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42)
검총
실내에 여섯 사람이 앉아 있었다.
수염을 기른 오십 대 중반 사내가 가운데 앉았고 그 오른편에는 두 명이, 왼편에는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이들 여섯 명은 검각 수뇌부였다.
가운데 앉은 중년인은 문주 천중제일검 평천일이고 오른편에 앉은 자는 부문주 천섬일검天閃一劍 영호정이다.
나머지 네 명은 검각 사장로였다.
머리가 눈처럼 하얀 자는 춘설일검春雪一劍 이육노고, 이육노의 머리와 정반대로 새치 하나 없이 완전한 흑발을 지닌 자는 하서이검夏暑二劍 삼정아이며, 대머리 노인은 추월삼검秋月三劍 기숙두, 코가 붉고 검은 점이 깨처럼 박혀 있는 자는 동매사검冬梅四劍 경득공이었다.
찻잔을 앞에 두고 앉은 여섯 사람의 얼굴은 심각했다. 문주 평천일이 급하게 회의를 소집한 건 한 통의 서찰 때문이었다. 서찰을 보낸 자는 해림의 현 림주 옥천환이었다. 서찰에는 현 강호무림에 대한 설명과 방문 일자가 적혀 있었다.
“내가 여러분을 부른 건 우리 검각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네.”
오랜 침묵 끝에 평천일이 입을 열었다.
“파 림주와 한 약속을 지키실 겁니까?”
부문주 영호정이 물었다.
영호정은 허리에 찬 검만 없다면 문사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짙은 묵향이 풍겼다. 사실 그는 부문주이면서 검각 군사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그걸 논의하기 위해 여러분들을 부른 거네.”
“지킬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검각사노 막내 동매사검 경득공이 붉은 코를 만지며 말했다.
“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건가?”
평천일이 물었다.
“우리가 협약을 맺은 사람은 파운양 림주였습니다. 그가 죽으면 협약은 자동으로 파기되는 게 맞습니다.”
경득공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사장로와 의견이 다릅니다.”
부문주 영호정이 말했다.
“말해 보시오.”
“중원무림은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바야흐로 난세에 돌입했다는 거지요. 난세가 시작되면 중립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느 쪽이 됐든 줄을 서야만 살아남습니다.”
“춘추오패나 팔왕가, 둘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영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우리가 선택한 곳이 패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요?”
경득공이 물었다.
“패자 쪽에 섰다고 해도 패자로서 대우를 해 주는 게 무림의 전통입니다. 하지만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눈치만 본 세력은 전쟁 도중에 양쪽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력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세력이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전쟁의 향방이 결정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엔 양측의 공격을 받게 될 겁니다.”
“어느 쪽이 됐든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구려.”
평천일의 시선이 경득공에게로 향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뜻이었다.
“봉문을 선언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제 와서 봉문을 선언하는 건 너무 늦을 뿐 아니라 속보이는 짓입니다.”
영호정이 말했다.
“알았소. 두 세력 중 한 곳을 선택하도록 합시다.”
평천일은 결론을 내렸다.
두 세력 중 한 곳이라 말은 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춘추오패 쪽에 서는 걸로 기운 상태였다. 다만 장로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 선택하자고 말한 것뿐이었다.
“다른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영호정이 말했다.
“해림으로 하자는 거요?”
평천일이 물었다.
“굳이 해림으로 한정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하면?”
“춘추오패는 다섯 세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다섯 세력이 아니라 여섯 세력이 돼도 상관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자는 거요?”
평천일의 눈이 커졌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네.”
영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시오?”
평천일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장로 또한 놀란 얼굴로 영호정을 보았다.
“춘추오패가 모두 독자 세력이었다면 저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단체의 팔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 팔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춘추오패가 못 하는 어떤 일을 우리가 해야 하겠구먼.”
오랜 세월을 함께한 덕분에 평천일과 영호정은 호흡이 척척 맞았다. 평천일은 영호정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맞습니다. 서찰에 의하면 춘추오패 다섯 세력은 팔왕을 쫓고 있습니다. 물론 팔왕을 쫓는 춘추오패는 완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전력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다섯 세력이 함께한 상태고 각 세력의 수장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전력의 일부지만 수장들이 있으니까 전부라고 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쫓기고 있는 팔왕은 마침 우리 검각이 있는 강서성으로 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팔왕을 잡아 머리를 자른다고 해도 춘추오패의 주인에게 알릴 방법이 없습니다. 백이면 백, 해림 림주는 우리 공을 가로챌 겁니다.”
춘설일검 이육노가 말했다.
“아닙니다. 춘추오패의 주인은 우리가 팔왕을 잡으면 바로 알게 됩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그건 바로 함께 움직이고 있는 춘추오패의 수장들 때문입니다.”
“나는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만일 일장로께서 춘추오패의 수장이라면 팔왕을 잡기 위해 직접 움직이시겠습니까?”
“그건…….”
이육노는 선뜻 대답을 못 했다.
“부하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 그들이 당하면 다른 부하를 보내고, 그렇게 부하들을 내보다가 더 이상 방법이 없으면 그때 움직일 겁니다. 내가 말한 건 일장로만 그렇다는 게 아니라 각 세력의 수장이 되면 대부분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물론 약간의 개인차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춘추오패의 주인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누군가를 수행하고 있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그들 다섯 명은 자신들의 상관과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린 춘추오패의 주인이 아니라 그들의 상관에게 우리 실력을 증명해 보이면 됩니다. 팔왕을 없애는 걸로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이육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춘추오패 쪽으로 서는 걸로 하고, 팔왕을 잡을 장소는 어디로 했으면 좋겠소?”
문주 평천일이 물었다.
“검총劍塚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호정이 말했다.
검총은 검각의 성지였다.
십만 자루 이상의 검이 꽂힌 곳으로 수많은 검각 무인들이 그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검의 고수가 됐다. 제자들에게는 깨달음을 주는 장소지만 검각을 도모하려는 자들에게는 죽음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건 바로 검총에 펼쳐진 검총파천쇄옥진劍塚破天鎖獄陣 때문이다.
검총파천쇄옥진은 사백 년 전에 만들어진 절진이다. 검총파천쇄옥진이 발동됐던 칠십 년 전까지는 그 누구도 검각을 넘보지 못했다.
검총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칠십 년 전에 문주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이다가 검총파천쇄옥진이 파훼되고 말았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파훼된 검총파천쇄옥진을 복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검각은 검총파천쇄옥진을 복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파운양의 도전을 받았고 응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검총파천쇄옥진이 파훼되지 않았더라면 파운양의 도전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파운양에게 패한 평천일은 미친 듯이 검총파천쇄옥진 복구에 매달렸고, 칠십 년 전에 사라진 검총파천쇄옥진을 삼 년 전에 찾아낼 수 있었다.
검총파천쇄옥진은 검각 문도 일천오백 명이 모두 참여해서 펼치는 필살진이었다.
“검총파천쇄옥진은 우리 전부를 걸어야 하는 진식이네, 부문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걸고 팔왕을 잡았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들은 검총이 우리 일부라고 생각할 테고 우린 가진 전력보다 훨씬 더 강하게 평가받겠군.”
“그렇습니다.”
“좋네. 팔왕을 검총으로 끌어들이는 걸로 하세.”
평천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 오셨습니다, 문주님.”
바로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해림 림주가 온 모양이구먼.”
평천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옥천환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심해전 전주 백팔마조 설천과, 심해전 소속 원로인 파랑참마도 장성하, 풍운마제 노적임을 대동하고 검각으로 온 건 한 식경 전이다.
사실 그는 검각을 그리 대단하게 보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이룬 것도 아니고 파운양이 병합한 세력이라 잘 알 수 없었던 탓이다.
더하여 해림 내부를 장악하는 데도 시간이 부족해 외부 세력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전주는 여기 와 봤다고 했소?”
옥천환은 설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전대 림주께서 해림의 명운을 걸고 검각 문주와 비무를 할 때 함께 왔습니다.”
“검각 문주는 어떤 사람이오?”
“합리적인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부문주였던 영호정 대협도 마찬가지였고요.”
“합리적이라는 건 어떤 의미요?”
“시세를 거스르지 않을 자라는 뜻입니다.”
“이야기가 잘될 수도 있다는 말이구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렇구려.”
옥천환은 걸음을 멈췄다. 그 바로 앞에 사찰의 일주문처럼 보이는 문이 세워져 있었다. 좌우측에 담벼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벌판에 문설주를 세우고 지붕을 얹고, 문을 단 단순한 형태의 대문이었다.
옥천환은 시선을 들었다.
검총이란 글이 음각돼 있었다.
“여긴 어떤 곳이오?”
옥천환은 검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말 그대로 검의 무덤입니다.”
“저것들이 다 진짜요?”
옥천환은 문 좌우측으로 보이는 수많은 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벌판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검이 꽂혀 있었다. 손잡이만 남기고 박힌 검도 있고 절반만 박힌 검도 있고 삼분의 일, 혹은 삼분의 이까지 박힌 검도 있었다. 창이나 도도 섞여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검이었다.
“네.”
설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자루나 되는지 아시오?”
“십만 자루 이상이란 말만 들었을 뿐 정확한 숫자는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멋으로 꽂아 둔 건 아닐 테고…….”
“검각을 세운 검천자劍天子 육성우의 원래 직업이 뭔지 아십니까?”
“모르오.”
“대장장이였습니다.”
“무기를 만들었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다섯 살 때부터 망치를 잡았다고 하더군요.”
“장인이겠군.”
“그런 모양입니다. 삼십 년 동안 검을 만들자 검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철검자鐵劍子 나욱의 철검무적검해鐵劍無敵劍解라는 검법을 얻어 익히게 됩니다.”
“철검자 나욱이면 칠백 년 전 천하제일검으로 불렸던 자 아니오?”
“맞습니다.”
“기연을 얻었구먼.”
“그렇습니다. 그는 그 철검무적검해로 검천무적마해劍天無敵魔解라는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 냅니다.”
“검천무적마해?”
옥천환의 눈이 커졌다. 강호무림에는 전해지지 않는 최강 무공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무공이 있다.
각 분야별로 서너 개씩 이름을 올렸는데 검천무적마해는 검법에 속해 있는 신공이었다.
“전해지지 않는 최강 무공 중 하나가 맞습니다.”
“검각 사조가 창안한 무공인 줄은 몰랐구려.”
옥천환은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해지지 않는 최강 무공 중 하나라고 했으니까 검천무적마해는 현재 검각에 없다는 뜻이 된다. 만일 검각 문주가 그 무공을 익혔다면 검각과 해림의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공과 저 검들이 관계가 있는 거요?”
“철검자 나욱이 남긴 철검무적검해는 중검重劍이었다고 합니다.”
“검이 무겁다는 뜻은 아닐 테고, 내기가 무거웠다는 뜻이겠구려.”
“그렇습니다. 철검무적검해의 내공심법은 내기를 무쇠처럼 무겁게 만들어 검 내부로 주입하게 돼 있다고 합니다.”
“그 내기를 견디려면 일반 검으로는 안 되고 명검이나 신검이라야 하겠구려.”
“그랬더라면 검총은 생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란 말이오?”
“네. 놀랍게도 철검자 나욱이 사용한 검은 평범해 보이는 철검이었답니다.”
“평범해 보인다는 건,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다는 뜻인 것 같은데.”
“맞습니다. 나욱의 검은 일반 철검이 분명했습니다. 만년한철이나 만년오금철, 지극한철 같은 특수한 쇠로 만든 검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시험은 해 봤을 것 같은데, 아니오?”
“물론 했습니다. 그는 만년뇌금철과 곤오신철, 혈염강철, 용형묵철, 묵강한철을 구해 검을 만들어 시험을 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