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427화 (427/524)

황금가 (427)

동상이몽

사내의 얼굴은 강인해 보였다.

검이나 도도 사내 앞에서면 위축돼 피해 갈 것만 같았다. 장포로 몸을 감싸고는 있지만 전신 근육은 늘 최강의 힘을 낼 수 있도록 준비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키는 육 척이 채 안 돼 보였다.

얼굴은 둥글고 눈빛은 서글서글했다.

일만 명 이상을 살해한 마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선해 보이는 외모였다. 이 사람이 바로 광마투신 건륭이었다.

“나는 좌무백이오.”

좌무백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삼백 년 전 좌무백이란 이름으로 불린 무인이 있었는데, 혹시 그 사람이오?”

건륭은 물었다.

“좌무백은 활동할 때도 쉰 살이 넘었던 사람이고 삼백 년이 지났으니까 최소한 삼백오십 살이란 소린데,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시오?”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당신이 좌천심황 좌무백이라는 쪽에 내 머리를 걸겠소. 그리고 당신이 좌천심황 좌무백이 아니라면 할 이야기가 없소.”

건륭은 좌무백을 빤히 바라보았다.

초인삼황의 좌무백이 아니라면 볼 필요도 없으니 나가라는 말이었다.

“맞소. 난 그 좌무백이오.”

좌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건륭은 그의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의 처소에서 푸른 광채가 흘러나왔다.

건륭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공동 중앙이었다. 나타날 때 건륭은 푸른 광채에 휩싸인 채였다.

“이동 마법이군.”

좌무백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공간이동을 하는 저것이 마법이란 말입니까?”

철전혼이 물었다.

“맞다. 대부분의 마법은 사라졌는데 여기에는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구나.”

“여기로 오시오.”

건륭은 중앙의 탁자 앞으로 가 앉으며 말했다.

좌무백과 철전혼은 그곳으로 갔다. 공동 정중앙에는 둥근 탁자와 여덟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는 지름이 일 장에 달할 정도로 컸다. 재질은 탁자와 의자가 모두 돌이었다.

탁자와 의자에는 정교하게 조각이 돼 있었다.

좌무백의 시선이 조각에 고정됐다. 의자에 등받이에 새겨진 그림은 모두 달랐다. 어떤 의자는 뿔이 달린 투구가 조각돼 있고 어떤 의자는 날개 형상이었다. 숲과 나무를 표현한 의자도 있고 대지를 표현한 의자도 있었다.

탁자와 의자가 표현하는 건 바로 중원을 지배했던 여덟 가문이었다. 좌무백은 날개 형상의 등받이가 새겨진 의자로 가 앉았다.

건륭은 그런 좌무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좌무백이 앉자 철전혼이 그 뒤로 가서 섰다.

건륭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아는 철전혼은 춘추오패의 한 곳인 운성의 성주고 중원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인 무림십패의 일인이다. 그런 그가 의자에 앉지 않고 좌무백의 뒤로 가 섰다. 누군가의 뒤로 가 섰다는 건 부하라는 뜻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철전혼에게 상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너도 앉아라.”

좌무백이 철전혼에게 말했다.

“네.”

철전혼은 좌무백의 왼편으로 갔다. 그가 앉으려고 한 의자는 등받이에 뿔이 달린 투구가 조각돼 있었다.

“그게 아니다.”

좌무백이 말했다.

“네?”

철전혼은 의아한 얼굴로 좌무백을 보았다.

“등받이에 검이 조각된 의자에 앉으면 된다.”

검이 조각된 의자는 좌무백이 앉아 있는 의자로부터 오른편으로 한 자리 건너였다.

철전혼은 그 의자로 가 앉았다.

“의자 등받이에 새겨진 그림의 의미를 아시는 것 같은데, 맞소?”

건륭은 좌무백을 보며 물었다.

“내가 앉은 이 의자는 신왕을 위한 자리고, 조금 전 적룡이 앉으려고 했던 자리는 마왕을 위한 자리며, 곡주가 앉은 그 자리는 드워프 왕을 위한 자리, 그리고 그 옆에 나무와 숲이 새겨진 의자는 엘프 왕이 앉았던 자리, 나머지는 인간을 위한 자리요.”

“지식의 깊이는 세월과 비례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소이다. 나는 십 년 넘게 연구를 해서 간신히 알아낸 건데 좌천심황은 이미 알고 있구려.”

“우연히 알게 됐을 뿐이오.”

“그렇군요.”

건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수를 쳤다.

곧 차가 나왔다. 차를 가지고 나온 사람은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오십 대 중반이란 나이를 무색케 할 정도인 걸 보면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인이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혹시 혈시마 육시봉 여협 아니시오?”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철전혼이 물었다.

“날 아는가?”

여자가 물었다.

“맙소사. 일흔 살이 넘은 걸로 아는데?”

철전혼은 멍한 얼굴로 육시봉을 보았다. 일흔 살. 보통 사람은 그 나이까지 사는 것도 힘들다. 그런데 육시봉은 살아 있을 뿐 아니라 피부도 팽팽하다. 세월을 느낄 수 있는 깊은 눈동자만 아니라면 사십 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남편이 주안과를 하나 가져다줘서 이렇게 됐다네.”

육시봉은 싱긋 웃었다.

“남편이라면…….”

“나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주전자를 든 노인이 다가왔다.

“고루시마 잔능.”

철전혼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얼굴이 둥글고 통통한 몸매의 이자는 악인십패 중 무공이 가장 강하다는 고루시마 잔능이었다. 철전혼이 고루시마 잔능을 본 건 처음이 아니다. 오 년 전에 한번 봤는데 그땐 지금처럼 통통하지 않았다. 장작을 연상시킬 정도로 마른 상태였다. 그랬던 그가 살이 쪄 후덕한 체형이 된 것이다.

원래 절정 고수는 체형을 거의 바꾸지 않는다. 설사 전보다 더 먹는다고 해도 살이 찌는 일도 없다. 체형이 달라지면 무공을 펼치는 자세가 달라지는데, 그때는 좋은 쪽보다 나쁜 쪽으로 달라지기가 쉽다. 즉 체형이 바뀌면 무공이 약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절정 고수들은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체형을 절대 바꾸지 않는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무공이 더 강해지는 경우다. 즉 전보다 더 강해진다면 체형이 바뀌는 것도 기꺼이 감수한다.

고루시마가 그런 경우 같다.

삐쩍 말랐을 때도 악인십패의 수장이었는데, 거기서 더 강해졌다면 지금은 얼마나 강자가 됐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내가 변했는데도 알아보는구먼.”

잔능은 싱긋 웃었다.

“어떻게 된 거요?”

“나도 처음 알았는데 남자는 혼인을 하면 살이 찐다고 하더구먼.”

“그러니까 두 분이…….”

철전혼은 잔능과 육시봉을 번갈이 바라보았다.

“아이를 가져 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잘 안 되네그려. 혹시 좋은 약 아는 거 있으면 소개 좀 시켜 주시게.”

“…….”

철전혼은 멍한 얼굴로 잔능을 보았다.

“없는가?”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내 정신을 가다듬은 철전혼이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 고맙네.”

잔능은 히죽 웃었다.

철전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이 동글동글해졌다고 해서 고루시마 잔능이 어디 간 게 아니었다. 이를 내보이며 웃자 얇은 칼로 피부를 떠내는 듯한 섬뜩함이 온몸을 잠식해 들었다.

“자! 이제 인사가 끝났으니까 우리 곡을 방문한 이유를 들어 볼까요?”

건륭이 입을 열었다.

“먼저 질문이 있소.”

좌무백은 건륭을 보며 말했다.

“대답을 해 줄 거란 기대는 하지 마시오.”

“어려운 질문은 아니오. 내가 궁금한 건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 살 거냐는 거요.”

“강호로 나올 건지 안 나올 건지 그걸 묻는 거요?”

“그렇소.”

“원래 남 사는 거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성격이오?”

“원래는 관심을 두지 않소. 하지만 내가 거느린 다섯 세력 중 한 곳보다 더 강한 전력을 지닌 곳이라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소.”

“지금 다섯 세력이라고 했소?”

“그렇소.”

“혹시 그 다섯 세력의 명칭이 춘추오패요?”

“…….”

좌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절하겠군.”

건륭은 황당한 얼굴로 좌무백을 보았다.

“나는 삼백 년에 걸쳐 만들었지만 곡주는 삼십 년도 안 된 짧은 기간에 악인곡을 만들지 않았소.”

“그 말 칭찬이오?”

“그렇소.”

“그럼 춘추오패의 주인이 날 찾아온 용건이 뭐요?”

건륭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무림엔 춘추오패만 있는 게 아니오. 이곳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자들이 세운 팔왕가란 가문이 있소.”

입으로 향하던 건륭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실이오?”

“그렇소.”

좌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방인들이 중원인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해 만든 노예 가문이란 말은 하지 않을 참이다. 과거에 그런 가문이 있었고, 그들의 후예가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들도 무림을 노리고 있나 보군요.”

“전쟁은 이미 시작됐소.”

“무림에는 아직 별다른 징후가 없던데…….”

건륭은 좌무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건륭은 이곳에 웅크리고 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중원의 황제가 되는 건 그의 오랜 꿈이었다. 원대한 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원으로 진출하지 못했던 건 춘추오패 때문이었다.

“팔왕가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팔왕을 선출했고 나는 그동안 풀어 두었던 춘추오패를 하나로 합쳤소. 그리고 이곳에서 전쟁을 시작했소.”

“전쟁을 시작했으면 치르면 될 일이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뭐요?”

“악인곡에 대해 몰랐거나, 설사 알았다고 해도 주시할 가치가 없었다면 찾아오지 않았을 거요. 내가 곡주를 찾아온 건 악인곡을 전쟁의 향방을 바꿀 중요한 변수로 생각했기 때문이오.”

“손을 잡자는 말이군요.”

“그렇소.”

좌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잡았을 경우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뭐요?”

“중원을 절반으로 나누는 건 불가능하오. 세 개 성은 양보할 수 있소.”

“성 선택은 내가 하는 거요?”

“그렇소.”

“만일 이 거래가 성사된다면 나는 산동, 하북, 하남 세 곳을 요구할 텐데, 가능하오?”

“그 세 곳이면 명나라 중심인데?”

“명나라 중심이긴 하지만 하남을 제외한 두 곳은 무림과 동떨어진 곳이기도 하오.”

“좋소. 그렇게 하겠소.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해 줘야 할 일이 있소.”

“해 줘야 할 일?”

건륭은 의아한 얼굴로 좌무백을 보았다.

“여기까지 들어오면서 악인곡의 강함을 피부로 느꼈소. 하지만 느낌으로는 부족하오.”

“실력을 봐야겠다는 거요?”

“그렇소.”

“우리를 이용해서 어떤 세력을 없애는 거라면 사양하겠소.”

건륭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생각은 없소. 지금 우린 팔왕을 쫓고 있는데, 그자가 곧 이곳으로 오게 될 거요. 그 팔왕을 없애 달라는 게 내 조건이오.”

“팔왕뿐이오?”

“부하가 있긴 한데 열 명 내외요.”

“차도살인계를 이용하려고 하는 걸 보면 팔왕이 강한가 보군요.”

“나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자가 당했으니까 약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좌천심황과 비슷한 자와 싸워서 이겼다고요?”

건륭의 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사방을 잠식하면서 퍼져 나가는 그것은 투기였다.

“그렇소.”

좌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함께 갑시다.”

건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고루시마 잔능을 보았다. 잔능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양피지와 지필묵, 인주를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협약서를 작성하고 인장 대신 장인을 찍었다.

“우린 그만 가 보겠소.”

협약서를 챙긴 좌무백이 일어나며 말했다.

“팔왕의 인상착의는 어떻게 되오?”

“그자가 여기로 오면 바로 알려 주겠소.”

“그리고 중원에 우리가 머물 장소가 필요하오.”

“원하는 곳이 있소?”

“하북성이면 좋겠소이다.”

“도심이 좋소, 아니면 산자락에 면해 있는 곳이 좋소?”

“도시에 가까운 산자락으로 해 주시오.”

“그런 장소를 찾는 건 쉽지 않은데. 아무튼 장소가 정해지는 대로 연락을 하지요.”

“이사 준비 하며 기다리겠소이다.”

좌무백과 철전혼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살펴 가시오.”

절벽 밖까지 따라 나온 건륭은 두 사람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좋은 만남이었소, 곡주.”

좌무백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몸을 돌렸다.

“나도 그렇소이다.”

건륭은 좌무백과 철전혼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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