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25)
붉은색 갑옷을 입은 자가 날갯짓을 하며 자금성 지붕 위로 내려앉았다. 낮은 자세로 내려앉았던 자가 허리를 곧게 펴자 날개가 사라졌다. 이 사람은 천상기사단 단장 카단이었다.
카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싸늘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심무극을 호위하는 암흑천사단 대원들이었다.
“나, 카단이다. 신왕을 뵈러 왔다.”
카단은 나직하게 말했다.
“신왕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다. 들어오라고 해라.”
심무극의 목소리가 지붕을 뚫고 나왔다.
카단은 아래로 내려갔다.
들어가는 입구에도 암흑천사단 대원 수백 명이 은신해 있었다. 긴 회랑을 지나자 문이 나왔다. 문 앞에는 내관 두 명이 서 있었다. 두 내관은 카단을 향해 목례를 했다.
“접니다.”
카단은 안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들어와!”
심무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내관이 문을 열어 주었다. 카단은 안으로 들어갔다. 심무극은 안으로 들어온 카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집행사자단에 카단을 배치한 건 엘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카단이 엘 편으로 돌아섰다는 걸 알게 됐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엘의 부하가 됐다고 해도 집행사자단 단주를 따르는 것이라 잘못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카단을 포기하고 다른 자를 천상기사단 단주로 앉힐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이냐?”
심무극은 물었다.
“우린 엘 단주의 명령으로 팔왕을 쫓았습니다. 그러다가 산중의 어느 도관에서 이상한 일을 겪었습니다.”
“어떤 일이냐.”
“그게…….”
카단은 산중 폐도관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말했다.
“귀신을 불러내는 진식이었을 게다.”
이야기를 듣고 난 심무극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거기서 그자를 보았습니다.”
“그자?”
심무극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카단이 말한 ‘그자’라는 어휘에서 불길한 징후가 감지됐다. 마치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빠르게 달려오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자는 황금색 날개의 수가 여덟 개가 넘었습니다.”
“…….”
심무극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카단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정말이냐?”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며 물었다.
여덟 개 이상의 날개를 가진 자가 나타났다고 해서 펄쩍 뛰는 건 보기에 좋지도 않고 부하 앞에서 할 행동도 아니었다. 하지만 평정을 가장하고 있는 표정과는 달리 그의 내심은 폭풍 속에 내던져진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네. 분명 여덟 개 이상이었습니다.”
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여섯 개가 아니고 여덟 개 이상이라고?”
“정확하게 세어 보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덟 개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네 개는 더더욱 아니었고요.”
“그자에게 당한 거냐?”
“천상기사단은 그자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집행사자단도 당했겠구나.”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집행사자단 단주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모릅니다.”
“몰라?”
심무극은 카단을 빤히 보았다.
“저를 불렀지만 보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명령을 무시하고 여기로 왔다는 거냐?”
“네.”
“여덟 개 이상 날개를 가진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게…….”
카단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한 여덟 개 이상의 날개를 가진 자는 마지막 신왕인 루하뿐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다고 하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 루하는 오래된 서가의 낡은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 같은 존재다.
그런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루하라고 생각하는구나.”
심무극이 말했다.
“열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존재 중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을 가진 자는 루하뿐입니다.”
“하지만 그자가 루하라는 걸 확신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먼저 확인부터 해야겠지?”
“네.”
“그럼 엘은 집행사자단을 다 잃었겠구나.”
“그게…….”
느닷없이 엘에 대한 걸 꺼내자 카단은 선뜻 대답을 못했다.
“네가 도망쳐 올 정도면 여덟 개 이상의 날개를 가진 자는 아주 강하다고 봐야 하고, 집행사자단은 진식에 갇혔으니까, 빠져나온 자들이라고 해 봐야 손가락으로 꼽지 않겠느냐.”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살아남은 자가 백 명 정도라고 하면 엘이 잃은 부하의 수는 몇 명이지?”
“부활전사단도 있었으니까 천사백 명을 잃은 셈입니다.”
“천사백 명을 잃고 살아 돌아온 지휘관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
카단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엔 정리할 참이다.”
“목을 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내 부하가 몇 명인지 아느냐?”
“그게…….”
“먼저 황실에는 주천대 일천 명, 역천일대와 이대가 각각 일천 명, 능천일대, 이대, 삼대, 사대가 각각 일천 명이다. 천상기사단 오백 명이 있고, 암흑천사단 일천 명이 있고, 얼마 전 합류한 암흑종족이 있다. 그리고 중원으로 나가면 삼백만 명의 명나라 군대가 있다. 그들을 제대로 다스리려면 군기가 엄해야 한다. 특히 지휘관에 대한 군기는 병졸보다 더 강해야 하는데, 그건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은 수천 명 혹은 수만 명 병졸의 죽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지휘관이 최고의 충신이거나,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고 해도 넘어갈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능천대를 데리고 가라.”
“몇 대를…….”
“전부 데리고 가라.”
휙!
심무극은 둥근 동패 하나를 카단에게 던졌다. 카단은 얼른 패를 잡았다.
패의 앞에는 신神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령令이라는 글이 양각돼 있었다.
신왕을 대신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신왕령이었다. 신왕령은 동패, 은패, 금패 세 가지가 있는데, 권위에서 약간의 차이가 날 뿐, 각 령주가 갖는 권력은 비슷비슷하다.
“알겠습니다.”
카단은 고개를 숙였다.
“먼저 놈의 신분을 확인하고 목을 잘라라. 머리는 얼려서 가져오면 된다.”
“알겠습니다.”
카단은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천상기사단은 카르할에게 넘기고 가라.”
물러나던 카단이 우뚝 멈췄다. 카르할은 천상기사단 부단주였다.
“천상기사단에 명령을 내려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 그런 거다. 그리고 네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복귀시킬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신왕.”
카단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훔!”
심무극은 암흑천사단 단주를 불렀다.
“네.”
대답과 함께 검은 피부의 전사가 심무극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엘의 목을 치는 거에 대해서 말해 보라는 거다.”
심무극은 바훔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바훔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마치 심무극 앞에 발가벗고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벗어라!”
심무극은 차갑게 말했다.
바훔은 말없이 옷을 벗었다. 잠시 후 폭발적인 몸이 드러났다. 심무극은 바훔의 알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게 할 말이 없느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신왕.”
바훔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거의 오체투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가까이 와라.”
심무극은 손을 까딱했다.
바훔은 엎드린 상태로 기어서 심무극 앞으로 갔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은 심무극의 발 앞에 이르렀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아느냐?”
“압니다.”
“말해 봐라.”
“엘의 유혹에 넘어가 몸을 허락하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습니다.”
“또 그럴 거냐?”
“아닙니다, 신왕. 제 주인은 신왕뿐입니다.”
“맹세할 수 있느냐?”
“맹세합니다.”
“내 옷을 벗겨라.”
“네.”
바훔은 일어나 심무극의 뒤로 갔다. 그녀는 심무극의 정수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먹으로 내리치기만 하면 바로 부서질 것 같았다.
이내 시선을 돌리고 심무극의 옷을 벗겼다. 잠시 후 심무극은 알몸이 됐다. 바훔은 다시 심무극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심무극을 달궜다. 곧 심무극은 준비가 됐다.
“네 신분이 뭐냐?”
심무극이 일어나며 물었다.
“저는…….”
“나의 충견이다. 맞느냐?”
“맞습니다.”
“네게 맞는 자세를 취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바훔은 심무극 앞에 엎드렸다. 심무극은 예고도 없이 바로 밀어붙였다.
“네게 임무를 주겠다.”
심무극은 몸을 밀어붙이며 말했다.
“하명하십시오.”
“주려아, 금명세, 임춘순 세 명을 감시해라. 일거수일투족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아, 알겠습니다, 신왕.”
한편.
밖으로 나온 카단은 그의 처소로 가면서 능천대 대주들을 호출했다. 능천대 대주 네 명이 그의 집무실로 온 건 한 식경 후였다.
제일 먼저 들어온 자는 능천일대 대주 천검신노天劍神奴 이약선이었다. 이약선은 잘 버려진 검 같은 자였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날카로운 검 같은 예기를 뿌렸다.
두 번째로 들어온 자는 능천이대 대주 철검마노鐵劍魔奴 전역사였다. 전역사는 아무런 색이 없었다. 보통 사람을 보면 온화하거나, 거칠거나, 차갑거나, 따듯하거나 하는 느낌이 있기 마련인데 전역사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세 번째로 들어온 자는 능천삼대 대주 혈검사노血劍邪奴 불휘였다. 불휘는 거칠고 매서운 느낌의 중년인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자는 능천사대 대주 묵검환노墨劍幻奴 갈황이었다. 갈황은 금세라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 나올 것처럼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삼사천가 무인들은 이들 네 명을 합쳐 검의 종이 될 정도로 미쳤다고 하여 사검광노四劍狂奴라고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카단이 상급 신족이라 공대를 하고는 있지만 이약선의 말투에는 날이 서려 있었다.
“조금 전 신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다.”
카단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 명령에 우리도 포함돼 있습니까?”
질문을 하는 이약선의 어투에는 여전히 날이 서려 있었다.
“능천대 사천 명 모두가 포함돼 있다.”
“능천대가 모두 포함돼 있다 함은…….”
이약선을 비롯한 네 명은 거의 동시에 카단을 보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들의 생사여탈권은 내게 있다는 뜻이다.”
“…….”
일순 한 말을 잃은 듯 네 명은 말이 없었다.
카단이 상급이고 천상기사단 단주라는 건 네 사람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휘 계통을 통해서만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직속 부하가 아니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카단이 신왕의 명령이라면서 ‘지금부터 너희들의 생사여탈권은 내가 가진다.’라고 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설사 진짜 그런 명령이 내려왔다고 해도 증빙할 게 없으면 인정받을 수 없다.
휙!
카단은 네 명 앞으로 뭔가를 던졌다. 심무극으로부터 받은 동패였다.
푹!
동패는 바닥을 살짝 파고들어 가 박혔다.
“동패령주?”
네 명의 눈이 커졌다. 동패는 신왕의 재림이나 다름없는 막강한 권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 사람은 재빨리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동패령주를 뵙습니다.”
그리고 나직하게 소리쳤다.
“내가 너희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걸 인정하느냐?”
카단은 물었다.
“인정합니다, 령주.”
“인정합니다.”
네 명은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