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21)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기분이 어때?”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유적기가 물었다.
“뭐가요?”
“과거를 안 기분 말이야. 나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거든.”
“과거가 아니고 전생이죠.”
“뭐가 됐든.”
“별다른 느낌은 없습니다. 그들이 나와 엮이지만 않았으면 모르는 사람처럼 각자 삶을 살았을 겁니다.”
“다시 악연으로 얽히다 보니까 과거도, 아니 전생도 현실이 돼 다가온다는 거야?”
“네.”
“화가의 수장 헌원소야가 라헬 장로라고 하던데 맞아?”
“네.”
“그럼 복수를 한 셈이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최종 목표는 세 장로겠네.”
“그들은 목표가 아니고 계약 조건입니다.”
“풋! 어쨌거나.”
“이제 난 가 봐야 합니다.”
“다 없앨 거야?”
아래쪽에 있는 신족에 대한 말이었다.
“도망치지 않으면 형님만 빼고 다 죽게 될 겁니다.”
“낮엔 어디 숨어 있지?”
“저 아래쪽 개울 안쪽으로 가면 동굴이 있습니다.”
“알았어. 전할 말이 있으면 거기로 갈게.”
유적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극선의를 벗어 금장생에게 건넸다.
“다음에 봐요.”
금장생은 태극선의를 걸치고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래로 떨어지던 그는 은신술을 펼쳤다. 곧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금장생은 소리 없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아래쪽 상황은 조금 전 올라갈 때와 비슷했다.
신족은 여전히 은신술을 펼쳐 숨어 있었다. 방가려도 쉬고 있는 듯 조용했다.
금장생은 천천히 이동했다.
잠시 후 그는 틈새 앞에 도착했다. 방가려는 틈새 바로 옆 절벽에 딱 붙어 있었다.
―쉬는 거예요?
금장생은 혜광심어를 보냈다.
―아니.
―아니라고요?
―너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
―다른 사람이라고요?
―응.
―누이 부하?
―내 부하는 절대 아냐.
―그럼 누굴까요?
―나보다는 네가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아무튼 적이 아니라는 거죠?
―응.
―그럼 된 거죠, 뭐.
―계속할 거야?
―지금은 적도 나도 좀 쉬어야 해요.
―너는 그렇다고 해도, 적도 쉬어야 한다는 건 무슨 말이야?
―휴식은 새로운 힘을 주고, 새로운 힘은 용기를 주거든요.
―그게 무슨…….
방가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금장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면 전의를 상실하게 마련이고 그럼 작전을 바꿀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쉴 시간을 주면 전력을 가다듬고 어떤 점을 개선해야 더 효율적인가를 생각하게 돼요. 그런 다음 다시 힘을 내서 공격을 하게 되죠.
―그래서 지금은 들어가서 쉴 때라고?
―우리가 아니라 신족들이 쉬어야 할 땝니다. 가요.
금장생은 틈새 안으로 들어갔다.
금장생은 물론이고 방가려와 무혼도 더 이상 공격을 해 오지 않자 엘은 이호와 구마 일행을 불러 모았다.
영제로 변장하고 있는 유적기도 엘 앞으로 갔다.
그녀는 금선탈각 수법을 펼치기 위해 벗었던 장포를 찾아 입은 상태였다.
“놈은?”
엘의 시선이 이호에게로 향했다.
“숨었습니다.”
“이 안에 있어?”
“네.”
“확실해?”
“네. 놈은 여기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놈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했지?”
엘의 시선이 역부심 일행에게로 향했다.
“네.”
역부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찾아.”
“알겠습니다.”
역부심 일행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금장생이 절벽 쪽 동굴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적기는 반대편으로 갔다. 그래야 그가 발견하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역부심 일행은 사방을 샅샅이 훑었다.
그들이 금장생의 흔적을 찾아낸 건 한 시진 후였다.
―저깁니다.
역부심은 절벽 사이 틈새를 가리켰다.
‘놈!’
엘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들어가라!
엘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신족들은 조심스럽게 틈새로 들어갔다.
“쉿!”
금장생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막았다.
―왜?
방가려는 금장생을 보았다.
―누군가 들어오고 있어요.
금장생의 전음을 들은 방가려는 얼른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그녀의 귀에도 누군가가 틈새로 들어오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어떡하지?
―저기로 들어가요.
금장생은 물을 가리켰다.
―알았어.
방가려는 곧바로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금장생은 벽에 걸어 두었던 마법등을 꺼내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방가려를 따라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가고 반 각 후, 신족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재빨리 동굴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자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역부심 일행과 엘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머물렀습니다.”
냄새를 확인한 역부심이 말했다.
“여길 떠난 시간은?”
엘이 물었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근처를 샅샅이 뒤져라!”
엘은 버럭 소리쳤다.
신족들은 동굴을 비롯하여 틈새 주위로 흩어졌다.
그 시각.
상대가 모두 사라지자 무혼은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공격을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바타르가 도착할 시간이 되어 가고 있어 굳이 아래쪽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운영은 구덩이 안에서 밖을 살피는 중이었다.
아래쪽에서 누군가 솟구치면 바로 화살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혼이 들어가자 활을 내려놓고 인사를 했다.
“아직 안 왔네?”
“벌써 올 시간이 된 겁니까?”
“가는 데는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올 때는 금세거든.”
바타르는 이곳 좌표를 알아 가지고 갔을 테고 화탄을 구하기만 하면 바로 돌아올 수 있다. 지금쯤 돌아올 시간이다.
“마법이라는 거, 엄청난 기술이군요.”
“그런 셈이지.”
무혼은 구덩이 벽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지이익!
그 바로 앞 공간에서 특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허공의 한 점을 중심으로 푸른색의 막이 생겨났다.
막은 점점 커져 일 장 가까이 됐다.
그리고 잠시 후 막에서 발이 쑥 튀어나왔다.
막에서 나온 이는 바타르와 권말남이었다.
“어떻게 됐냐?”
무혼은 바타르를 보며 물었다.
“다 훑었는데도 오천 개밖에 안 돼.”
“그걸로 될까?”
무혼은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에 내려가 본 낭떠러지 아래는 상당히 넓었다.
오천 개가 엄청난 양이긴 하지만 낭떠러지 아래를 초토화시키기는 힘들 것 같았다.
“넓어?”
바타르가 물었다.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이어져 있으니까.”
무혼은 낭떠러지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저쪽은 우리가 맡는 게 어때요?”
권말남이 북쪽 절벽을 가리켰다.
“우리?”
바타르는 권말남을 보았다.
“마법이 어느 정도 위력을 지녔는지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내 마법으로 저쪽을 없애 버리자는 거야?”
“무……리한 부탁인가요?”
권말남이 애처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 그게…….”
바타르는 말끝을 흐렸다.
“미안해요. 공연히 부담을 드린 것 같네요. 절대 안 그러기로 맹세했는데…….”
“아, 알았다. 저쪽은 내가 처리하도록 하마.”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더구나 당신은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주主만 아니면 된다.”
“지금 상황은 주主가 아니라는 건가요?”
“저 녀석이 하는 걸 거드는 거니까 문제없을 게다.”
바타르는 무혼을 가리켰다.
“그렇군요.”
권말남은 활짝 웃으며 바타르의 팔짱을 끼었다.
‘요물이 따로 없네.’
무혼은 혀를 내둘렀다.
여자도 아닌 남자가 저런 요기를 발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사람이 권말남이었다.
“이거 받아라.”
바타르는 작은 주머니 하나를 무혼에게 내밀었다.
“화탄만 들어 있어?”
“하나에 불을 붙여서 안으로 집어넣고 아래로 던지면 된다.”
“알았다.”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바타르는 권말남의 손을 잡더니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는 낭떠러지 남쪽에 도착했다.
“세상을 구성하는 마나여, 나 바타르 크레아스 이골드의 의지로 명하나니…….”
바타르가 주문을 읊자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늘이 쩍쩍 갈라지고 붉은 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갈라진 하늘의 틈새에서 검은색 구체가 나왔다.
그 구체들은 아래로 내려오더니 낭떠러지 위에 늘어섰다.
바타르의 주문은 계속되었다.
“세상을 태우는 지옥의 불길이여,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곧 검은 덩어리들은 거대한 불덩어리로 변했다.
불덩어리들은 검붉은 광채를 뿜어내며 타올랐다.
“맙소사.”
자운영은 질겁했다.
백 장이 넘게 떨어져 있는데도 내재된 힘이 느껴졌다.
검은 덩어리 하나에서 화탄 수십 개에 해당하는 힘이 느껴졌다.
“부영반께 연락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문득 금장생이 걱정되었다.
“잠마도 이긴 녀석인데 뭘 걱정해. 가자.”
무혼은 주머니를 들고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그는 절벽 북쪽 허공에 멈춰 섰다.
그리고 바타르로부터 받은 자루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화탄 하나를 꺼냈다.
심지를 잡고 삼매진화로 불을 붙인 후 안으로 집어넣었다.
“헬파이어!”
남쪽에서 바타르의 외침이 들려왔다.
자운영은 시선을 돌렸다.
무혼이 던질 화탄보다 바타르가 펼치는 마법의 결과가 더 궁금했다.
휙!
그사이 무혼도 주머니를 던졌다.
주머니는 빠른 속도로 쏘아져 갔다. 그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
자운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콰앙!
먼저 검붉은 덩어리가 하나가 폭발하면서 불꽃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잠시 후 검붉은 덩어리 수백 개와 화탄이 든 주머니가 동시에 폭발했다.
콰앙! 쾅쾅쾅! 쾅쾅! 쾅쾅쾅!
엄청난 폭발이 낭떠러지를 뒤흔들었다.
낭떠러지 중간에 걸쳐 있던 운무가 사라지고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바닥이 보였다.
바닥은 어느 한 곳 빈틈이 없이 모두 불구덩이였다.
우르릉!
낭떠러지가 무너지는 곳도 생겼다.
“어떻게…….”
자운영은 넋을 잃었다.
화탄보다 더 무서운 게 마법이었다.
넋을 잃은 사람은 자운영뿐만이 아니었다.
헬파이어와 화탄의 공격을 받은 당사자인 엘을 비롯한 신족 수뇌들도 넋을 잃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 명 가까운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고 남은 자들은 백 명도 되지 않았다.
죽은 자들은 갈가리 찢겨 시체조차 찾을 수 없다.
남은 자들도 대부분 극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다.
“…….”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고 하는데 지금 엘이 그랬다.
그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단주!”
이호가 엘을 불렀다.
“뭐라고 생각하느냐?”
정신을 차린 엘이 물었다.
“화탄입니다.”
“누가 화탄을 던졌다는 거냐?”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우리가 몰살을 당했다는 겁니다.”
“제대로 알고 있군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연못 안에서 머리 두 개가 나왔다.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은 금장생과 방가려였다.
“넌?”
이호는 금장생을 노려보았다.
“목숨을 구해 줘서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이호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