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24)
지국철가의 옛터
루하라니.
좌무백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한 말을 잘못 들을 확률은 일 할도 되지 않는다는 걸 좌무백은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해 봐라.”
금제 상태에서는 거짓말을 못 한다는 걸 알면서도 또 물었다.
“네. 분명 루하라고 했습니다.”
방가려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
좌무백은 할 말을 잃었다.
신족의 마지막 왕 루하. 제일 장로 라헬에 의해 모든 능력을 잃고 버려졌다. 그랬던 그가 세월을 건너뛰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제일 장로인 라헬을 죽일 정도로 강자가 됐단다.
“놈은 어디로 갔느냐?”
“여기로 오기로 했습니다.”
“천야교 진영을 통해 포위망을 빠져나간다고 했다는 거냐?”
“네.”
방가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은 어떻게 하기로 했지?”
“그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알았다.”
좌무백은 고독혼을 돌아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지도 있지?”
“네.”
고독혼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좌무백은 지도를 살폈다. 그의 시선에 검은색으로 짙게 칠해진 부분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흑풍협黑風峽이란 곳으로 좁고 깊은 협곡입니다. 길이는 백 리고요.”
“절벽의 높이는?”
“오십 장가량 되는 걸로 압니다.”
“여기가 좋겠다.”
“뭘 말입니까?”
“팔왕을 없앨 장소를 말하는 거다.”
“그러면 흑풍협으로 유인을 해야겠군요.”
“당장 춘추오패의 수장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고독혼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좌무백은 한편에 서 있는 방가려를 보았다. 방가려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네 무공은 어느 정도냐?”
“무공이 어느 정도냐고 하심은…….”
“내가 궁금한 건 내공이다.”
“육 갑자 반입니다.”
그녀는 분명 자기 입으로 십 갑자가 넘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좌무백의 물음에 육 갑자 반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방가려는…….
“육 갑자 반이라…….”
좌무백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어렸다.
사실 그가 방가려에게 금제를 시험한 건 공력 때문이었다. 방가려 일행에게 건 금제가 강력한 구속력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훨씬 더 강해야 한다.
금제를 당한 자가 더 강하면 금제는 무용지물로 변하고 만다. 그런데 방가려를 처음 본 순간 자신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확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금제는 이상 없이 작동했다.
이번에는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었다.
금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면 본인의 입으로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육 갑자 반.
무림십패 중 가장 강하긴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잘만 이용하면 팔왕을 잡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좌무백은 가볍게 웃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공력이 늘어난 거냐?”
문득 공력이 늘어난 이유가 궁금했다.
“제 체질을 고쳤습니다.”
“천양지맥을 고쳤단 말이냐?”
방가려가 천양지맥을 타고났다는 건 좌무백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들이 방가려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천양지맥을 타고난 것 때문이었다.
“네.”
방가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양지맥을 고치기 위해서는 상극인 체질을 가진 자가…… 맞아. 루하가 한음절맥을 타고났을 테니까.”
좌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음절맥은 신왕이 안고 태어나는 신병이다.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신족은 대대로 극양신목을 키워 왔다. 천객 일호가 루하라면 한음절맥을 타고났을 테고 천양지맥을 타고난 방가려와는 서로 인간 치료제가 된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한음절맥을 타고났고 우린 서로의 치료제였습니다.”
“너희들은 보자마자 관계를 가질 정도로 친했느냐?”
“아닙니다. 과거에 잠깐 보았을 뿐입니다. 그가 한음절맥을 지녔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네가 유혹했느냐?”
“네.”
“천양지체가 치료되는 과정에서 공력이 늘었다는 거구나.”
“네.”
“놈이 날개를 펼치더냐?”
다시 태어난 신족에게 날개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적신천사마공을 익혔다고 해서 모든 신족이 날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각성을 하지 못한 자는 영원히 날개를 만들어 내지 못할 수도 있다.
날개는 곧, 완벽한 신족을 의미한다.
“날개를 펼치는 건 못 봤어요.”
방가려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좌무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질문을 했다.
“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느냐?”
“그는 제가 천야교 교주라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그에게 연락해서 흑풍협으로 이동할 거라고 해라.”
“알았어요.”
방가려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간 사이 밖으로 나갔던 고독혼이 들어왔다.
“방가려를 이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둘의 관계를 잘만 이용하면 지금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놈은 최고의 자객이다. 어설프게 했다가 정체가 발각되면 일만 더 어려워진다. 방가려는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 둬야 한다.”
만일 방가려가 실패해서 죽거나 금제가 풀리기라도 하면 방가려 혼자만 잃는 게 아니라, 천야교를 모두 잃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일단은 춘추오패에게 맡겨 놓는 게 낫다는 거군요.”
“맞다. 그리고 이번 싸움은 팔왕뿐만 아니라 팔왕가까지 없애야 하기 때문에 좀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고독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잡시 후 밖으로 나갔던 방가려가 들어왔다.
“연락했느냐?”
좌무백이 물었다.
“사람을 보냈어요.”
“잘했다. 이제 자리를 만들어라.”
“알았어요.”
방가려는 초전전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곧 의자 형태로 다듬어진 돌과 탁자 형태의 바위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들을 배치하고 차를 준비하고 있는데 각 세력의 수장들이 왔다. 가장 먼저 온 자는 해림의 림주 신룡 옥천환이었다. 이어 운성의 성주 적룡 철전혼과, 환수각의 각주 천사 척사랑, 마원의 원주 패도 천파가 들어왔다. 네 사람은 안으로 들어와 좌무백에게 인사를 했다.
“작전을 변경하기로 했다.”
일행이 앉자 좌무백이 말했다.
“어떻게 변경됐습니까?”
적룡 철전혼이 물었다.
“놈을 이곳으로 유인하기로 했다.”
좌무백은 지도를 꺼내 흑풍협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거긴?”
“지도상에는 흑풍협이라고 나와 있다.”
“거긴 악인곡인데.”
적룡 철전혼이 나직하게 말했다.
“악인곡?”
좌무백이 철전혼을 보았다.
“실전십패와 악인십패가 만든 무림문팝니다.”
“실전십패와 악인십패?”
좌무백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실전십패는 실전을 통해 최고 경지에 오른 열 명의 무인을 말하고 악인십패는 마인 중 가장 강한 열 명을 일컫는 말입니다.”
철전혼은 악인곡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철전혼은 실전십패와 악인십패가 만들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실전십패의 한 사람인 광마투신狂魔鬪神 건륭이 세운 문파라고 해야 한다.
건륭의 원래 이름은 주건륭으로 명나라 황족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많고 권력마저 쥐게 되자 내키는 대로 살았다. 살인과 강간은 그의 일상 중 하나였다. 결국 그의 포악한 행태는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제는 주건륭을 파문시키고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주건륭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잡으러 온 자들의 숨통을 끊었다. 그 당시에 주건륭에게 죽은 자들의 수가 일만 명이 넘었다.
그렇게 되자 황실에서는 무림에도 현상금을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무인들이 악인 퇴치와 명예 그리고 현상금 세 가지를 노리고 주건륭을 잡으러 나섰지만 그들이 얻은 건 싸늘한 죽음뿐이었다.
그때 주건륭이 얻은 별호가 광마투신이었다. 그 당시에 밝혀진 놀라운 사실 하나는 황실에서 잡으러 나왔을 때 주건륭은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는 무수한 영약을 꾸준히 복용하여 내공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았다.
무림은 내공이 높다고 해서 무공을 모르는 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자기만의 무공을 만들어 냈다는 건 주건륭이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무인이라는 걸 뜻했다.
더 이상 무인이 쫓지 않자 주건륭은 이름을 건륭이라 바꾸고 황산 어딘가에 자기만의 세상을 건설하였는데 거기가 바로 악인곡이었다.
하지만 악인곡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 악인곡이 흑풍협 안에 있었던 것이다.
“실전십패와 악인십패가 모두 악인곡에 소속돼 있단 말이냐?”
“실전십패 중에서는 혈타살겸 타루, 백겸 주육승, 괴승 주괴, 요색 봉란, 네 명을 뺀 여섯 명이 악인곡에 소속돼 있고, 악인십패는 모두 소속돼 있습니다.”
“실전십패 나머지는 어떤 자들이냐?”
“승천마도昇天魔刀 막천광, 마라도魔羅刀 유호, 적엽赤葉 수수, 혈신투마血神鬪魔 서여거, 전투마戰鬪魔 웅사와 악인곡주인 광마투신 건륭입니다.”
“그들 중 가장 강자는 건륭이겠구나.”
“누가 가장 강자인지 그것까진 알 수 없지만 내공의 최강자는 건륭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그럼 악인십패는 어떤 자들이냐?”
“악인십패는 이마사악사흉二魔四惡四兇이라 부르고 이마는 고루시마骷髏屍魔 잔능, 혈시마血屍魔 육시봉을 말합니다. 사악四惡은 정악正惡 문자욱, 혈악血惡 이무보, 마악魔惡 종근, 사악邪惡 황보산을 말하며, 사흉四兇은 천흉天兇 임사생, 지흉地兇 지정악, 인흉人兇 악추생, 수흉獸兇) 인도생입니다.”
“대단하구나.”
철전혼이 언급한 자들은 무림에 대한 관심을 끊었던 좌무백이 알 정도로 유명한 무인들이었다. 한 명 한 명이 개세고수인 그들을 한데 모아 문파를 만드는 건 보통 능력이 아니고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건륭이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뛰어난 자라는 뜻이었다.
“건륭을 아는 많은 이들은 성격만 좋았더라면 황제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 뛰어난 잡니다.”
“그를 잘 아느냐?”
좌무백은 물었다.
“속을 터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사업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건 가능합니다.”
“악인곡의 전력은 어느 정도냐?”
“그건 모릅니다.”
“몰라?”
“악인곡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정도로 강호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는 편이고요.”
“모든 것이 비밀이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알았다. 모두 흑풍협 근처로 이동하도록 한다.”
“그쪽으로 간다고요?”
철전혼은 의아한 얼굴로 좌무백을 보았다.
자신이 악인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그곳을 피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쪽으로 이동하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악인곡 역시 장차 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자들이다. 팔왕을 정리할 때 함께 없애는 게 낫다. 악인곡 무인들에게 들키지 않게 주의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들은 것들은 비밀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다섯 세력의 수장들은 우렁차게 대답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성의 성주는 다시 여기로 와라.”
좌무백은 철전혼을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방가려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인사를 하고 천막에서 나갔다.
“역부심으로부터는 연락 없느냐?”
엘은 고독혼을 보며 물었다.
사실 그가 이곳까지 온 건 천객 일호를 쫓고 있던 사신마존 역부심 일행 때문이었다.
천객 일호의 흔적이 이곳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고 왔는데 팔왕을 쫓던 춘추오패의 수장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없습니다.”
고독혼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까지 온 건 분명한데…….”
그는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신족들이 날아다니지 않나 해서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가려, 너도 이동해라.”
“알았어요.”
방가려는 고개를 숙이고 초전전에게 이동 명령을 내렸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천야교 무인들은 천막을 걷고 자리를 떴다. 천야교가 떠나고 한 식경 후 철전혼이 돌아왔다.
“안내해라!”
좌무백은 철전혼을 보며 말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건륭을 만나고 싶다.”
“……알겠습니다.”
좌무백을 가만히 바라보던 철전혼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