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33)
사흉
“진식에 걸렸네.”
무혼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주변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운무도 그대로고 땅도 그대로다. 없어진 건 바타르와 권말남, 금장생, 자운영뿐이다.
푸아악!
바닥이 다시 솟구쳤다. 무혼은 흙덩어리를 살펴보았다. 흙덩어리의 두께는 성인 세 명을 합쳐 놓은 것 같다. 높이는 십 장에 달하고 상층부에는 눈처럼 보이는 구멍 두 개가 나 있다.
녀석이 특징은 그게 전부다.
상당히 강한 힘이 느껴진다. 정령 본연의 힘은 아니다. 아마 귀신과 합쳐지는 과정에서 본래보다 더 강해진 것 같다.
“너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거야.”
무혼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금 전처럼 흙기둥의 상층부가 쩍 벌어지더니 무혼을 삼켰다.
“이건 허상이지. 나는 여전히 땅을 딛고 있거나 흙기둥 위에 있을 거야. 이런 경우엔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되지.”
무혼은 혼천을 거머쥔 채 기다렸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진식 안이라는 거고, 어떤 게 진짜고 어떤 게 가짜인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럴 땐…….’
스윽!
“기다리는 거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혼천을 쥔 오른팔을 오므렸다.
슉!
날카로운 기운이 머리를 스쳤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잘린 듯 얼굴로 흘러내린다.
무혼은 오므렸던 오른팔을 쭉 내밀었다.
푸욱!
혼천이 파고든 건 빈 공간이다. 그런데 삼분의 일 정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물체로 파고들었다는 뜻이 된다.
혼천을 쥔 오른손 손목을 오른편으로 강하게 틀었다.
“커억!”
비명과 함께 혼천이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의 경계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무혼은 혼천을 강하게 뽑았다.
츄아악!
적은 보이지 않는데 피만 뿜어져 나온다. 피를 감상할 겨를이 없다. 이번에는 오른편에서 차가운 기운이 달려든다. 숙였던 상체를 빠르게 들었다.
슉!
보이지 않는 뭔가가 얼굴을 스쳤다.
혼천을 오른편으로 그었다. 오른편 옆구리 앞에 있는 검을 오른편으로 휘두르면 적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 제대로 된 힘을 받지 못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다.
턱!
역시 적의 몸통으로 파고들어 가지 못한다.
오른편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혼천 손잡이 아래를 왼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왼발을 앞으로 옮기며 혼천을 오른편으로 잡아당겼다.
스악!
살을 가르는 느낌이 선명하게 왔다.
츄아악!
적은 보이지 않고 피만 보인다. 공격해 오는 적을 다 없애고 나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슉!
이번엔 가슴이다.
두 발은 그대로 두고 상체를 뒤로 눕힌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수법인 철판교다.
철판교 수법은 두 발을 땅에서 떼지 않고 뒤로 눕는다. 그때 등과 엉덩이 어느 부분도 땅에 닿아서는 안 된다. 누운 상태에서 뒷걸음질을 쳐야 하는데 엉덩이나 등이 붙어 있으면 속도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뒤로 누움과 동시에 혼천으로 앞을 가리키며 강기를 생성했다.
슉!
강기는 곧바로 허공 속에 숨은 적의 몸통을 뚫었다.
팍팍팍!
두 발을 움직여 자리를 이동했다.
푸아악! 푸아악! 푸아악!
사방에서 흙기둥들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솟구친 흙기둥은 여덟 개였다.
“억!”
무혼은 깜짝 놀랐다. 옆구리 쪽에서 솟아오른 흙이 자신의 몸을 땅속으로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내가 묻힐 곳은 여기가 아니라 샤이칸드리아 대륙이라고.”
무혼은 왼팔로 강하게 바닥을 쳤다.
반동을 이용해 허공으로 솟구치기 위해서였다.
숙!
“헉!”
무혼은 질겁했다.
바닥을 쳤던 왼손이 허공을 치는 것처럼 쑥 꺼져 버린 것이었다. 꺼진 것은 손뿐만이 아니었다. 몸통 또한 땅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쿠어억! 쿠어억! 쿠어억! 쿠어억!
하늘로 솟구쳤던 흙기둥 여덟 개가 무서운 속도로 고개를 처박았다. 마치 거대한 뱀이 먹이를 발견하고 공격하는 것 같았다.
아래로 내리꽂히던 흙기둥의 끝이 쩍 벌어졌다. 그러자 그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무인들이 뛰쳐나와 무혼을 향해 쏘아져 갔다.
흙기둥이 내리꽂히는 속도에 신법이 더해지자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무혼 앞에 도달한 악인곡 무인들은 각자의 무기를 내리꽂았다.
“블링크!”
무혼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온 건 그때였다.
푹! 푹푹푹! 푹!
악인곡 무인들의 검이 바닥에 꽂혔다.
“헉!”
“억!”
악인곡 무인들은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무혼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무혼을 빨아들인 공간은 폭이 한 자가 조금 넘는다. 한눈에 모두 들어오는 좁은 공간인데 살핀다고 해서 특별한 게 나올 리가 없다.
“뒤, 뒤다!”
악인곡 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헉!”
“억!”
그들은 질겁했다. 무혼이 벼락처럼 덮쳐 오고 있었다. 무기를 들어 올리기도 전에 혼천이 그들을 덮쳤다.
“크악!”
“아악!”
“으악!”
처절한 비명이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는 완전한 몰살이었다.
쿠어어어어! 쿠어어어!
악인곡 무인들은 죽었지만 정령귀는 여전히 강한 기운을 뿌려 댔다. 무혼은 정령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정령귀는 빠르게 크기를 줄었다.
“차하!”
무혼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오고 혼천이 정령귀가 사라진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손잡이만 남기고 끝까지 찔러 넣은 상태에서 내기를 쏟아부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 시작된 푸른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광채는 곧 땅을 뚫고 솟아 나왔다.
쿠어어억! 커어어어어억!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그곳으로부터 괴성이 터져 나왔다.
“젠장할!”
문득 처음 샤이칸드리아 대륙으로 떨어졌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언데드를 처음 보았다. 왼팔로 머리를 든 채 말을 타고 달리는 언데드 모습이 얼마나 섬뜩했던지. 그런데 땅이 입을 벌린 채 괴성을 내지르는 걸 보니 느낌이 그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끝났지.”
무혼은 혼천을 뽑아 들고 일어났다.
정령귀들이 모두 소멸한 듯 땅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진식 안쪽인 것 같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눈앞에 나타난 녀석만 없애면 된다.
“응?”
무혼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땅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파도치는 바다처럼 출렁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파도 안에서 많은 기척이 감지된다.
스아악!
느닷없이 오 장 앞쪽 흙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파도처럼 이편으로 밀려왔다.
무혼의 눈이 커졌다.
샤이칸드리아 대륙이라면 저런 광경이 그리 이상하지 않다. 땅의 정령이 힘을 발휘하면 땅을 호수처럼 만들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여긴 중원이다. 저런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스아악!
흙의 파도는 한 곳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뒤편에서도 커다란 흙의 파도가 일더니 이편으로 밀려왔다.
“진짜냐, 가짜냐?”
문득 이곳이 진식 안이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진식 안이라면 저런 일이 일어나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베어 버리면 된다.”
무혼은 흙의 파도를 향해 쏘아졌다.
허공을 가른 그의 신형이 곧 파도 앞에 도착했다.
“차하!”
“타하!”
“하아!”
기합과 함께 수십 명이 흙의 파도 속에서 튀어나와 무혼을 공격했다. 그때 무혼도 이미 화火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혼천은 가공할 화기를 부려 놓았다.
퍼억! 퍽퍽! 퍽!
화에 노출된 자들은 어찌해 볼 겨를도 없이 재로 흩어졌다. 공격을 마치자마자 혼천으로 바닥을 찔렀다. 곧 뇌 공격이 펼쳐졌다. 십만마도법 중 공격 범위가 가장 넓고 강한 무공이 바로 뇌였다. 사방으로 퍼져 나간 뇌 기운은 지상을 뚫고 나왔다. 여기저기서 정령귀의 비명이 비어져 나오고 땅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그가 땅을 먼저 원래 상태로 만든 건 반발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땅이 정령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손으로 치거나 발로 차면 쑥 꺼질 뿐 반발력을 얻지 못한다. 허공으로 솟구치는 건 고사하고 손발이 땅에 속박돼 공격도 방어도 하기 힘든 상태가 되고 만다.
“하지만 지금은?”
무혼은 바닥을 찼다.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가 허공으로 솟구치자 뒤편에서 달려들던 파도가 수십 개로 쪼개지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쪼개진 흙더미 위에는 검은 무복을 입고 검을 든 무인이 한 명씩 앉아 있었다. 흙더미는 무혼을 향해 쏘아져 왔다.
“차하!”
“타하!”
“이얍!”
흙더미 위에 앉아 있던 이들이 발을 튕겼다.
그리고 흙 파도 중간과 아래쪽에서도 검은 무복의 무인이 쏟아져 나와 무혼을 향해 쏘아져 갔다.
무혼이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가 쥔 혼천이 시뻘건 광채를 토해 냈다. 그 광채는 달려오는 악인곡 무인들을 집어삼켰다.
“커억!”
“크억!”
“아아악!”
“으악!”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후두두!
갈가리 찢긴 육편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무혼을 향해 달려들던 자들 중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척!
무혼은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혼천을 번쩍 쳐들고 뇌의 기운을 쏟아부으면서 땅속으로 박아 넣었다.
푸아악!
그를 중심으로 반경 오 장 안쪽에서 푸른 광채가 솟구쳤다.
쿠어어억! 커어어억!
땅은 거칠게 요동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파도 모양으로 솟구쳤던 땅은 그 모습 그대로 굳었다. 무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아. 여기서 며칠을 머물러도 상관없어. 너희들을 전부 없앨 거야.”
무혼은 오른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으음!”
무혼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혼을 노려보는 자는 지흉 지정악이었다.
원래 오 관문과 육 관문은 별도이면서 하나다.
진식을 발동하지 않으면 서로 다른 관문이지만 진식을 발동하면 하나가 된다.
놈들이 오 관문으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진식을 발동해 오 관문과 육 관문을 하나의 관문으로 묶었다.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고대에 만들어진 이곳에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이곳에 있는 토령귀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보통 무인은 토령귀만 보아도 기절할 듯 놀라고 무공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기 때문에 악인곡 무인은 나설 필요가 없다.
그런데 저자는 토령귀를 보고도 놀라지도 않고 토령귀 안에 숨어 있던 악인곡 무인을 없앨 뿐 아니라 토룡귀마저도 소멸시켜 버린다.
어디서 저런 자가 나타났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지정악은 검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넌 오늘 죽는다. 내 손에.”
지정악은 발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땅에 두 개의 구멍이 생겨나더니 곧 새하얀 광채로 들어찼다.
“오대 대원들은 나와 함께 땅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새하얀 광채로 들어찬 구멍이 지정악 앞으로 다가왔다.
스윽!
곧 지정악의 신형이 땅속으로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