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35)
악추생이 죽었다고 싸움이 끝난 건 아니었다.
아직 정령귀들이 남아 있었다. 지휘관이 없어서 그런 듯 정령귀들은 더욱 날뛰었다.
―카에게 맡겨라.
라가 말했다.
―땅의 정령만 있다면 카에게 맡기겠지만 인간의 영혼도 함께 있잖아요.
금장생은 암왕칠구를 뽑아 들었다. 혈종과 묵야는 오른손에 들고 왼손에는 백사를 들었다. 입에는 금소를 물고 혈라를 얼굴 앞에 띄웠다.
스윽!
주머니에 들어 있던 법승이 튀어나와 금장생의 몸을 감아 돌았다.
그가 뇌령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개를 모두 든 건 사용하는 암왕칠구의 수가 많아질수록 어둠의 힘이 강해지기 때문이었다.
여섯 개를 착용한 금장생의 시선이 가슴으로 향했다. 심장 앞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뇌령이 튀어나오려고 움찔움찔하는 것 같았다.
쿠어어어억! 쿠어어억! 쿠어어억!
그때 수십 개의 흙기둥이 금장생을 향해 다가왔다.
‘지금은 참으세요.’
뇌령을 향해 내심 말하고는 몸을 날렸다.
쿵쿵!
혈종과 혈라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뿌우우우!
금소가 울리는 순간 묵야가 허공을 갈랐다.
딸랑!
푸아아아악!
쿠어어어어어어!
흙기둥의 입이 쩍 벌어지고 괴성이 터져 나왔다.
풀썩!
흙기둥은 아래쪽부터 천천히 무너졌다. 십여 장에 달했던 기둥이 무너지고 두 자 정도 남았을 때 흙기둥 머리 부분에서 주먹 크기의 광채 하나가 솟아 나왔다. 정령에 빙의해 있던 귀신이었다.
“극락왕생하세요.”
금장생은 귀신을 향해 합장을 했다. 허공으로 솟구친 귀신은 새하얀 통로를 따라 날아갔다.
파앗!
금장생은 다시 몸을 날렸다. 동라를 치고 금소를 불고 혈종을 치고 묵야와 사백을 휘두를 때마다 흙기둥은 본래 흙으로 돌아가고 인간의 영혼은 이승을 떠났다.
“세상에.”
자운영은 넋을 잃었다.
그는 아직 흙더미가 스러지면서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는 광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 광채가 나오는 순간 살아 있던 흙이 본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한 식경 정도가 지나자 더 이상 공격해 오는 흙더미는 없었다. 완전한 정적이 주변을 차곡차곡 채워 나갔다. 바람도 없고 공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휴우!”
금장생은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완전한 정적이 들어찬 걸 보니 아직 진식 안이 분명하다.
“어떻게 빠져나가죠?”
자운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분을 기다려 봐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쪽이 끝나면 진식이 파훼될 수도 있다는 건가요?”
“진식을 구축한 목적이 사라지면, 자동적으로 파훼되지 않을까요?”
“진식을 구축한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제 생각엔 이곳 대지가 완전하지 않는 것 같던데, 맞습니까?”
“네. 정령은 원래 정령의 땅에서만 살다가 소환 의식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가야 하고요.”
“정령의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운영이 물었다.
“소멸됩니다. 여기서 소멸이란,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걸 말합니다.”
“그럼 이곳 정령은 어떻게 된 건가요?”
“이곳에 있던 누군가가 정령이 돌아가지 못하게 잡아 둔 겁니다.”
이곳은 황가의 옛터와 비슷하다. 이곳의 주인은 정령을 잡아 두길 원했고 진식을 통해 정령의 땅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었다. 하지만 완벽하지 못해 정령들이 이상해졌고, 이상해진 정령에게 인간의 영혼이 달라붙은 것이다.
결국 진식의 목적은 정령을 붙들어 두기 위함이고 정령이 소멸하면 진식도 사라질 것 같았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하죠?”
“기다리면 될 것 같으니까 일단은 쉬세요.”
금장생과 자운영이 적을 없애고 휴식을 취하는 그 시각, 무혼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온다.”
갑자기 대기가 묵직하게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건 지금까지 겪었던 자들보다 더 강한 적이 이편을 향해 다가온다는 말이다.
무혼은 심호흡을 했다.
푸아악!
오 장 앞에서 흙기둥이 솟구쳤다. 기둥이 솟구치는 속도는 엄청났다. 마치 마법을 펼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혼은 혼천을 그러쥐었다.
“차하!”
그리고 전방을 향해 내던졌다.
슉!
혼천이 빛살처럼 날았다.
그가 펼치는 무공은 이기어검술이었다. 이기어검술의 가장 큰 강점은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는 것과 같은 이기어검술이 아니면 막아 낼 수 없는 강함에 있다.
푸아악!
혼천은 순식간에 다섯 개의 흙기둥을 잘랐다.
끄아악! 쿠어어억! 캬아아악!
고통에 겨운 비명이 흙기둥에서 터져 나왔다. 혼전에서 흘러나온 기운에 의해 정령과 귀신이 동시에 소멸해 버린 것이었다.
흙기둥들이 풀썩풀썩 쓰러지고 안쪽에 숨어 있던 악인곡 무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스악!
그 순간 혼천이 허공을 갈랐다.
“캑!”
“큭!”
“윽!”
비명은 길게 나오지도 않았다. 혼천이 향하는 순간 몸이 잘렸고 비명을 길게 지를 새도 없이 숨이 끊어졌다.
“차하!”
무혼은 기합과 함께 오른팔을 휘둘렀다.
슈아악!
혼천이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또다시 십여 개의 흙기둥이 쓰러졌다. 그 안에 있던 자들의 운명도 흙기둥과 다르지 않았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온 혼천에 죽임을 당했다.
카앙!
느닷없이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혼천이 튕겨 났다.
“어?”
무혼은 깜짝 놀랐다.
적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곧바로 이기어검술을 펼쳤다. 시간을 끌면 불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기어검술로 없앤 자가 오십 명 가까이 됐고 혼천을 막아 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누군가가 혼천을 막아 낸 것이다.
무혼은 혼천을 가슴 앞에 세운 채 전면을 보았다.
붉은색 도를 든 자가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사흉의 둘째 지흉 지정악이었다.
지정악은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가 데려온 대원은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강자다. 장차 악인곡이 중원 정복을 시작할 때 선봉에서 승승장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정복 전쟁은커녕 악인곡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몰살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단 한 명에 의해서.
“네가 팔왕이냐?”
지정악은 자신의 부하를 이렇게 도륙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자는 팔왕밖에 없을 거라 확신했다.
“팔왕?”
무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팔왕이냐?’라고 물었다는 건 무작정 공격한 게 아니라는 뜻이 된다. 즉, 어떤 목적에 의해 공격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너, 우리 알아?”
무혼은 물었다.
“팔왕가의 수장인 팔왕 일행이라고 들었다.”
“너희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한 자가 누구지?”
“무림오패 수장이다.”
“무림오패 수장이면 초인삼황인데, 초인삼황과 너희 악인곡이 한패였어?”
악인곡은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떠본 말이었다.
“여기가 악인곡인 걸 어떻…….”
지정악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무혼은 이미 악인곡이란 말을 접수했다.
“알고 있으니까 숨기려고 애쓸 필요 없어. 이제 조금 전 질문을 할게. 악인곡이 초인삼황과 손을 잡은 거야?”
무혼은 지정악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그건 알 필요 없지 않을까?”
지정악은 붉은색 도를 가슴 앞으로 세웠다.
그는 도로 시선을 주었다.
혈옥도血獄刀.
혈인참수도법血人斬首刀法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 혈인참수도법은 오백 년 전 무인인 혈발수라 척인의 무공이다. 혈인참수도법을 완성했지만 척인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부족한 내공 때문이었다.
척인은 부족한 내공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내공심법을 창안했는데, 그 내공심법은 흡정을 기본으로 했다. 즉, 자신의 내공을 높이기 위해 남의 내공과 정혈을 갈취한 것이다. 갈취로만 끝나면 좋은데, 내공을 갈취당한 자는 정혈이 고갈돼 죽었다. 정확하게 일천 명의 내공과 정혈을 갈취하고 나자 그는 천하무적이 됐다.
‘나 또한 그렇게 했다. 그 때문에 지흉이란 별호를 얻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인에게 있어 강함은 곧 선이고 법이기 때문이다.’
“차하!”
지정악은 혈옥도를 던졌다.
츠츠츠츠츠츠!
혈옥도가 섬뜩한 소성을 흘리며 무혼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 순간 무혼의 혼천도가 공간을 갈랐다.
카앙!
두 검은 강하게 부딪쳐 튕겨져 나갔다.
스아악!
검이 부딪치면서 흘러나온 반발력에 의해 주변 대기가 밀려나며 진공상태로 변했다.
무혼은 혼천으로 시선을 주면서 오른손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붙여 지정악을 가리켰다.
슈악!
혼천이 무서운 속도로 지정악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사이 지정악 또한 혈옥도로 시선을 주었다.
허공에 있던 혈옥도가 순식간에 공간을 건너뛰더니 혼천을 쳐 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각각의 도로 향했다.
그러자 혼천은 지정악을 향해 날아가고 혈옥도는 무혼을 향해 날아갔다. 가장 원시적이면서 가장 정확한 대결 방법인 빠르기 대결이었다.
다만 무기를 움직이는 수단이 검법의 최고 경지라 부르는 이기어검술일 뿐이었다.
“내가 빠르다.”
지정악은 눈을 부릅뜨고 혈옥도를 노려보았다.
무혼의 혼천이 날아오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검이 무혼의 몸을 뚫는 순간 혼천이 힘을 잃고 떨어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강화!”
지정악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 순간 무혼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퍼억!
지정악의 혈옥도가 무혼의 몸을 때렸다. 강화 마법으로 몸을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이기어검술로 날아온 혈옥도를 완전히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혈옥도는 무자비하게 무혼의 몸을 뚫었다. 무혼을 완전히 끝장내려는 순간.
파앙!
혼천이 먼저 지정악의 심장을 뚫었다.
순식간에 지정악의 심장을 뚫고 나온 혼천은 저 멀리 날아갔다.
툭!
무혼의 몸을 뚫고 들어가던 지정악의 혈옥도가 아래로 떨어졌다. 지정악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심장을 보았다. 피가 폭포처럼 뿜어져 나왔다.
“시간 차를 이용한 거냐?”
지정악이 무혼을 보며 물었다.
“이기어검술의 싸움은 상대의 검을 완전하게 막을 필요가 없어, 수천 분의 일 초라고 해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승리를 가져올 수 있지.”
“하지만 그렇게 한다는 게…….”
지정악은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무혼이 말한 건 이론적인 방법이다.
이기어검술로 검이나 도를 던지면 그 속도는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다. 오직 감각에 의존해서 막아 낼 수밖에 없고, 이기어검술에 이른 무인은 가능하다.
만일 그렇게 싸우다가 방어를 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이기어검술을 펼친 경우, 백분의 일 초라도 먼저 펼친 쪽이 승리할 가능성은 구 할 이상이다.
승자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먼저 펼친 자의 검이나 도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이기어검술로 던진 검을 피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피하지 않고 무기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는 몸속으로 파고드는 걸 방해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다. 계산을 잘못했거나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면 바로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아무리 호신강기에 자신이 있는 자라고 해도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놈이 그런 방법으로 승리한 것이다.
“자신의 실력을 믿어야지.”
무혼은 싱긋 웃었다.
물론 자신이 승리한 건 금강불괴지신과 호신강기 그리고 마법이 더해진 결과이긴 하지만 굳이 시시콜콜 말해 줄 필요가 없다.
어쨌거나 승자는 자신이다.
“잘 가라.”
“빌어먹을!”
푸스스스!
지정악의 가슴에 난 구멍이 점점 커졌다. 잠시 지정악이 서 있던 자리에는 가루만 남았다. 지정악을 없애고 난 무혼은 땅속에 혼천을 박아 넣고 정령귀를 전부 없앴다. 그가 서 있는 곳도 곧 대지 본래 상대로 돌아갔다.
“무 형!”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