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32)
사 관문은 삼 관문과 비슷했다. 다만 숨어 있는 자들의 무공이 더 강할 뿐이었다. 은신한 자들이 조금 더 강해졌다고 하지만 금장생 일행을 막지 못했다. 무혼과 금장생에게 토령전사들이 무너지자 관문은 금세 와해됐다.
네 번째 관문을 맡고 있던 인흉 악추생은 무리하지 않았다. 토령전사들이 무너지자 살아남은 대원들을 이끌고 오 관문으로 이동했다.
오 관문이라고 해서 특별히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느껴지면 그곳이 다른 관문이었다. 오 관문에는 뿌연 운무가 흐르고 있었다.
“진식입니다.”
전면을 바라보던 자운영이 나직하게 말했다.
“정령귀를 더 강하게 만드는 진식이겠죠?”
금장생이 말했다.
“정령귀?”
무혼은 금장생을 돌아보았다.
“정령과 귀신이 합쳐진 녀석들이나 정령귀가 적당할 것 같아서요.”
“일리가 있네.”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타르를 돌아보았다.
“왜?”
시선이 마주치자 바타르가 말했다.
“동료의 역할을 좀 하라고.”
“나는 충분히 하고 있는 걸로 안다.”
“너는 충분할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부족해.”
“지금까지 목숨이 위험한 적 있었느냐?”
“바타르가 물었다.”
“흠! 헌원소야와 비무했을 때를 빼면 없어.”
“너는 네가 해야 하는 약간의 수고가 싫어서 내가 해 줬으면 하는 기대를 품고 있다. 그건 좋은 자세가 아니다. 본인 일은 스스로 해야 하는 거다.”
“혹시…… 너, 몸이 완전하지 않은 거 아냐?”
무혼은 미심쩍은 얼굴로 바타르를 보았다.
“이, 이상은 무슨. 나는 완벽하다.”
바타르는 살짝 더듬었다.
사실 그의 몸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다. 마나 밀도가 낮은 중원의 대기는 처음엔 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식사량을 줄였다고 해서 당장은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낮은 마나 밀도가 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줄인 식사량으로 인해 영양 결핍이 오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본체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변화는 전에는 시동어만으로 펼칠 수 있었던 마법을 지금은 주문을 영창해야 하고 그마저도 회수에 제한이 있다는 사실이다.
“자식, 폼은…….”
무혼은 피식 웃었다.
이제야 비로소 바타르의 상태를 알 것 같았다.
자존심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 있지만 몸에 이상이 온 게 분명했다.
사실 무혼이 바타르를 부른 건, 드래곤이 가진 능력 때문이다. 모든 드래곤은 상대에게 근원적인 공포를 안겨 주는 기운을 지니고 있다.
그 기운에 노출된 자는 인간, 몬스터 할 것 없이 모든 사고가 정지될 정도로 극심한 공포를 경험하게 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 공포로 인해 죽는 자들까지도 있다. 그 공포를 드래곤 피어라고 부른다. 드래곤 피어는 중급 정령에게까지도 통한다. 비록 완전한 정령이 아니고 귀신과 결합된 정령귀 형태라고 하지만 정령의 의식이 남아 있다면 드래곤 피어가 통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관문에서는 무인만 상대하면 된다. 그래서 바타르에게 말을 걸어 본 건데, 기대할 게 거의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도 크게 도움이 되는 녀석이 아니었기에 문제 될 건 없다. 아직 이동 마법은 펼칠 수준은 되는 것 같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금장생을 보았다.
“뚫고 나가야지 별수 없잖아요.”
금장생이 말했다.
“편하게 갈까?”
무혼은 절벽 위로 시선을 주었다.
“한번 살펴볼까요?”
“그렇게 하자.”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권 첩형!”
금장생은 권말남을 보았다.
“네.”
바타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권말남이 금장생을 돌아보았다.
“정찰하고 오세요.”
“저 위요?”
“네.”
“알았어요.”
권말남은 바타르의 손을 놓았다.
“함께 가자.”
바타르는 권말남의 손을 다시 잡았다.
“플라이!”
바타르가 나직하게 외쳤다. 둘의 신형은 둥실 떠올랐다. 절벽 근처로 이동해서는 수직으로 날아 올라갔다.
“속도만 빠르면 최고의 신법인데.”
금장생은 아쉬운 얼굴로 바타르를 보았다.
중원에서 마법이 사라진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무공은 일 장 안쪽에서 싸우는 근접전이고, 일 초에 수십 합이 오가곤 한다. 반면에 마법은 주문을 영창 해야 하고, 시동어도 있어야 한다.
마법사와 무인이 붙어서 싸운다면 백이면 백, 마법사가 패하게 돼 있다. 물론 마법사에게는 이동 마법이 있어 공간이동이 가능하지만, 공격과 이어지지 못한다. 공격과 방어가 분리돼 있다는 게 마법의 가장 큰 단점이다. 반면에 무공은 공격이 방어고 방어가 곧바로 공격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타고난 재능보다는 노력이 고하를 결정하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천하제일이나 무림십패 같은 칭호를 얻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도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무인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본인 스스로 느끼기에 ‘내 수준에 이 정도면 됐어.’라는 수준까지는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다.
재능이 있어야만 될 수 있는 마법사와 오직 노력 하나만으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무인.
많은 이들이 무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마도 중원에서 마법이 사라진 이유가 그때문인 것 같다.
한편.
위로 올라간 바타르는 바로 인비지빌리티 마법을 펼쳤다. 인비지빌리티 마법은 허공에 몸을 숨기는 마법이었다. 둘의 신형이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바타르는 여전히 플라이 마법을 펼치고 있는 상태였다. 보통 인간 마법사는 두 마법을 동시에 펼치는 건 불가능하지만 드래곤인 그는 가능했다.
―어때?
바타르는 권말남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상당히 많은 자들이 은신해 있는 것 같아. 자기가 보기엔 어때?
―내 생각도 그래. 그런데 저자들은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나도 그런 느낌이 들어.
―그럼 저 아래쪽에 있는 자들과 여기에 있는 자들이 다르다는 결론이 나오는 건가?
―그런 것 같아. 자기야, 저쪽으로 가 보자.
권말남은 건너편을 가리켰다.
바타르는 곧바로 이동했다. 잠시 후 둘은 건너편 협곡 위에 도착했다. 그곳에도 역시 많은 무인들이 은신해 있었다. 건너편과 마찬가지로 숨어 있기는 한데 긴장감은 별로 없었다.
―자기야, 내려가자.
―알았어.
바타르는 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어때?”
일행 앞으로 가자 무혼이 물었다.
“위도 손님으로 꽉 차 있다.”
“올라가도 마찬가지라는 거네?”
“맞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자들하고는 상관없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숨어 있긴 한데 긴장감이 전혀 흐르지 않는다. 마치, 그러니까…….”
바타르는 적당한 어휘를 찾기 위해 고민했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자들 같다고요?”
금장생이 말했다.
“맞다. 딱 그 상황이다.”
바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를 막는 자들은 누굴까요?”
금장생은 자운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권 첩형, 나 좀 봅시다.”
“알았어요.”
권말남과 자운영은 자리를 떴다. 잠시 후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여기가 거기 같은데, 권 첩형 생각은 어떻소?”
자운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라면 악인곡 말하는 거예요?”
“권 첩형도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구만.”
자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금의위와 동창에서 복원회라 부르고 있는 그들은 원나라 잔당이다.
처음엔 원나라 잔당이 활동하고 있는 줄 몰랐다. 우연히 황실에서 원나라 잔당이 활동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고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걸려든 자가 황족 주건륭이었다.
원나라 마지막 황족이었던 주건륭이 어떻게 해서 명나라 황족이 됐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를 추격하는 와중에 수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양민이었던 그를 실전십패의 한 명으로 만들어 준 곳이 황실이었다. 주건륭에 대한 추격은 그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걸로 마무리됐다.
주건륭에 대한 소식을 다시 들은 건 십 년 후였다. 소위 악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을 규합하여 악인곡을 세웠다는 소문이었다. 동창과 금의위에서는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악인곡을 찾았다.
하지만 끝내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갑시다.”
자운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곧 금장생 일행이 서 있는 곳으로 갔다.
“악인곡이란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운영은 금장생을 보며 말했다.
“악인곡이 뭐죠?”
금장생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삼사천가에서 중원무림에 대한 많은 걸 배웠다. 무림 세력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공부했다. 하지만 악인곡이란 단체는 없었다.
“실전십패의 한 명인 건륭이 세운 조직입니다. 소문에 불과하지만 실전십패와 악인십패 대부분이 포함됐다고 합니다.”
“악인들의 집합소라는 거냐?”
무혼이 물었다.
“네.”
자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왜 우리를 막는 거죠?”
이번엔 금장생이 물었다.
“그건…….”
자운영은 말끝을 흐렸다.
“모른다는 거네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자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우리가 저 위로 피하면 어떻게 될까요?”
금장생은 협곡 위를 가리켰다.
“그럼 이놈들은 쫓아올 테고, 위에 있는 자들로부터도 공격을 받게 될 거다.”
대답은 바타르가 했다.
“두 배로 힘들어진다는 거군요.”
“내 생각은 그렇다.”
바타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가자.”
무혼이 금장생을 보며 말했다.
“그게 낫겠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곧 관문 안으로 진입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운무가 일행을 감쌌다. 금장생은 바닥을 바라보았다. 아래쪽 운무는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땅도 약간씩 움직였다.
금장생은 그 자리에 멈췄다. 그러자 몸이 저절로 이동했다.
쿠어억!
일행 바로 밑에서 흙덩어리가 솟구쳤다.
허공으로 솟구치는 속도는 엄청났다. 일행은 순식간에 오 장 높이까지 올라갔다.
“피해!”
일행은 바닥을 차고 몸을 날렸다.
푸악!
푸아악!
흙기둥이 터져 나가며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이 튀어나왔다. 일행은 모두가 허공에 뜬 상태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 상태에서 무기를 뽑았다.
캉! 캉캉! 캉!
허공에서 불똥이 튀었다.
반발력을 이용해 재주를 넘으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쿠어억!
쿠어억!
막 바닥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괴성과 함께 땅이 솟구쳤다.
푹! 푹푹! 푹푹!
흙기둥의 상층부가 입처럼 갈라지더니 금장생 일행을 삼켰다.
“차하!”
무혼은 발밑을 향해 혼천을 찔러 넣었다.
푸욱!
뭔가로 박혀 들어가는 느낌이 왔다.
“풍風!”
그 상태에서 십만마도법의 초식을 펼쳤다. 혼천으로 밀려들어 간 바람의 기운은 곧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퍼어어억!
흙더미가 사방으로 날리고 안쪽이 드러났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앞 관문에서는 세 명에서 네 명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번엔 없었다.
“없는 게 아니라 내 눈에 안 보이는 거였네.”
무혼은 그 자리에서 회전하면서 혼천을 휘둘렀다.
“……?”
무혼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아무것도 걸려들지 않았다.
“차하!”
버럭 기합을 내지르며 혼천을 수직으로 그었다. 공간을 가르면서 그가 펼친 무공은 폭暴이었다. 폭의 특징은 주변을 초토화시켜 생명체를 말살한다는 데에 있다. 강한 기운이 혼천을 통해 빠져나갔다.
공간이 찢기면 그 안에 있는 자들도 갈가리 찢겨 어육이 돼야 한다.
“이건?”
무혼은 혼천을 보았다. 방금 펼친 폭의 범위는 오 장이 넘는다. 그 안에 생명체가 있다면 무조건 걸려들어야 한다. 그런데 혼천은 허공만 갈랐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무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바로 옆에 있던 동료들이 보이지 않았다. 바타르도 금장생도 자운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