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38)
태극선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뇌령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건?’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그는 절대 뇌령의 움직임에 개입하지 않았다. 뇌령 스스로 솟구치고 있다.
마침내 태극선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뇌령은 금장 투구 앞으로 다가왔다.
금장생은 뇌령을 보았다. 뇌령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광채를 뿌렸다. 광채가 금장생의 머리를 감싸고 뇌령은 이마 바로 앞에 자리했다.
―나를 불러라!
특이한 외침이 들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전에 본 적이 있는 뇌신이었다.
“오뇌호령五雷號令 총소만령總召萬靈!”
금장생의 입에서 벼락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삐이익!
먼저 금소 소리가 대기를 뚫었다.
쿠쾅! 쿠쾅! 콰쾅!
혈라가 고개를 좌우로 젓는 것처럼 움직이며 거대한 북소리가 터져 나왔다.
딸랑! 딸랑! 딸랑!
저 깊은 땅속에서 울리는 듯한 제종 소리가 들려왔다.
스으으윽!
거대한 동체가 금장생 위로 솟구쳤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푸른 뇌전으로 온몸을 두른 거대한 덩치는 뇌령으로 소환한 뇌신이었다.
그런데 뇌신의 모습이 전에 금장생이 보았던 것과 달랐다.
그때는 팔이 두 개뿐이었고 창을 들었는데 지금은 팔이 여덟 개나 됐다. 각각의 팔에는 암왕칠구가 모두 들려 있었다.
―뇌신입니까?
금장생은 사념을 보냈다.
하지만 뇌신은 대답이 없었다.
―어쨌든 좋습니다. 저 불쌍한 영혼들을 해탈시켜 줘야겠습니다.
금장생은 수백 마리의 귀신으로 둘러싸인 정령귀를 가리켰다.
스악!
뇌신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검은 운무 하나가 그를 덮쳤다. 뇌신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먼저 제종이 울림과 거의 동시에 묵야가 검은 운무를 잘랐다.
끄아악!
검은 운무의 입이 쩍 벌어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뇌신은 다시 한 걸음 검은 운무를 향해 다가갔다.
쾅쾅! 쾅쾅! 쾅쾅!
뎅! 뎅! 뎅!
뿌우우우! 뿌우우우! 뿌우우우!
혈라가, 혈종이, 금소가 동시에 울음을 토해 냈다. 듣기 거북살스러운 소리인 듯 검은 운무가 괴성을 토해 냈다.
뇌신은 계속해서 검은 운무를 향해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검은 운무는 더 많은 검은 덩어리를 쏘아 보냈다. 하지만 뇌신을 어쩌지 못했다. 마침내 검은 운무 앞으로 다가간 뇌신은 창을 휘둘렀다. 창이 운무를 절반으로 갈랐다. 이어 묵야와 사백이 검은 운무 속으로 파고들었다.
쿠어어억!
캬아아아아악!
쿠아아아아악!
운무는 계속해서 비명을 내질렀다.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을 쳐 보지만, 뇌신이 언제 던졌는지 천승이라 부르는 법승이 친친 감고 있었다.
그사이 암왕칠구가 전부 공격을 감행했다.
뇌령은 푸른색 광채를 뿜어냈고 묵야와 사백은 덩어리를 잘게 잘랐다. 세 악기는 쉬지 않고 각자의 소리를 토해 냈다. 그 소리에는 어둠을 몰아내는 제마의 힘이 담겨 있었다.
크아악!
검은색 운무는 괴성을 내질렀다. 암왕칠구에 의해 정령의 힘이 약해지자 귀신들이 떨어져 나갔다. 귀신들은 뇌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귀신이 떨어져 나가 정령귀의 힘도 점점 약해졌다. 정령귀의 힘이 약해질수록 뇌신과 암왕칠구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마침내 백여 마리에 달했던 귀신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뇌신이 창을 번쩍 들었다.
―이걸로 해야 합니다.
금장생은 왼팔을 들어 백안을 발출했다. 귀신을 해탈시켜 주고 하급 정령을 없앨 때는 암왕칠구만으로 충분하지만 저 앞에 있는 녀석처럼 최상급 정도 되면 암왕칠구로는 힘들다. 고대에 만들어진 무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가 발출한 백안이 뇌신의 창두를 둘러쌌다.
스악!
뇌신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곧 검은 운무 덩어리가 잘려 나갔다.
쿠어어어억!
검은색 운무 덩어리는 괴성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색 운무 덩어리가 있던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털썩!
십여 장 높이까지 솟구쳤던 흙더미도 지상으로 풀썩 무너졌다.
“억!”
뇌신을 발견한 자운영이 질겁했다.
그는 재빨리 검으로 가슴을 방어했다. 뇌신을 적으로 간주한 탓이었다.
“납니다.”
금장생은 뇌신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그러자 뇌신이 스르르 사라졌다.
‘내가 빠져나가면 뇌신도 함께 사라지는 모양이네.’
금장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뇌령이 이마에 붙어 있는 걸 보면 의지만으로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바, 방금 그건 뭡니까?”
자운영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귀신 잡는 뇌신입니다.”
“뇌신요?”
“그런 게 있습니다.”
“혹시 강신술 같은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 가 볼까요?”
“네.”
자운영은 금장생을 따라나섰다.
최상급 정령이라 활동 범위가 넓은 듯 십여 장을 걸었는데도 다른 정령귀가 나타나지 않았다.
바닥이 일어난 건 십오 장을 갔을 때였다. 흙이 솟구치자마자 금장생은 곧바로 뇌신을 소환했다.
뇌신을 소환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오뇌호령 총소만령’이라 소리치면 바로 소환됐다.
그 후의 방법은 전과 같았다. 먼저 암왕칠구로 귀신을 떼어 내 정령을 약하게 한 후 백안으로 날을 감싼 뇌창으로 베어 없었다. 금장생과 자운영이 지나간 곳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갔다.
거의 열 객체를 없앴을 때였다.
“응?”
금장생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앞에서 엄청난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에 싸운 적이 있는 헌원소야보다 결코 약하다고 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아니, 풍기는 기운으로만 따진다면 헌원소야 이상이었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전면을 주시했다.
정령귀를 많이 없앤 덕분인지는 몰라도 시계는 오 장 정도로 늘어났다. 오 장 건너편으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 머리 위 십 장 높이에는 정령귀 다섯 마리가 운무를 뚫고 머리를 내밀고 이편을 보고 있다. 몸통은 운무 속에 있고 머리만 내놓은 모습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정령귀 아래쪽에 갑옷을 입은 자.
금장생의 눈이 틀리지 않다면 사내가 입고 있는 건 고대의 갑옷인 헬라간이다. 등에 걸고 있는 도끼 또한 대단해 보였다.
정령귀 아래쪽에 있는 자는 건륭이었다.
“당신이 이곳 주인인가요?”
금장생은 물었다.
저런 자가 주인이 아니라면 주인이 될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팔왕이냐?”
건륭은 되물었다.
그 역시 금장생처럼 놀라는 중이었다.
금장생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도 대단하고 그보다 더 대단해 보이는 건 입고 있는 갑옷이었다.
“내가 팔왕이 된 건 비밀인데.”
“무림오패가 모두 알고 있는 걸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느냐?”
“내 말이 그 말입니다. 무림오패 말고는 아직 아는 자가 없어야 하는데 당신이 알고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같은 편인가요?”
“같은 편이라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필요에 의해서 같은 편이 됐다는 말 같은데, 맞나요?”
“…….”
“나쁘지 않군요.”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암왕칠구를 본래 자리에 넣었다. 뇌신을 두 번 소환하고 나니까, 뇌신과 자신을 이어 주는 끈이 생겼다. 실재하는 끈이 아니라 의식의 끈이다. 그 끈은 오히려 실재하는 끈보다 더 강하다.
이제부터는 굳이 암왕칠구를 꺼내 들어 힘을 강화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 없게 됐다. 다만 뇌령은 이마에 붙어 있어야 한다.
손을 들어 뇌령을 쥐고 지그시 밀었다.
물론 헬라간에도 의지를 보냈다. 헬라간의 이마 부분이 약간 물러지는 듯하더니 뇌령을 받아들였다. 이제 뇌령은 투구와 한 몸이 됐다.
일부러 빼지 않는 이상 당분간 투구가 제 자리가 될 것이다.
“나쁘지 않다는 건 무슨 뜻이냐?”
건륭은 금장생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는 자신이 금장생에게 패할 거란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필요에 의해 맺어진 사이라면, 필요성이 없어지는 순간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잖습니까. 무림오패와 전쟁을 치러야 하는 내 입장에서 보면, 완전한 동업보다는 낫다는 거지요.”
“그건 네가 살아남았을 때 해야 할 걱정 아니냐?”
건륭이 말했다.
“풋!”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웃음이라. 좋구나.”
건륭은 도끼를 내렸다.
“특이한 기운을 흘리는 무기 같은데 갑옷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건가 보죠?”
“맞다. 이름은 적부다.”
건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방인들이 회수하지 못했던 세 가지 무기 중 마지막 하나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적부의 위력은 어떨지 궁금했다.
‘일단은 살려 둬야겠네.’
금장생은 설사 기회가 온다고 해도 적을 살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저런 강한 자가 초인삼황 부하가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사정상 한배를 타고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눌 게 분명하다. 적의 적은 나의 적이다.
‘너무 거창한 꿈인가?’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상대는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강자다. 그런 적을 목숨을 쥔 것처럼 살려 두네 마네 한 것이다.
‘일단 싸워 보면 얼마나 강한지 알겠지.’
금장생은 가방에서 왜도를 꺼냈다. 장도는 오른손에 들고 단도는 오른편 허리에 찼다. 중병인 적부에 견뎌 낼지 의문이지만 가진 게 이것뿐이다. 금장생은 왜도를 사선으로 늘어뜨렸다.
“좋은 도구나. 하지만…….”
건륭은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스악!
한순간에 공간을 단축한 그는 금장생의 머리를 향해 적부를 내리찍고 있었다. 정말 소름 끼치도록 빠른 신법이었다.
창!
금장생의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슈캉!
허리춤에서 푸른 광채가 폭발했다.
오른손으로는 장도를 들어 올려 막고 왼손으로 소도를 뽑아 건륭의 허리를 가른 것이다.
스윽!
건륭의 신형이 반 장가량 물러났다.
휙!
적부를 빙글 돌리더니 금장생의 머리를 쪼개 갔다.
슥슥슥! 슥슥슥!
순식간에 수십 개에 달하는 도끼날이 생겨나 금장생을 향해 쏘아졌다.
“차하!”
금장생의 장도가 머리 위로 반원을 그렸다.
카가캉! 캉캉캉캉! 캉캉캉!
왜도를 따라 반원 형태의 불똥이 생겨났다.
“하아!”
금장생은 왼팔의 작은 도를 이용해서 도전에서 익힌 소도笑刀를 펼쳤다.
“타하!”
건륭은 도끼 자루를 휘둘렀다. 자루가 길어 충분히 무기 역할을 해냈다. 더불어 도끼날로는 혈인광령부를 펼쳤다.
실전의 달인답게 그는 곧바로 혈인광령부를 응용하여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해낸 것이다.
금장생의 왼손에 든 소도가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갔다. 장도의 절반 정도밖에 안 돼는 크기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단숨에 공간에 구멍이 생겼다.
“억!”
건륭은 질겁하여 몸을 옆으로 들었다.
소도 끝에서 솟구친 도강이 옆으로 선 건륭의 배를 훑었다.
차르릉!
“차하!”
건륭은 기합과 함께 도끼를 내리찍었다.
적부의 목표는 소도로 찌르기를 시도한 금장생의 왼팔이었다.
‘그렇게 해서는 팔을 자르지 못하는데?’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끼가 아무리 빨라도 회수하는 팔을 자르기엔 늦었다. 아니 설사 팔이 걸려든다고 해도 악마수가 있어 잘릴 염려는 없다.
‘그렇다면.’
금장생은 왼팔을 잡아당기면서 왜도를 휘둘렀다.
카앙!
날카로운 소리가 금장생의 왼팔에서 흘러나왔다.
‘응?’
금장생의 눈이 살짝 커졌다. 건륭이 노린 것은 팔이 아니라 소도였다. 건륭의 도끼에 걸린 소도가 손잡이 부분에서 부러져 버린 것이다.
‘젠장!’
소도 손잡이를 놓아 버림과 동시에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성이 건륭의 허리에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