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31)
금장생이 왼손으로 삼백육십혈부를 펼친 건 라에게 흙기둥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상탭니까?
―자아가 없는 정령에 귀신이 붙었다.
―귀신이라고요?
―응.
―그래요?
금장생은 다시 천마구유이혼대법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눈에도 흙기둥에 달라붙어 있는 귀신이 보였다. 그런데 귀신의 모습이 지금까지 본 많은 귀신과 달랐다. 일상적인 귀신은 살아생전의 모습이나 죽을 당시 모습을 하고 있는데, 흙기둥에 붙어 있는 귀신들은 온몸에 울퉁불퉁한 혹이 난 괴물에 더 가까웠다.
―어떠냐?
라가 물었다.
―귀신도 정상이 아닌 것 같아요.
―서로를 장악하려다가 귀신도 정령도 아닌 중간형태가 돼 버린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아요.
금장생은 가방에서 태극선의를 꺼내 갑옷 위로 걸쳤다. 귀신을 본 이상 해탈시켜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먼저 혈종을 꺼내 손잡이에 달려 있는 고리를 손목에 끼웠다.
오른손에는 칠성검인 묵야墨夜를 들고 왼손에는 무검인 사백死白을 들었다. 용각인 금소金簫를 꺼내 입에 물었다. 등으로 의식을 집중하자 단음인 혈라가 튀어나와 얼굴 앞 허공에 멈춰 섰다.
금장생은 혈라에 시선을 주었다.
혈라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딸랑! 딸랑! 달랑!
혈라가 굉음을 토해 내고 제종이 울음을 토했다.
삐이이이이이이!
두 소리에 금소의 운율이 섞여 들었다.
크아아아! 캬아아아아! 쿠어어어어!
흙기둥에 달라붙어 있던 귀신들이 괴로운 괴성을 내질렀다.
파앗!
순간 금장생의 신형이 전방으로 폭사됐다.
오른손에 쥔 묵야 끝에서 검은 광채가 쭉 튀어나오고, 왼손에 쥔 사백에서는 하얀 광채가 튀어나왔다. 흙기둥 앞으로 간 금장생은 묵야와 사백을 가위 모양으로 엇갈리게 한 다음 좌우로 그었다.
묵야와 사백은 정확하게 정령과 귀신이 합쳐진 괴물의 몸통을 갈랐다.
쿠어어억!
괴물은 괴성을 내질렀다.
푸스스!
흙기둥이 가루로 변해 흩어지고 안에 숨어 있던 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흙기둥 안에 있던 자는 세 명이었다. 묵야와 사백이 두 번째 광채를 토했다. 조금 전과 같은 검고 흰 기운이 반투명한 강기였다.
뎅
스악!
스악!
가장 먼저 제종이 울고 묵야와 사백이 위쪽과 아래쪽을 갈랐다.
컥!
맨 위에 있던 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주르르!
사내의 칠공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부서진 사내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사이 묵야와 사백에 잘린 두 명의 머리가 뚝 떨어졌다.
흙기둥 하나를 없앤 금장생이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자운영이 소리치며 금장생을 따랐다.
“좋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법기를 이용하여 귀신과 정령이 합쳐진 괴물을 없앴다. 정령과 귀신이 합쳐진 괴물이 소멸하면서 바로 흙기둥이 쓰러지고 안쪽에 숨어 있던 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차하!”
자운영은 곧바로 달려들어 그들을 없앴다.
정령의 도움을 받지 못한 무인들은 자운영의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당한 분풀이를 하듯 자운영은 잔인하게 적을 도륙했다. 무혼에 이어 금장생까지 정령과 귀신을 없애자 흙기둥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 지나자 더 이상 흙기둥은 생겨나지 않았다.
“흠!”
무혼은 전면을 바라보았다.
흙기둥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오십 명 정도가 서 있었다.
“누구냐?”
선두에 서 있는 수수를 보며 물었다.
“알 것 없다.”
수수는 양팔을 자연스럽게 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팔소매에서 낙엽처럼 생긴 것들이 튀어나와 그녀 근처로 늘어섰다. 상당히 강한 바람이 부는데도 파르르 떨기만 할 뿐 날리지 않았다.
‘강자!’
무혼은 긴장했다.
앞에 선 자는 지금까지 겪은 조무래기 무인이 아니었다. 팔왕가 가주들만큼 강자였다.
“네가 수장인 모양이구나.”
무혼은 전 내력을 끌어 올려 혼천에 주입했다.
웅! 웅웅! 웅웅!
혼천이 파르르 떨며 희미한 광채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분의 부하에 불과할 뿐이다.”
수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는 겉모습만 담담하게 보일 뿐 내심은 경악하고 있었다.
두 번째 관문 진식을 이용한 곳이라 쉽게 통과할 수 있다고 하지만 세 번째 관문은 하급 토령전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제삼관을 지키는 토령전사들은 지금까지는 불사신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없애지 못했다. 자신이 직접 시험도 해 보았다. 수백 조각으로 잘라 냈지만 없애지 못했다. 그런데 저들은 너무나 쉽게 토령전사를 없애 버린 것이다.
마치 천적처럼.
악인곡에서 책임을 진다는 건, 적이 됐건 자신이 됐건 둘 중 한 명의 피는 바닥에 뿌려져야 함을 뜻한다. 그래야 설사 패한다고 하더라도 다음 관문에서 상대하기 편하다. 지금 있는 이 삼관까지 책임자는 자신이고, 책임자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
“차하!”
수수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무혼을 향해 쏘아져 갔다. 한 번에 삼 장을 건너뛴 그녀는 양팔을 강하게 털었다. 그러자 그녀 주변에 있던 붉은 이파리들이 무혼을 향해 쏘아졌다. 그녀가 나아가는 속도가 더해져 붉은 낙엽이 날아가는 속도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무혼을 향하 날아가던 낙엽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적엽 수수!”
자운영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파앗!
그 순간 무혼의 신형이 전방으로 폭사됐다.
“강强!”
무혼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손에 들린 혼천이 빠르게 원을 그렸다. 강기로 만들어진 커다란 벽이 생겨났다. 그 벽은 무혼보다 한발 앞서 나아갔다.
캉! 캉캉!
강기막에서 불똥이 튀었다.
“차하!”
수수의 오른손이 하늘로 향했다.
“패覇!”
바로 그 순간 무혼의 입에서 두 번째 기합이 터져 나왔다. 강기막이 사라진 공간으로 가공할 기운이 쏟아져 들어갔다. 모든 것을 부수는 패력이었다.
“하아!”
수수의 입에서도 다시 기합이 터져 나왔다.
파아앗!
그러자 무혼의 뒤편에서 붉은 광채가 나타났다. 붉은 광채는 무서운 속도로 무혼의 뒷목을 노리고 쏘아져 갔다.
쿵!
바로 그 순간 무혼의 오른발이 바닥을 힘껏 찍었다. 붉은 광채는 이미 무혼의 뒷목 석 자 앞까지 나아간 상태였다. 그런데도 무혼은 그 광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모르는 게 아니었다. 바로 뒤에서 수수가 던진 암기가 날아온다는 걸 알고 있었고, 전 내공을 끌어 올린다고 해도 막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앞 관문에서 무혼의 옆구리에 상처를 낸 녀석이 바로 이 암기였다.
만일 앞에 있는 여자가 자신보다 많이 약했다면 무혼은 공격보다는 방어를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팔왕가 가주들에 버금가는 강자. 기회를 주면 당한 사람은 자신이 될 게 분명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승리를 가져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확실한 무공도 있었다.
“뇌雷!”
번쩍!
무혼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오고 푸른 광채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무혼의 뒷목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쏘아지던 붉은 광채는 목 바로 앞,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머리카락 하나 차이를 두고 멈췄다가 뚝 떨어졌다.
“이건?”
수수는 무혼을 보았다.
“십만마도법이라고, 천마가 다듬은 무공이다.”
“마의 조종이라고 부르는 그 천마 말이냐?”
“응.”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낫군.”
수수는 피식 웃었다.
츄악!
웃음 때문에 몸이 흔들려서인 듯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피 분수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편 허리까지 이어졌다.
쩌억!
곧 피 분수를 따라 몸통이 갈라졌다.
쿠웅!
둘로 나뉜 몸통이 상체는 왼편으로 하체는 오른편으로 넘어졌다.
“차하!”
“타하!”
“죽여라!”
수수 뒤편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기합과 함께 몸을 날렸다.
“차하!”
“타하!”
무혼과 금장생, 권말남, 자운영은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들의 무기가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크악!”
“아악!”
“으악!”
처절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편은 네 명에 불과하고 적은 오십 명이나 됐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무혼이 혼천을 휘두를 때마다 대여섯 명씩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금장생이 휘두르는 왜도도 다르지 않았다. 일도에 한 명씩이었지만, 장도와 소도가 새하얀 광채를 남길 때마다 어김없이 주검이 생겨났다. 오십 명을 모두 없애는 데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무림오패가 맞아?”
주위가 잠잠해지자 무혼이 물었다.
문득 이곳에 있는 자들은 무림오패와는 상관이 없는 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림오패가 아니라면 우리를 왜 공격하죠?”
“자기네들 땅에 침략했다고…….”
무혼은 말끝을 흐렸다. 너무 억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가로막지 않았다면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일부러 막아섰다는 건 안다는 뜻이고, 중원무림에서 자신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을 해 올 이들은 무림오패뿐이다.
“좀 더 가 보면 어떤 자들인지 나오겠죠.”
무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제일관주가 당했습니다.”
잔능은 굳은 얼굴로 보고했다.
“수수가 죽었다고?”
건륭은 되물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일, 이, 삼 관문을 지키던 대원들이 모두 당했습니다.”
“생존자는?”
“없습니다.”
“그렇겠지.”
건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자는 관문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규칙을 만든 사람이 자신이다. 그곳을 맡은 대원들이 살아남았을 리가 없다.
“놈들은 지금 사 관문에 있겠구나.”
“조금 전에 천흉, 지흉, 인흉이 나갔습니다.”
사악 중 인흉 악추생, 지흉 지정악, 천흉 임사생은 사관, 오관, 육관을 담당한다. 원래는 사악 네 명이 여섯 관문을 담당했는데 수흉 인도생이 천수십병을 찾으러 갔다가 북망산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적엽 수수가 그 자리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그들로 막을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관문이 뚫린다고 해도 사악은 혼자 덤비지 않을 겁니다. 육 관문까지 이동한 후 거기서 승부를 보려고 할 겁니다. 물론 사 관문과 오 관문에서 놈들을 잡지 못한다고 가정했을 때 이야깁니다. 사 관문이나 오 관문에서 놈들을 없애게 되면 굳이 힘을 합칠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겠지. 그리고 무림오패 놈들은 지금 어디 있지?”
“위쪽에 있습니다.”
“협곡 위?”
“네. 아마도 놈들이 흑풍협을 통과하는 걸 포기하고 위로 올라왔을 때를 대비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만 당할 수는 없겠지?”
“그들도 공격하려고요?”
“완전히 없앨 생각은 하지 말고 치고 빠져.”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잔능은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잔능은 그의 처소로 들어갔다.
“사악주께 연락해서 내가 보잔다고 해라.”
집무실 의자에 앉으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네.”
대답과 함께 발소리가 멀어졌다. 삼남일녀가 잔능의 집무실로 들어온 건 한 식경 후였다. 오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이들은 악인십패 중 사악으로 불리는 네 명이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는 정악 문자욱이고 붉은 머리카락 사내는 혈악 이무보, 시체처럼 창백한 자는 마악 종근, 척 보기에도 사악한 인상을 가진 자는 사악 황보산이다.
“부르셨습니까?”
네 사람은 잔능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자네들에게 할 말이 있네.”
잔능은 현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우린 흑풍협 위로 올라가서 놈들을 골려 주라는 말입니까?”
“정체를 들켜서도 안 되고 우리라는 흔적을 남겨서도 안 되네.”
“알겠습니다.”
사악 황보산이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