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26)
“명령을 하달하겠다.”
“하명하십시오, 령주.”
“능천일대, 이대, 삼대, 사대는 지금 당장 출병 준비를 하라. 일차 집합 장소는 황산이다. 황산 모처에 부하들을 집결시켜 놓고 내일 저녁에 향로봉으로 와서 보고하라.”
“존!”
네 명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카단은 동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박혀 있던 동패가 손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동패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그는 곧바로 지붕으로 올라갔다.
가볍게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십 장 높이까지 솟구친 그는 적신천사마공을 펼쳤다. 그러자 한쪽에 네 장씩 총 여덟 장의 황금색 날개가 생겨났다.
카단은 날갯짓을 했다. 그의 신형은 더욱 높이 날아올라갔다.
“무슨 놈의 밤새가 저렇게 큰지.”
카단이 날아올랐던 건물 처마 밑에서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노인이 걸어 나왔다.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의 손에는 빗자루가 들려 있었다. 카단의 거처에서 잡일을 하는 적소라는 자였다.
“저기 또 날아가네.”
그의 시선이 오른편 하늘로 향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밤새가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새가 많아졌는지.”
적소의 시선은 하늘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동안 하늘을 쳐다보던 적소는 허리를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접니다.
전음이 들려오자 적소는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빗자루로 대문 위쪽에 있는 거미줄을 제거했다.
―능천일각, 이각, 삼각, 사각에 머물던 자들이 조금 전에 떠났습니다.
―준비물은?
―한 달 치 이상의 식량을 준비해서 갔습니다.
―목적지는 알아냈느냐?
―황산이라는 것까지만 알아냈습니다.
―황산이면?
―대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쪽에서 큰일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밀정조를 파견해라.
―알겠습니다.
―나는 대인께 다녀오겠다.
―수고하십시오.
―그래.
전음을 끊은 적소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어기적거리며 길을 나섰다.
한 식경 후에 그가 도착한 곳은 다정궁이었다.
어느새 얼굴은 다정궁에서 청소하는 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광역각으로 들어갔다. 광역각은 다정궁 창고였다. 창고 안에는 쌀과 다른 곡물로 가득 차 있었다. 적소는 쌀가마 뒤편으로 갔다. 거기에는 바닥에 움푹 파인 특이한 곳이 있었다. 적소는 그곳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적소는 계단으로 내려가 문을 닫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부를 채웠지만 어려움 없이 나아갔다. 계단 아래쪽은 동굴이었다.
십여 장을 걸어가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올라가자 아래로 늘어뜨려진 줄이 보였다. 그는 줄을 가볍게 잡아당기고 아래로 내려와 기다렸다.
덜컹!
계단 위쪽이 아니라 아래쪽 문이 열리며 불빛이 새 들어왔다. 적소에서 문을 열어 준 사람은 다정성모 주려아의 시비 소화였다.
“기다리고 계세요.”
시선이 마주치자 소화가 말했다.
적소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곳은 다정궁 지하였다.
“어서 와요.”
주려아는 적소를 맞았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적소는 고개를 숙였다.
“네.”
주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 변화가 생겨서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어떤 변화죠?”
“천상기사단 단장이 돌아왔다가 폐하 침전에 들렀습니다. 그곳을 나와서 능천대 네 대주를 만나더니 다시 떠났습니다. 잠시 후에 능천대 각 건물에서 수천 명이 날아올랐고요.”
“작전을 나갔다는 건가요?”
“그들이 준비한 식량은 한 달 칩니다.”
“작전 기간이 길군요. 목적지는 알아냈나요?”
“황산입니다.”
“대주가 황산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냈나요?”
“팔왕을 없애기 위한 작전이 진행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집행사자단과 부활전사단을 합치면 천오백 명인데 사천 명이 또 출병한다는…… 조금 전에 천상기사단 단장이 왔다가 갔다고 했나요?”
“네.”
“흠!”
주려아는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집행사자단과 부활전사단은 전부 당한 게 분명해요.”
“신족 천오백 명이 팔왕에게 당했단 말입니까?”
“우리가 추가 병력을 파견할 때는 어떤 경우죠?”
“먼저 보냈던 자들이 당했을 경우에……. 그렇군요.”
적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당하지 않았다면 사천 명이란 인원을 다시 보낼 이유가 없었다.
“누가 팔왕이 됐는지는 알아냈나요?”
“마왕입니다.”
‘역시…….’
주려아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너무 빨리 사라져 적소는 보지 못했다.
“팔왕도 그렇고 이곳도 놓치지 말고 주시하도록 하세요.”
“알았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적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나, 술 한 잔만 줄래?”
적소가 나가자 주려아는 소화를 보며 말했다.
“네.”
소화는 얼른 밖으로 나가 술과 간단한 안주를 가지고 들어왔다. 잠시 후 주려아는 술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주려아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소화에게 물었다.
“이긴다는 쪽에 제 머리를 걸어도 좋아요.”
소화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적은 너무 강해. 너무 강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주려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어요. 공주님은 지금보다 더 험한 일을 이겨 내고 여기까지 왔어요. 반드시 이겨 낼 거예요.”
“네가 나보다 낫구나.”
주려아는 빙그레 웃었다.
“힘내세요.”
“그래, 힘내자. 죽기밖에 더 하겠니?”
주려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 * *
좌무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흑풍협이란 말이 실감 났다. 협곡이 거기서 거기지 흑풍협은 얼마나 다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실제로 접한 흑풍협은 이곳이 왜 흑풍협이라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은 얼마나 강한지 옷이 찢겨 나갈 지경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져 나온 듯 바람에는 작은 돌부터 시작해서 나뭇조각까지 잔뜩 섞여 있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만일 저 바람 속에 적이 숨어 있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얼마나 가야 하지?”
좌무백은 철전혼을 보며 물었다.
“반 시진은 더 가야 합니다.”
철전혼이 대답했다.
“놈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곡주를 만나야 한다.”
“그 전에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철전혼은 계속 걸었다.
“대단한 곳이네.”
좌무백은 혀를 내둘렀다. 도무지 바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니,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세지는 것 같았다.
“이곳 어딘가에 풍신이 살고 있다고 해서 풍신곡이라 불리기도 한답니다.”
“흑풍협보다 풍신곡이 더 어울리는 이름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강풍을 뚫고 걷던 철전혼이 그 자리에 멈췄다.
좌무백은 오른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높이 일 장, 좌우 폭 일 장에 달하는 정사각형 석문이 보였다. 석문 중앙에는 커다랗게 악인곡이란 글이 음각돼 있었다. 붓으로 쓴 것처럼 한 번에 내려쓴 글이다. 보통 내공으로는 꿈도 꾸지 못하는, 대단한 무공이다. 최소 십 갑자 이상은 돼야 한다.
문 바로 옆에는 커다란 북채가 놓여 있었다.
철전혼은 북채를 들고 석문 중앙의 인人 자를 때렸다.
뎅!
그러자 종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문에서 흘러나왔다. 철전혼은 북채를 놓고 기다렸다.
안에서 사람이 나온 건 한 식경 후였다.
“누구냐?”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문 위였다.
철전혼과 좌무백은 고개를 들었다. 머리 하나가 절벽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나는 운성 성주 철전혼이라 하오. 곡주를 만나러 왔소.”
철전혼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춘추오패의 그 운성을 말하는 거요?”
사내의 말투가 반공대로 바뀌었다.
“그렇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사내의 머리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석문이 열린 건 다시 한 식경 후였다. 석문 안쪽에는 조금 전 절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오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나는 사귀死鬼 추만이오.”
사내는 자신을 소개했다.
“추 대협까지 여기로 와 있을 줄은 몰랐군요.”
철전혼은 짐짓 놀란 척했다.
철전혼의 신분이 워낙 높아 놀란 척한다고 해도 이상하게 보이진 않지만, 실제 추만은 울던 아이도 이름을 들으면 울음을 그칠 정도로 악명 높은 자였다. 십 년 전에 강호공적으로 선포됐고 현상금도 일만 냥이나 걸려 있는 그가 이곳 악인곡에서 문지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철전혼이고 이분은…….”
철전혼은 좌무백을 가리켰다.
“나는 좌무백이네.”
좌무백은 자신을 소개했다.
“내가 아는 좌무백은 삼백 년 전 사람밖에 없는데 그 노물들 중 한 명은 아니겠지요?”
추만은 좌무백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 주인에게 안내해 주겠는가?”
좌무백은 추만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 알았습니다.”
추만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올렸다.
좌무백의 눈빛은 그렇게 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범접하기 힘든 어떤 힘이 내재돼 있음을 깨달았다. 그 힘은 신분이 높은 자들이 풍기는 위엄과는 달랐다. 위엄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보다는 더 근원적이고 초탈한 뭔가가 있었다. 추만은 어떤 느낌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다가 문득 높은 봉우리에 우뚝 서 있는 바위를 떠올랐다.
바위는 천 년의 세월 동안 모진 바람과 눈과 더위를 견뎌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바위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당당하다.
좌무백은 그런 사람이었다.
“절벽 안쪽에 이런 시설을 만들어 놓다니 대단하구먼.”
좌무백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절벽 안쪽은 통로가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천연 동굴이 아니라 사람 손으로 만든 인공 통로였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석실과 통로를 만든 노력이 놀랍기만 했다.
“여깁니다.”
추만은 석문을 열었다.
좌무백과 철전혼은 안으로 들어갔다.
“허!”
“엄청나네.”
두 사람은 멍한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두 사람 눈에 띈 건 거대한 공동이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반대편까지 오십 장은 될 것 같았다. 천장의 높이는 사십 장은 돼 보였는데, 한가운데가 뻥 뚫려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공동 벽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석실과, 석실과 석실을 이어 주는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계단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걸 다 직접 만든 거요?”
심무극은 물었다.
“모두 우리가 만든 건 아닙니다.”
“하면, 여긴…… 응?”
절벽을 보던 좌무백의 눈이 커졌다.
그가 선 곳에서 바라본 전면 벽에는 석실 대신 커다란 글이 적혀 있었다. 그것들은 고대에 사용했던 갑골문자였다.
“지국철가…… 맙소사.”
좌무백의 입이 쩍 벌어졌다.
놀랍게도 이곳은 이방인들이 만든 여덟 가문 중 한 곳인 지국철가였다.
지국철가를 세운 자는 바위를 흙처럼 주무를 수 있는 드워프족이다. 그 당시 소문엔 지국철가는 절벽 안쪽에 만들어져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지국철가의 위치를 아는 자들은 없었다. 심지어 지국철가의 노예 가문이었던 철왕가도 위치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곳에 숨어 있었다.
“혹시 여기, 지국철가의 옛터 아니오?”
좌무백은 추만에게 물었다.
“모릅니다.”
추만은 고개를 저었다.
“맞소. 여기는 지국철가의 옛터요.”
대답이 들려온 곳은 공동 가장 위쪽이었다.
좌무백은 시선을 들었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석실 앞 공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