하라!”
좌무백은 두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나가 봐라.”
“네.”
두 사람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철전혼과 천파가 나가자 좌무백은 명령서를 작성하여 세 세력으로 보냈다.
차를 다 마신 그는 창가로 갔다.
침묵 같은 어둠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의 어둠이 더 짙게 보이는 건 검각 입구에 구축된 진식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넌 죽는다, 루하.”
좌무백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 *
일검대는 가장 많으면서 무공은 가장 약하다.
일검대에서 가장 강한 문도의 공력이 반 갑자 정도다. 이검대는 일검대보다 약간 강하고 공력은 반 갑자에서 일 갑자 사이다. 삼검대는 삼백 명이지만 대부분은 공력이 일 갑자를 넘는다. 일 갑자 공력을 지닌 무인을 강호무림에서는 일류라고 부른다.
일류는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무인임을 뜻하고, 어떤 문파로 가더라도 신분만 확실하면 받아 주기 때문에, 무인 성공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아울러 제대로 된 문파 대접을 받으려면 일류 무인을 백 명은 거느리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검각은 일류 이상이 육백 명이 넘는다. 그러다 보니 검각 문도들의 자부심은 대단하고 그 자부심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불굴의 투지로 이어졌다.
일검대와 이검대 팔백 명이 몰살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검각 문도들이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건 바로 그 자부심 때문이었다.
이검대에서 삼검대로 바뀌었지만 공격 방식은 그대로였다. 네 명은 동서남북 각 방위에 앉고 한 명은 한가운데 자리했다.
네 명의 정수리에서 투명한 기운이 솟구치고 그것들은 한가운데 앉은 자의 머리 위쪽으로 가 검 형태를 이루었다. 그런데 검의 크기는 일검대와 이검대가 만들어 놓은 것처럼 크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 검보다 더 작은 이 척에 불과했다. 하지만 풍기는 기운은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강했다. 상처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삼검일대 일백 명은 다섯 명씩 스무 개 조를 이루고 있다. 다섯 개 조는 다시 하나로 묶어 일대에서 사대로 구분했다. 각 대는 일렬로 늘어서 있고 일대는 공격 준비를 마친 상태다. 일대에 속한 다섯 개 조 중앙에 가부좌를 한 문도 머리 위에는 기검이 생성돼 있다.
기검이 내포한 공력은 거의 십 갑자에 이른다.
그의 시선이 전면으로 향했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남녀가 서 있었다. 사내는 박도를 들었고 여자는 활을 들었다. 활을 들기는 했지만 화살은 보이지 않는다.
“너희들이 이걸 받아 낼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상처기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대, 출出!”
이대에 명령을 내렸다.
“추울!”
복창과 함께 이대에 속한 다섯 개 조 문도들이 내기를 끌어 올렸다.
“일대, 발發!”
그들을 지켜보다가 기검이 생성되기 시작하자 일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바알!”
한가운데 앉아 있던 자들이 크게 소리치며 오른팔을 앞으로 쭉 찔렀다.
푸아악!
한 자루 기검이 금장생과 불여하를 향해 쏘아져 갔다.
상처기는 금장생을 노려보았다.
십 갑자의 내공이 실린 상태로 날아가는 기검은 이기어검술로 던진 검이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아니 어쩌면 더 강하고 더 빠를지도 모른다.
파앗!
금장생과 불여하가 오른편으로 이동하는 게 보였다.
“이!”
상처기는 버럭 소리쳤다.
휙!
순간 두 번째 기검이 날아갔다.
한순간에 공간을 건너뛴 기검은 금장생의 몸통을 향해 쏘아졌다.
스윽!
다리를 쫙 벌려 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삼, 사!”
상처기는 다시 소리쳤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명이 오른팔을 앞으로 찔러 넣었다.
푸아악! 푸아악!
기검 두 자루가 전방으로 폭사됐다.
파앗!
금장생은 바닥을 찼다. 그와 불여하는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음!”
상처기는 신음을 내뱉었다. 삼검대가 생성한 기검의 가장 큰 단점은 오직 직진성만 있다는 거였다.
목표물의 움직임을 쫓을 수 있다면 훨씬 강해질 텐데 현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속도는 모든 걸 이긴다. 오!”
상처기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일대에서 생성한 마지막 기검이 공간을 단축했다.
파앗!
금장생은 바닥으로 내려서는 동작으로 기검을 피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팔왕!”
상처기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젠 한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맡기면 된다. 대원들은 오른팔을 빠르게 움직여 검을 조정했다.
“오른편입니다.”
금장생은 왼편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왼편에서 기검 한 자루가 날아왔다.
금장생은 무적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카앙!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기검이 멀리 날아갔다. 하지만 튕겨져 나간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날아왔다.
“찾았나요?”
금장생은 무적검을 위로 걷어 올리며 물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불여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감각을 전방으로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