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49)
무적검
“으! 하하하하!”
“하하하!”
“크! 하하하하!”
동굴 밖으로 솟구친 칠검마는 호쾌한 웃음을 토했다.
휙!
어디선가 커다란 보자기 하나가 일행을 향해 날아왔다. 역검마 전군남이 보자기를 잡아챘다.
“옷과 제대로 된 음식입니다.”
동굴 근처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캬캬캬캬!”
전군남은 괴소를 토해 냈다.
“차하!”
칠검마 일행은 기합을 내지르더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저들을 믿으십니까?”
영호정은 평천일을 보며 물었다.
“안 믿네.”
평천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풀어 주는 겁니까?”
“저들의 인격은 믿지 않지만, 저들이 검각을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사실은 믿네.”
“믿음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닙니까?”
“아니네. 내 믿음은 지나치지 않네. 저들은 검각을 떠날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 혈도를 누르고 잡혔네. 그건 검각을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나온 행동이었네. 그런 자들은 검각이 망하는 걸 절대 그냥 두고 보지 않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검각을 지킬 거네.”
“만일 칠검마가 팔왕 일행을 쉽게 이기면…….”
“절대 그럴 리가 없네. 팔왕 일행은 춘추오패도 어쩌지 못한 강자들이네. 그들과 칠검마는 양패구상할 거네. 우린 팔왕이 살아 나오면 잡아서 춘추오패의 수장에게 넘기면 되고, 칠검마가 나오면 잡아 없애면 되네.”
“그렇군요.”
영호정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지금껏 문주를 잘못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천일이 욕심도 야망도 없는 사람이라 여겼다. 실제 생활도 그랬다. 자기가 사는 걸 뽐내지도 않고 늘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다. 그래서 검각은 훌륭한 사람을 문주로 모셨다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문주는 비상할 때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기회가 생기면 한 번에 박차고 날아오르기 위해 잔뜩 웅크렸던 것이다. 문득 제 아버지보다 더 조부를 닮았다고 하였던 심검마 우상의 말이 떠올랐다.
‘야망을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으니까.’
이내 자신을 다독였다. 문주의 내심을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자신은 영호정이고 검각의 부문주다. 문주가 비상하면 함께 날아오르는 거고 몰락하면 함께 추락하는 거다.
“가세.”
평천일이 앞장서 걸었다.
“네.”
영호정은 평천일을 따랐다.
* * *
갑자기 바뀐 환경은 사람을 당황스럽게 한다.
그건 강한 무공을 지닌 무인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주변의 모든 상황이 무인을 기준으로 맞춰져 있기 때문에, 무공을 지녔다고 해서 양민보다 특별히 나을 것도 없다. 상황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일단은 멈추는 게 최선이다.
금장생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키가 일 장에 달하는 커다란 철상鐵像이 서 있었다. 그가 철상 아래 자리를 잡은 건 소란스러움이 사라지고 정적이 주위를 채울 때였다.
여기서 소란스러움이란 요란한 소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활력을 말한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고요는 무혼의 시체를 발견했던 그곳, 역천영면마진이 펼쳐져 있던 장소와 비슷한 느낌을 자아냈다. 진식에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하고 주위를 살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저 거대한 철상이다.
얼른 철상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식에 휘말리면 철상을 붙잡고 있을 참이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이 풀어지자 피곤이 몰려왔다. 철상에 기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떠 보니 새벽안개가 벌판을 감싸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장소가 분명한데도, 다른 장소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멋지네.”
금장생은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새벽안개를 뚫고 우뚝우뚝 서 있는 수많은 검들의 모습은 을씨년스럽게 보여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림 같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아무튼 아침이 됐으니까 밥부터…….”
금장생은 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손으로 잡고 늘리는 시늉을 했다.
“어?”
그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는 가방을 꺼내 두 손으로 잡고 좌우로 벌리면 적당한 크기, 즉 가로 세로 깊이가 각각 한 자로 커졌다. 그 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 가방을 꺼내면 저절로 커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이번에는 커지지 않았다.
금장생은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두 손을 좌우로 벌렸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가방은 원래 상태에서 전혀 변화가 없었다.
“설마 아무것도 못 꺼내는 건 아니겠지?”
늘리는 걸 포기하고 가방의 작은 입구로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마법 가방이라 입구의 크기에 상관없이 손을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손가락도 들어가지 않았다.
―영감님!
금장생은 라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라가 대답했다.
―이곳 좀 살펴봐 주세요.
금장생은 장포를 걷어 악마수가 외부 대기와 마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떤 걸 알고 싶은 거냐?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요.
―어떤 곳이라는 건 무슨 뜻이냐?
―가방이 열리지 않아요.
―그 드래곤 자식이 준 아공간을 말하는 거냐?
―네.
―가방이 열리지 않는다면…… 여기는 마법을 펼칠 수 없는 공간이란 뜻이다.
잠시 생각하던 라가 대답했다.
―그런 공간도 있나요?
―마법사를 잡는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공간을 어떻게 만들죠?
―마법으로 만든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공간을 마법으로 만든다는 거네요?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든 자는 절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지.
금장생의 내심을 눈치챈 라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마법과 진식이 섞여 있다고 봐야겠네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 같구나.
―여기에도 귀신도 있을까요?
―마법과 진식이 뒤섞인 곳에서 귀신이 살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나.
―귀신이 사는지 안 사는지는 밤이 되면 알겠지요. 그나저나…….
금장생은 철상에서 멀어졌다.
다시 한번 철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대기가 바뀌기 전에 저런 철상은 없었다. 물론 검총을 모두 돌아보지 않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은 장소를 옮기지 않았고, 주위가 크게 변하지도 않았다. 변한 거라고는 이곳 분위기뿐이다. 그런데 거대한 철상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철상은 어떤 이유에서건 감춰져 있다가 새로운 진식이 발동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봐야 한다.
금장생은 다시 철상을 살폈다.
철상은 오른손은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다. 마치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왼손으로는 땅을 누르는 것 같다. 이번에는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숫자?”
금장생의 눈이 살짝 커졌다. 철상의 이마에는 일一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금장생은 철상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를 냈다. 여러 번 반복했지만 뭔가 어색했다.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네.”
혹시 무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그나저나 여기서 빠져나가야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금장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걸음을 옮겼다.
상당히 걸은 것 같은데도 끝이 나오지 않았다. 주위에는 온통 바닥에 꽂힌 검뿐이었다. 비로소 이곳을 검총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그림을 보았을 때 느끼는 이질감 같은 것이었다. 마치 있어서는 안 될 뭔가가 사고의 이어짐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금장생은 주위에 꽂힌 검을 살폈다.
“아!”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이것 때문이었어.”
금장생은 자신이 뽑아 든 검을 보았다. 그건 바로 전장에서 군인들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그것도 장군이 아닌 일반 병사가 사용하는 박도朴刀.
총길이는 두 자, 칼날만 한 자 반이다. 나머지 부분은 손잡이다. 원래 손잡이는 후박나무로 만들어 사용하는데 금장생이 뽑아 든 건 쇠로 돼 있었다.
칼날은 앞으로 갈수록 넓어지고 일반인이 한 손으로 휘두르기엔 버거울 정도의 무게다.
원래부터 볼품없는 녀석인데 거무튀튀한 녹까지 슬어 더 초라해 보였다.
“도가 아니고 검이었네.”
금장생은 박도 등으로 시선을 주었다. 원래 등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날이 서 있었다. 금장생은 손가락으로 날을 살짝 쓸어 보았다.
“와!”
금장생은 탄성을 내뱉었다.
녹이 슬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이 살아 있는 걸 보면 쇠가 좋거나 명장이 만든 게 분명했다.
금장생은 박도를 휘둘러 보았다.
바람을 가르는 것이 제법 매서웠다.
박도를 내려놓고 다른 검을 하나 뽑았다. 전날 왜도가 부서지지 않았더라면 검에 관심을 갖지 않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무기로 쓸 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지천에 검이 널렸으니 그중 적당한 녀석을 하나 골라 들기만 하면 된다. 금장생은 뽑아 든 검을 살폈다. 일반적으로 무인이 사용하는 삼척장검이었다.
무게도 적당했지만 녹은 박도보다 더 많이 슬어 있었다.
“이건 아니네.”
금장생은 다시 검을 본래 자리에 꽂았다. 그 뒤로도 몇 개를 더 뽑아서 살폈지만 마음에 드는 녀석이 없었다.
“일단은 너다.”
금장생은 맨 처음에 뽑았던 볼품없는 박도를 챙겨 들었다.
캉! 캉! 캉!
망치질 소리를 들은 건 그때였다.
검총을 가득 채운 정적을 깨트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지금까지 잠들어 있던 검총이 깨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흠!”
금장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총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먹을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금장생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먼저 발견한 것은 철상이었다. 이번에 본 철상도 키는 일 장이었다.
금장생은 삼 장가량 떨어진 곳에서 철상을 살폈다. 철상은 손바닥을 세운 채 양팔을 좌우로 내밀고 있었다.
“다리를 구부려야 할 것 같은데…….”
철상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이었다. 뻣뻣하게 선 채로 팔을 좌우로 뻗는 건 왠지 어색해 보였다.
그런데 처음 보았던 철상도 그랬지만 이 철상에도 다리는 없었다.
금장생은 철상 앞으로 다가가서 아마를 살폈다.
철상의 이마에는 사四 자가 새겨져 있었다.
원래는 칠검존 중 넷째가 만든 철상이지만 검각 무인이 아닌 금장생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뭔가 숨겨진 암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철상을 지나쳐 다시 걸었다.
캉! 캉! 캉! 캉!
또다시 망치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대장간이 있나?”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를 듣자마자 머릿속으로 대장간에서 망치질을 하는 대장장이 모습이 떠올랐다.
“거참!”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하며 걸었다. 대장장이를 상상한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지런히 걷던 그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잘못 상상한 게 아니었다. 앞에는 아담한 크기의 대장간이 있었다. 노爐가 걸려 있는 화덕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상의를 벗은 노인이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망치질을 할 때마다 벌건 쇠는 모양을 잡아 갔다. 노인이 만들고 있는 것은 검이었다.
금장생은 근처에 있는 검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 검과 노인이 만들고 있는 검을 비교해 보았다.
문득 이 근처에 꽂혀 있는 검을 만든 사람이 망치질을 하고 있는 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장생은 한편에 쪼그려 앉아 노인이 검을 만드는 걸 구경했다.
치이익!
검을 다 만든 노인은 마무리 작업을 했다.
곧 검집과 날이 일체형으로 된 검이 만들어졌다. 검을 가만히 바라보던 노인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검 옆에 있던 상의를 걸치고 금장생을 보았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욱하게 만드는 얼굴의 소유자인 이자는 역검마易劍魔 전군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