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57)
무혼의 말을 듣자 부족했던 부분이 비로소 보완되는 듯했다. 뭔가 미진하다고 여겼던 건 하나하나를 별도의 초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공을 운용할 때는 모든 동작을 차례로 혹은 한꺼번에 떠올렸으면서 무공을 펼칠 땐 그것들 중 하나만 꺼내 놓았으니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두 가지 혹은 세 가지를 이어서 펼쳐 보았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씩 펼칠 때보다 두 배 이상 강해졌다는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무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걸 거지고 감사는 무슨.”
무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보다 무 형의 무공은 어떻습니까?”
이왕 시간이 난 거 무공에 대해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했다.
“수라의 무공을 포기하고 천마의 무공을 익혔는데…… 결과적으로는 잘한 것 같아.”
“완전히 폐기했다는 건 아니겠죠?”
버렸다는 표현을 하긴 했지만 한 번 익힌 무공이 없어질 리는 없다. 다만 천마의 무공을 주로 펼친다는 뜻이리라.
“없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만일 손목에 차고 있던 수라를 잃지 않았다면 지금도 수라의 무공을 사용할지도 몰라.”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기회도 없을 것 같은데 무공에 대해 토론이나 한번 해 볼까?”
무혼이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러죠, 뭐.”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잘됐다 싶었다. 자리를 잡고 앉긴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부모님은 잘 계셔?”
역시 오래 산 무혼이 노련했다. 그는 무공 이야기보다 일상을 먼저 꺼냈다.
“다행히 두 분 모두 잘 계십니다.”
“형제는 어떻게 되는데?”
“형이 두 명 있습니다.”
“부모님에 두 형 그리고 돈까지 완벽한 집안이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그래.”
“문제는 당사자들이 느끼는 부족함은 별 차이 없다는 겁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너와 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달라.”
“무 형은 어떻게 살았는데요?”
“철이 들면서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 같은 건 아예 없었어. 하루하루를 견뎠다고 하면 될 것 같아. 내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 같은 걸 해 본 적도 없고. 고래가 들어오면 잘라 주고 일당을 받고, 그 일당을 지키기 위해 선창가 조폭들과 싸우는, 매일매일 같은 일상의 연속이었지.”
“그런데 어쩌다가 무림에 발을 들인 겁니까?”
“그자들이 날 찾아온 거야.”
“그자들이라면?”
“구마라고 불렸던 자들이야. 그들은 당시 마맹의 주인이었어. 그들은 철무황을 맹주로 앉히고 꼭두각시로 부리다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없애 버리고는 그의 사생아였던 나를 찾아낸 거야.”
“무 형의 아버지가 마맹 맹주였어요?”
금장생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삼백 년 전 무림의 주인은 마맹과 무맹이었다. 그중 마맹의 맹주가 무혼의 아버지였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어?”
“주육승 대협 일행과 이야기를 하는 걸 대충 듣긴 했지만 자세한 건…….”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무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어떤 상황인지 모른다. 추론을 하자면 못 할 것도 없지만 남의 사생활을 알아서 어쩌랴 하는 생각에 관두었다.
“나도 놈들로부터 알게 된 거야.”
“귀마존?”
“응.”
“그들이 무 형을 왜 데리고 갔는데요?”
“그 당시에 마맹과 무맹은 강호 주인을 결정하는 데 전쟁이 아니라 비무를 택했어. 그 비무를 쟁천비무라고 하는데 마맹엔 무인이 부족했던 거야. 기간은 십 년이나 남았고.”
“십 년이면 고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긴 세월이긴 하지만, 그에게 자신이 속한 조직의 운명을 맡긴다는 건…….”
“그들이 원한 건 내가 아니라 마신체를 타고난 내 몸이었어.”
“아! 그랬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십 년에 십만 냥을 받기로 계약하고 그들을 따라갔어.”
“일 년에 일만 냥이네요?”
“네게는 별것 아닌 돈일지 모르지만 그때 나는 그 돈만 받으면 마누라 다섯 명을 구해서 평생 동안 떵떵거리고 살 생각이었어.”
“기껏 십만 냥으로 마누라를 다섯 명이나 구해서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금장생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계산을 때려도 그건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쓰기만 해도 십 년이면 바닥이 날 것이다. 십만 냥으로 평생을 살겠다고 생각한 무혼이 순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자식아, 너의 같은 부자 자식과 우리 같은 가난뱅이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거야.”
“무 형. 이건 사고방식 문제가 아니고 계산의 문젭니다.”
“좋아. 계산이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다섯 식구가 한 달을 사는 데 얼마가 들어가는지 알아?”
“다섯 냥으로 들었습니다.”
“그럼 일 년이면?”
“다섯 냥은 말 그대로 먹고 사는 비용을 말하는 겁니다, 무 형. 사람은 먹고 사는 것 말고도 할 게 아주 많습니다. 그 할 것들에는 비용이 들고요.”
“그건 돈 많은 니들 이야기라니까.”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귀마존을 따라갔지 뭐. 처음엔 열양천과 빙한담을 오가면서 내공을 익혔고 그들이 주는 마령단을 받아먹으며 무공을 익혔어.”
“처음 익힌 무공이 어떤 거였습니다.”
“절반의 양극신공이었어.”
“수라 남천기가 남긴 내공심법이군요.”
“맞아.”
“양극신공은 어땠습니까?”
대화는 자연스럽게 무공으로 이어졌다. 무공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하나의 무공에 대한 토론이 끝나면 다른 무공 구결이 흘러나왔고, 새로운 토론이 시작됐다. 이미 절대자의 반열에 오른 두 사람이라 무공에 대한 조예는 깊었다. 보통 무인들이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이론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하루가 꼬박 지났지만 둘의 토론은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의 토론은 바타르를 비롯한 팔장군 일행이 찾아오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방해를 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먼저 찾아온 이들은 바타르와 권말남, 자운영이었다. 그들은 금장생과 무혼이 무공에 대한 토론을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조용히 경청했다.
바타르도 무공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상태였고 권말남과 자운영은 이미 무인이었기에 금장생과 무혼의 무공에 대한 토론은 그 어떤 것보다 큰 가르침이었다.
세 명이 오고 나서 한 시진 후에 팔장군 일행이 왔다. 바타르와 권말남, 자운영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걸 발견한 일행은 말없이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무론을 들었다. 때로는 고개를 갸웃하고, 때로는 끄덕이고. 때로는 나직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금장생과 무혼이 토론을 멈춘 건 다음 날이었다.
“어?”
“언제 왔어요?”
바타르와 팔장군 일행을 발견한 무혼과 금장생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제 왔다.”
바타르가 대답했다.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언제부터 토론을 하고 있었던 거냐?”
바타르가 무혼을 보며 물었다.
“몰라.”
무혼은 고개를 저었다.
“도움은 많이 됐냐?”
“새롭게 눈을 뜬 기분이야.”
솔직한 말이었다. 사실 무혼은 무공에 대해 고찰해 본 적이 없었다. 샤이칸드리아 대륙에 있을 때는 무공을 익힌 사람이 혼자뿐이라 토론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난생처음으로 금장생과 무공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눈 것이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기분상으로는 전보다 두 배는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다행이구나.”
“넌 어때?”
이번엔 무혼이 물었다.
“나야 뭐…….”
바타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역시 엄청난 진전을 이뤘다. 하지만 인간들의 대화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은 절대 할 수가 없었다.
“뭔가 얻었구나.”
무혼이 바타르를 빤히 보며 말했다.
“코딱지만큼.”
“드래곤의 코딱지는 엄청나게 크다는 거 알아?”
“드래곤의 코딱지?”
“본체를 말하는 거야.”
“본체라고?”
“아마 내 머리만 할걸?”
“그 정도는 아냐, 자식아.”
“아무튼 넌 우리에게 코딱지만큼 빚졌지?”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빚 운운하는 건데?”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거 맞지.”
“맞아.”
바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숨만 쉬어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너와 달리 우리 인간은 뭔가를 먹어야 해. 그런데 벌써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물도 못 마셨고.”
“난 먹을 걸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무혼이 음식을 원하는 걸 보고 바타르가 말했다.
“음식은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바타르 님은 이것만 열어 주시면 됩니다.”
금장생은 가방을 꺼내며 말했다.
“그걸 열어 달라고?”
바타르는 가방으로 시선을 주었다.
“네.”
“나는 너에게 빚진 거 없다.”
가방을 보자마자 바타르의 태도가 돌변했다.
“조금 전에는 분명…….”
“우리 둘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잖아, 자식아.”
금장생이 말끝을 흐리자 무혼이 바타르에게 버럭 소리쳤다.
“나는 너희 둘에게 무공에 대해 말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다. 단지 여기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이다. 저절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빚졌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저걸 안 열어 주겠다고?”
무혼은 손가락으로 가방을 가리켰다.
“안 열어 주겠다는 건 아니다.”
“그럼?”
“가방을 다시 돌려주면 열어 주겠다.”
“이걸 돌려 달라고요?”
금장생은 가방을 가리켰다.
“그렇다.”
바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금장생은 말끝을 흐렸다.
아직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보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물건이 아니라 보기가 꺼려졌다. 어쩌면 앞으로도 확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돌려주는 건 내키지 않았다.
금장생은 슬쩍 시선을 돌려 불여하를 보았다. 우연히 불여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전 괜찮아요.
불여하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끙!’
금장생은 내심 신음을 흘렸다.
배고픔과 갈증 때문인 듯 눈 아래는 거뭇거뭇하고 입술은 쩍쩍 갈라져 있다. 문득 그녀는 유독 배고픈 걸 못 견뎠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기 입으로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게 배고픔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배가 고프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자다가도 일어나 배를 채웠다.
그랬던 그녀가 사흘이나 혹은 그 이상을 굶었으니 괜찮을 리가 없다.
가방을 돌려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금장생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 가방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타! 나 배고파 죽겠어.”
권말남이 애교가 잔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욱!’
‘바타’라는 말을 듣자 속이 느물거릴 정도로 느끼했다. 그런 느낌을 받은 사람은 금장생뿐만이 아니었다.
“이 버터 같은 것들이 그냥.”
무혼은 둘을 보며 인상을 썼다. 하지만 바타르와 권말남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 바타르는 한 술 더 떴다.
“많이 고팠쪄?”
“저 미친 자식, 저거.”
무혼은 어이없는 얼굴로 바타르를 보았다. 그는 살아생전에 드래곤이, 아니 드래곤 로드가 ‘많이 고팠쪄?’라고 말하는 걸 듣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지금 바타르가 한 행동을 드래곤들에게 말하면 틀림없이 매장되고 말 것이다.
“응, 바타.”
권말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바로 열어 줄게.”
바타르는 금장생을 보았다.
“먹는다고 해도 바로 토할 것 같은데.”
금장생은 말끝을 흐렸다.
“빨리 안 줄 거냐?”
금장생이 망설이자 바타르의 목소리가 커졌다.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가방을 내밀었다. 가방을 받아 든 바타르는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가방 크기를 키우고 입구를 열었다. 그리고 금장생에게 건넸다.
가방을 받아 든 금장생은 안에서 음식을 꺼냈다. 육포와 과일 말린 게 전부였지만, 사흘에서 나흘 정도 굶은 일행에게는 진수성찬에 버금가는 음식이었다.
일행은 정신없이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금장생과 무혼이 음식 먹는 걸 멈춘 건 바타르 때문이었다.
“우리 자기, 배가 많이 배고팠구나. 체할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먹어. 그리고 육포는 내가 찢어 줄게.”
“에이, 저걸 그냥.”
무혼은 바타르를 노려보며 혼천 손잡이를 잡았다.
“나는 저놈이나 부숴야겠습니다.”
금장생은 검천무적마해가 숨겨져 있던 건물을 가리켰다. 그리고 금장생에게 말했다.
“같이 하자.”
“좋습니다.”
“타하!”
“차하!”
무혼과 금장생은 동시에 건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