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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428화 (428/524)

황금가 (428)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건륭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입가에서 시작된 미소는 점점 좌우로 퍼져 나가더니 온 얼굴을 덮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지옥의 악귀 형상으로 변했다. 분명 활짝 웃는 게 분명한데도 차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극성에 달했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잔능이 빙긋 웃었다.

잔능은 건륭을 다시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둘은 만나자마자 아무런 말도 없이 비무를 시작했다.

그 당시 자신은 건륭에게 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악인십패 중 서열 일위고 무림십패 서열 일위인 초무강보다 강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패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었다.

둘이서 꼬박 하루를 싸웠다. 결국 패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때 건륭이 마지막에 보여 준 게 바로 저 미소다.

지옥혈사마공地獄血邪魔功.

무림사에 등장한 마공 중 가장 사악하다고 알려진 절대 마공. 일만 명 이상의 정혈을 갈취해야만 완성할 수 있다는 저주 마공이며 구결을 암기하는 것만으로도 강호공적이 되는 금지 마공이 바로 지옥혈사마공이다. 그 마공의 가장 큰 특징은 미소를 짓게 되면 나타나는 악귀상이다. 그 마공을 건륭이 익히고 있었다.

자신과 싸웠을 때만 해도 지옥혈사마공은 팔 성 정도였다. 악귀 형상의 미소이긴 하지만 봐 줄 만했다. 그런데 지금은 마주 쳐다볼 수가 없다.

완성됐다는 뜻이었다.

“크크크!”

이윽고 건륭의 입에서 괴이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저자를 믿습니까?”

잔능이 물었다.

뚝!

웃음소리가 뚝 그치며 건륭의 얼굴에서 미소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본래 서글서글한 모습을 돌아갔다.

“삼백 년 이상 사는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느냐?”

건륭이 물었다.

“모릅니다.”

“요괴 혹은 요물이라고 한다. 너 같으면 그런 것들을 믿겠느냐?”

“그런데 왜?”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됐기 때문이다.”

“놈은 우리를 이용하고 버릴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잔능. 나는 놈들을 이용해서 중원과 황실을 정복한 다음 버릴 거다.”

“하지만 버리기 전까지는 협조한다는 거군요.”

“맞다.”

“우린 놈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춘추오패의 주인이란 사실뿐입니다.”

“더 있을 거라고 보느냐?”

“왠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놈도 우리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지 않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에겐 새로운 기회다, 잔능. 기회가 왔다고 느꼈다면 잡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잔능은 전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좌무백과 철전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좌무백에 대해 조사해서 보고하란 명령을 내려라.”

“알겠습니다.”

잔능은 고개를 숙였다.

한편.

악인곡을 나와 지옥협을 걷고 있는 좌무백과 철전혼도 비슷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자를 믿습니까?”

철전혼이 물었다.

“안 믿는다.”

“그럼 왜 그런 제안을…….”

“놈을 보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누가 떠올랐단 말입니까?”

“토곤테무르를 아느냐?”

“토곤테무르요?”

“하면 혜종은 아느냐? 시호는 순제다.”

“혜종이고 시호가 순제면…… 원 제국 마지막 황제군요.”

“맞다. 토곤테무르는 원나라 마지막 황제다.”

“건륭 그자가 혜종과 관계가 있을 거란 말입니까?”

“확실하진 않다. 다만 혜종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리고 뿌리를 뽑아낸 것 같지만 중원엔 원나라 잔재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단순한 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군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될 게다.”

“그런데 그자가 팔왕을 처리해 줄 거라고 보십니까?”

“오늘 그자를 본 느낌이 어떻더냐?”

“일만 명 이상을 없앤 마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자였습니다.”

철전혼이 겪은 개세마두라고 불리는 자들은 다혈질이면서 늘 흥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바로 손이 나간다. 손 속도 잔인하다. 보통은 경고의 의미를 담아 심하다고 해도 약간의 상처만 입히는데, 개세마두들은 바로 없애 버린다. 물론 전혀 반대 성향을 지닌 마두도 있지만 대부분이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건륭은 달랐다.

다혈질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냉철해 보였다.

“만일 네가 원나라 후예고, 쫓는 자들이 원나라를 멸망시킨 자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일만 명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수라도 기꺼이 죽였을 겁니다.”

“그래서 놈을 의심하는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자가 원나라 후예가 맞다면 중원으로 눈을 돌릴 가능성이 높겠군요.”

“맞다. 중원무림이 지닌 잠재력은 엄청나다. 물론 나라를 바꾸는 건 무리다. 하지만 황실을 뒤집어엎을 수는 있다.”

“세 분처럼 말입니까?”

“그렇다. 놈은 진작부터 중원무림에 관심을 두었을 게다. 하지만 춘추오패라는 거대한 벽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관망만 하고 있었지. 그런데 무림오패에 필적하는 단체가 나타났고 그들이 전쟁을 치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다.”

“기회가 왔다고 느끼겠군요.”

“맞다. 그리고 자기가 신경 써야 할 자가 누군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주공께서 무림오패의 주인이라고 했으니까, 주공을 경쟁자로 여기겠군요.”

“맞다. 나다. 그런데 내가 팔왕 그자의 실력이 나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럼 팔왕을 이기면 나도 이긴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아까 주공께서 팔왕의 실력이 주공과 비슷하다고 했을 때 투기를 흘렸던 거군요.”

철전혼은 건륭이 투기를 흘렸을 때를 떠올렸다. 느닷없이 투기를 흘리기에 의아해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주공 때문이었다.

“놈은 자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팔왕과 싸우려 할 것이다. 팔왕은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겠지.”

“주공께서는 판을 벌여 준 셈이군요.”

“지금부터 우린 구경만 하면 된다.”

좌무백은 싱긋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철전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금장생이 천야교로부터 전갈을 받은 건 점심 무렵이었다. 그는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계획 있어?”

무혼이 물었다.

“제 계획대로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산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어떤 계획인데?”

“일단 남쪽으로 갈 생각입니다.”

“남쪽?”

무혼은 의아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지금 가는 방향은 북쪽이다. 그런데 남쪽으로 간다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

“흑풍협에 대해 아는 사람?”

무혼은 화제를 돌렸다. 대답이 짧다는 건 말해 줄 의사가 없다는 걸 뜻한다. 저절로 알게 될 텐데 굳이 조바심 낼 필요가 없었다.

“들어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자운영이 말끝을 흐렸다.

“거기를 통해 산을 빠져나간 다음 남쪽으로 가면 되니까 일단 가시죠.”

금장생은 앞장섰다.

일행은 금장생을 따라 몸을 날렸다.

일행이 흑풍협 입구에 도착한 건 어둠이 주변을 물들이는 저녁 무렵이었다.

흑풍협은 아래쪽은 넓고 위쪽은 붙은, 마치 거대한 뿔을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바닥에서 위쪽까지 높이는 오십 장은 돼 보였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네.”

무혼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나자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지가 나타났다. 경사는 가파르지 않았지만 이십 장가량 이어졌다. 바닥에 내려서자 절벽 위쪽이 더욱 멀어져 보였다. 절벽 위쪽이 딱 붙지는 않는 듯 벌어진 틈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경사지는 다시 평지로 바뀌었다.

평지를 따라 백 장가량을 걷자 시야가 확 트이며 넓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좌측 벽에서 우측 벽까지 거리가 십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저 벽이 너무 매끈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무혼은 좌우측 벽을 가리켰다.

보통 절벽은 돌들이 들쑥날쑥하고 끝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절벽 면은 바닷가에 굴러다니는 몽돌처럼 매끈했다.

“그렇네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렇게 됐을 거라고 생각해?”

휘이익! 쉬이익!

무혼이 묻는 순간 특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원인을 찾은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얼른 절벽으로 붙었다.

“뭐 하는 거냐?”

무혼은 의아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쐐애액!

바로 그때 엄청난 바람이 무혼과 바타르, 권말남, 자운영을 후려쳤다.

“헉!”

“억!”

“어?”

일행은 깜짝 놀랐다. 그는 급하게 내공을 끌어 올려 자세를 잡았다.

턱! 퍽! 퍽퍽! 퍽!

강풍에 쓸려 날아온 돌이며 나뭇조각이 무혼 일행을 때렸다. 그들은 급하게 금장생 곁으로 이동했다.

금장생이 몸을 밀착한 곳은 앞쪽이 약간 튀어나와 강풍을 피할 수 있는 지형이었다.

“이 바람 때문에 절벽이 깎여 나간 모양이다!”

무혼이 크게 소리쳤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여기로 가야 하는 거냐?”

“흑풍협을 통해 가면 백 리고, 저 위로 가면 이백오십 리를 가야 합니다.”

금장생은 검게 변한 하늘을 가리켰다.

“밤새도록 이렇게 바람이 불까?”

무혼이 물었다.

“흑풍협이란 이름이 그래서 생겨난 거 아닐까요?”

“검은 바람이라 이거지?”

“네.”

“가자.”

무혼은 바람 속으로 들어갔다. 보통 사람 같으면 발을 떼기 힘들 정도로 강했지만 일행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바람 속에 섞여 있는 이물질 때문에 눈을 뜨기 어려울 뿐이었다.

“어?”

바타르와 권말남을 보던 무혼의 눈이 커졌다.

강기로 구형의 막을 만들어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투명한 투구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무혼은 그들처럼 강기를 투구 형태로 만들어 머리에 썼다.

무혼이 만들자 금장생과 자운영도 따라 했다.

이제 강풍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행은 바람을 맞으며 나아갔다. 밤이 점점 깊어지면서 시계가 짧아지더니 어느 순간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응?’

금장생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지금까지 반 시진 이상 바람 소리를 듣다 보니 바람에 실려 오는 이물질의 크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지금까지 들었던 것과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훨씬 크고 무거우며 더 빨랐다. 강풍 속에서 크고 무거운 물체가 더 빨리 날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다.

―주의하세요.

―사람이다!

금장생과 무혼이 동시에 일행에게 전음을 보내면서 몸을 굴렀다.

스악! 스악!

섬뜩한 기운이 허공을 갈랐다.

―위로 올라간다.

무혼은 금장생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떤 건지 아세요?

금장생은 전음으로 물었다.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하긴.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온다!

―아무래도 하나를 잡아 봐야겠습니다.

금장생은 가방 안에서 왜도를 꺼내 허리에 찼다. 그러고는 자세를 잡고 강기막을 푼 후 눈을 감았다. 어차피 눈을 뜬 상태에서도 볼 수 없다면 감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오 장 앞이다.’

금장생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슈캉! 슈캉!

무기를 뽑은 사람은 금장생뿐만이 아니었다. 왼편으로 일 장 떨어진 곳에 있던 무혼도 검을 뽑아 휘둘렀다. 두 사람의 검은 허공을 사선으로 갈랐다.

철컥! 철컥!

허공을 향했던 두 사람의 무기가 거의 동시에 원래 자리로 들어갔다.

털썩! 털썩!

그리고 검은 물체 두 개가 두 사람 앞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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