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434화 (434/524)

황금가 (434)

금장생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을 밟고 선 것처럼 땅이 출렁거린다. 정령의 땅을 보지 못했다면 지금 광경을 보고 기절할 듯 놀랐을 것이다. 어쩌면 제대로 대응을 못 해 고전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사실을 접할 때 마음의 준비가 돼 있을 때와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 무기를 들고 싸우는 무인들에게는 그런 차이는 죽음을 불러올 수가 있다. 전에 정령의 땅을 겪어 본 덕분에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었다.

“무 형이야 뭐, 그쪽 출신이니까.”

바타르도 그렇고 무혼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문제는.”

금장생은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온몸을 피로 뒤집어쓴 자가 전면을 노려보고 서 있다.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구해 온 자운영이다.

“이거 마셔요.”

금장생은 푸른색 액체가 든 병을 자운영에게 내밀었다. 바타르 가방 속에서 나온 포션이라는 치료제였다.

“이건…….”

자운영은 금장생을 보았다.

“내상약입니다.”

“감사합니다.”

자운영은 사양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상황에서는 내상약이 아니라 독이라고 할지라도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면 복용해야 할 판이다.

살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고 더 이상 놀랄 일도 없을 거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겪은 일은, 아니 살아오면서 배운 모든 지식과 상식을 총동원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멀쩡한 땅이 기둥처럼 솟구치고 비명을 내지른다.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물처럼 물러지고 무인을 품었다가 뱉어 냈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고 자신이 당하는 당사자임에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감사는 무슨. 어려울 땐 돕고 살아야죠.”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전혀 놀라지도 않는군요.”

“전에 한번 겪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이런 곳이 또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없어졌지만 전에는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그거 드세요. 조금만 남겨서 상처에 바르면 금세 낫습니다.”

“네.”

자운영은 포션을 마셨다.

금장생의 말대로 조금 남겨 상처에 발랐다. 자운영의 내외상이 빠르게 치료됐다.

“엄청난 약이군요.”

자운영은 깜짝 놀랐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액체가 황실에서나 구할 수 있는 영약보다 더 약효가 좋았다.

“나도 내기에서 딴 거라 어떤 약인지 모릅니다.”

“누가 이런 약을 걸고 내기를 하죠?”

“바타릅니다.”

“아, 그분…….”

자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타르는 쳐다보기만 해도 왠지 신비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마시고 바르는 것만으로 내외상을 치료해 주는 특별한 약을 가지고 있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바타르가 금장생과의 내기에서 졌다는 게 약간 이상할 뿐이었다.

“오는 것 같습니다.”

금장생이 턱으로 전면을 가리켰다.

“땅속으로 오는 거군요.”

자운영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정령귀가 소멸된 땅이라 괜찮지 않을…… 헉!”

자운영의 눈이 커졌다.

그와 금장생이 서 있는 이곳부터 반 경 오 장은 정령귀가 소멸돼 더 이상 경계할 필요가 없는 평범한 땅이다. 그래서 약도 복용하고 몸도 추슬렀다.

그런데 오 장 건너편이 흐물흐물해지고 있다. 마치 납을 넣고 가열했을 때 가장자리부터 녹아들어 가는 광경을 보는 것 같다. 납은 두렵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데 땅이 녹는 광경은 섬뜩하다.

“이번에는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습니다.”

금장생은 긴장한 얼굴로 전면을 주시했다.

쿠어어어어어!

괴성과 함께 십 장 건너편에서 땅이 일어났다. 파도 형태로 일어난 땅은 폭 십 장에 높이도 십 장에 달했다. 땅은 빠른 속도로 이편을 향해 다가왔다.

“차하!”

금장생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오고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새카만 물체가 전방으로 폭사됐다. 삼천혼의 두 번째 무기 흑사아로 펼치는 흑우黑雨였다. 흑우는 일흔두 자루나 됐지만 좌우 폭은 물론이고 높이가 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흙 파도 앞에서는 너무 왜소해 보였다.

그러는 사이에 금장생과 자운영이 밟고 있던 땅은 빠르게 정령귀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며 물러졌다.

“뛰어요.”

금장생과 자운영은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쿠어억!

그 순간 거대한 흙 파도가 두 사람을 덮쳤다.

퍼억! 퍽퍽퍽! 퍽퍽!

흑사아가 훑고 지나간 흙 파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휙! 휙휘휙!

그 순간 흙 파도 속에서 수십 명이 튀어나와 금장생과 자운영을 향해 쏘아져 갔다.

“헉!”

자운영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알고 있으면서도 방어가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이 그랬다. 자신은 분명 흙 파도 안에 적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비도 했다.

그런데 막상 적이 튀어나오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금장생의 왼팔이 전면을 향한 건 그때였다.

“파이어!”

발사 명령이 터져 나오고 검은색 원반이 전방으로 튀어 나갔다. 수십 개의 원반은 가공할 속도로 날아다니며 적의 숨통을 끊었다.

“컥!”

“윽!”

“억!”

금장생과 자운영 바로 앞에서 악인곡 무인들은 비명과 함께 추락했다. 손만 뻗으면 공격할 수 있는 짧은 거린데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저승으로 직행했다.

푸아악! 푸아악! 푸아악!

아래쪽에서 흙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흙기둥의 수는 거의 백여 개에 달했다.

흙기둥 위에는 악인곡 무인들이 한 명씩 앉아 있었다. 그사이 금장생과 자운영은 흙 파도를 뚫기 위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조금 전 흑사아가 뚫어 놓았던 커다란 구멍이었다.

철벅!

막 뚫고 나가려고 하는데 위에서 흙더미가 쏟아져 구멍을 메웠다. 두 사람은 동시에 흙 파도에 달라붙었다. 흙 파도는 거대한 힘으로 두 사람을 빨아들였다.

딸랑!

금장생의 허리춤에 있던 제종이 강한 소리를 냈다. 음파는 곧 흙 파도를 때렸다.

쿠어어어억!

흙 파도에 달라붙어 있던 정령귀가 괴로운 괴성을 내질렀다. 그 바람에 금장생과 자운영을 빨아들이던 힘이 약해졌다.

휙!

금장생은 얼른 몸을 돌렸다.

흙기둥을 타고 올라온 백여 명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몸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차하!”

금장생은 백사아를 던졌다.

백안도 쏘고 싶지만 흑안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불가능했다. 전방으로 쏘아진 백사아가 한순간에 백여덟 개로 늘어났다. 순간 백색 폭풍이 불었다.

퍽! 퍽퍽퍽! 퍽퍽! 퍽퍽!

“크아악!”

“아악!”

“으아악!”

“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사방에서 가루가 휘날렸다. 백사아에 당한 자들은 순식간에 가루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잠시 후 상황이 드러났다.

금장생과 자운영을 향해 달려들었던 자들 중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다.

아니 한 명은 있었다.

그는 바로 사악의 셋째인 인흉 악추생이었다. 가루로 흩어진 다른 대원과 달리 악추생은 비교적 멀쩡했다. 악추생이 잃은 건 왼팔 하나뿐이었다.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다른 대원들에 비하면 악추생은 엄청 선방한 셈이었다.

금장생은 악추생 앞 삼 장 건너편으로 내려섰다.

“어?”

악추생을 발견한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그는 바로 북망산에서 본 적이 있던 사흉의 한 명이었다.

“당신, 사흉 중 한 명 맞죠?”

금장생은 왼팔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전에 북망산에서 본 기억이 났다.

휘리릭!

쏘아졌던 혈반이 이제야 돌아와 악마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흑사아와 백사아도 돌아와 본래 자리로 들어갔다.

“네놈이 나를 어떻게 아느냐?”

악추생의 눈이 커졌다. 금장생은 난생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전에 북망산으로 인도생인가 하는 그분과 함께 오지 않았나요?”

“그럼 거기서……. 혹시 막내를 죽인 자가 너냐?”

문득 든 생각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함께 간 자신의 이름은 모르면서 막내 인도생의 이름만 알 리가 없다.

“그분이 이걸 잘못 놀렸거든요.”

금장생은 자신의 하체를 가리켰다.

“잘못 놀렸다는 건 무슨 소리냐?”

“누군가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네놈이 죽였다는 말이구나.”

악추생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싸우기 전에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줄 건가요?”

“내게서 뭔가를 들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당신네들 조직에 대해서 알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내가 궁금한 건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예요.”

“궁금하면 직접 알아봐라.”

파앗!

악추생은 금장생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나랑 대화를 하고 있으면 수명을 조금이나마 더 연장할 수 있는데…….”

금장생은 악추생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먼저 공격한 자는 악추생이었다. 그는 시뻘겋게 변한 양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의 독문 무공인 혈악수血惡手였다. 혈악수는 살짝만 스쳐도 그 부위가 썩어 들어가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악한 무공이다. 악추생을 사흉의 한 명으로 만든 무공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추생은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어차피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게 무공인데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게 무슨 문제냐며 역설했다.

그 말이 맞긴 하지만 한번 형성된 평판은 바뀌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사흉의 한 명으로 남았다.

퍽! 퍽퍽퍽!

그의 혈악수는 금장생의 몸에 작렬했다.

“내가 이겼다, 놈!”

악추생은 득의만면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는 금장생을 빤히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응?”

악추생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자신의 혈악수에 격중됐으면 뒤로 물러나거나 피를 토하며 쓰러져야 한다. 그런데 금장생의 움직임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같은 속도로 다가왔다.

“죽일 놈!”

악추생은 다시 혈악수를 펼쳤다. 이번엔 여러 개가 아닌 두 개만 펼쳤다. 여러 개의 혈악수를 펼쳤을 때와 다른 점이라면 모든 힘이 두 혈악수에 집중되기 때문에 위력이 수배 이상 강해진다는 것이다.

퍼억! 퍼억!

이번에도 혈악수 두 개가 금장생의 몸에 작렬했다.

“응?”

악추생의 눈이 커졌다.

몸을 치는 느낌이 달랐다. 아무리 온몸을 호신강기로 둘렀다고 해도 살을 치는 느낌은 비슷하다. 그런데 방금은 쇠로 된 벽을 치는 것 같았다.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군요.”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어느새 그와 악추생의 거리는 일 장으로 가까워져 있었다.

“그게 무슨…….”

“이겁니다.”

금장생은 태극선의 앞섶을 젖혔다.

“가, 갑옷!”

바로 그때였다.

금장생이 젖힌 태극선의 안쪽에서 투명한 물체가 튀어나와 악추생의 심장으로 파고들어 갔다.

피하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컥!”

악추생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한순간에 돌이 된 것처럼 악추생의 모든 동작이 멈췄다. 악추생은 멍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심장에 구멍이 뚫렸지만 아직 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만 움직이지 못할 뿐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했다.

슉!

바로 그때 자신의 가슴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반투명한 막대기였다. 길이는 한 자 조금 더 되는 것 같았다.

악추생은 반투명한 막대기를 쫓았다. 막대기는 금장생의 가슴으로 날아가더니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내 가슴에서 나간 게 분명한데.’

악추생은 내심 중얼거렸다. 자신의 가슴에서 빠져나갔다는 건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는 걸 뜻한다.

‘내가 당한 건가?’

그는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시선을 내리는 걸로는 가슴 상황을 볼 수 없었다.

‘봐야겠어.’

그는 이를 악물었다.

힘을 쥐어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들어왔다. 몸에 구멍이 났으면 피가 흘러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뭐, 뭐냐…….”

푸스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장의 구멍은 점점 커졌고 숨이 끊어졌다. 곧 악추생은 가루가 돼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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