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17)
환영마존 영제
“그런 엄청난 놈이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지?”
자운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란 삶의 목적에 따라 가치의 척도가 달라져. 어떤 것 앞에서는 황제 자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황금도, 하늘을 부술 수 있는 힘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 어떤 것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신 겁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어.”
“어렵군요.”
“맞아. 어려운 상황이야.”
무혼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꼬이고 있다.
중원 무인은 생각보다 강하고, 과거 신족이라 불렸던 자들도 아직 살아 있다.
먼저 신족과 싸워 이겨야 하고 그다음엔 중원을 완벽하게 장악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어쩌면 십 년이나 이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이곳에서 일 년이면 그곳은 십 년이다.
십 년 혹은 이십 년을 보내면 그곳은…….
“개자식!”
무혼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제야 크로노마스의 노림수를 알 것 같았다.
“내 부하들을 제거하려 했던 거야.”
그는 중원을 정벌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구심점을 잃은 부하들은 뿔뿔이 흩어질 테고, 거기에다 세월마저 흐르면 완전히 잊힌다.
크로노마스가 노린 건 바로 그 점이었다.
그게 아닐 수도 있지만,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네 생각대로 안 될 거다, 절대로.”
무혼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자운영은 무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흙을 팠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구덩이가 파였다. 깊이는 세 자 정도였다.
무혼은 그의 마법 가방에서 얇은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그걸 까니까 방 같습니다.”
“잠은 편하게 자야지. 한 시진 있다가 깨워. 아래쪽에서 신족이 올라오면 바로 깨우고.”
무혼은 자리에 누웠다.
“알겠습니다.”
자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방을 주시했다.
차가운 바람을 몰고 온 짙은 어둠은 서서히 주위를 잠식해 들어갔다.
두 시진 동안 불침번을 선 자운영은 무혼을 깨웠다.
“세 시진 후에 깨워 줄 테니까 한숨 자.”
“알겠습니다.”
자운영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코에서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무혼은 구덩이에서 나왔다. 그리고 마법 가방 안에서 혼천을 꺼냈다.
천마에게 주었던 건데, 화왕에게 수라를 잃자 천마가 돌려주었다.
혼천의 길이는 무려 여섯 자나 된다. 일반 도刀보다 도폭은 훨씬 좁고 자르기에 극대화된 무기다.
‘헌원소야에게는 단순히 패한 것만은 아니다. 그 싸움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건 바로 십만마도법의 완성이다.’
화왕의 공격에 당하고 뒤편으로 날려 갈 때, 천마로부터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풀어내지 못했던 십만마도법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풍風, 우雨, 화火, 빙氷, 폭暴, 강强, 패覇, 뇌雷, 만滿, 허虛, 우宇, 무無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들이 전부 합쳐진 하나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혼混이었다.
십만마도법의 마지막 초식인 무無가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라면 혼混은 새로운 시작을 뜻했다.
헌원소야와 싸우기 전에 십만마도법을 완성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십만마도법이 어떤 건지 한번 보자고.”
무혼은 혼천을 잡았다.
그리고 낭떠러지를 내려갔다.
아래쪽에 천 명 이상이 있는데 시끄럽게 내려갈 수는 없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내려갔다.
절벽 중간에 걸린 운무를 지나, 계속 이동했다.
‘응?’
바닥을 십 장 남겨 둔 지점에서 무혼은 멈췄다.
분명히 아래쪽에는 천 명 이상의 무인이 있어야 한다. 서로 싸우지 않더라도 인기척은 감지돼야 한다.
그런데 바닥은 인간의 흔적이 전혀 닿지 않은 것처럼 고요하다.
그건 곧 그들 전부가 은신술을 펼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느냐 하는 건데.”
무혼은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신족의 특징 중의 하나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일루전 마법이다.
나무나 혹은 바위, 풀 등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은신술에는 은신술로 대응해야겠지.’
무혼은 마법 가방을 꺼내 로브 하나를 꺼냈다.
아주 오래전―샤이칸드리아 역사로는 삼천 년 전― 그 당시 최고의 마법사였던 보안이 만들어 준 마법 로브다.
로브를 입고 로브 후드를 쓰면 주변과 완벽하게 동화된다.
일명 카멜레온 로브다.
무혼은 마법 가방을 집어넣고 로브를 입었다.
로브 후드를 쓰자 그는 절벽과 같은 색으로 변했다.
그 상태에서 아래로 이동했다.
무혼이 이동하는 그 순간 금장생은 틈새 입구에서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방가려가 앉아 있었는데, 둘 다 은신술을 펼친 상태였다.
―오늘도 아래로 갈까?
방가려가 물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장생은 방가려를 만류하고 먼저 나섰다.
주변을 잠식하고 있는 기운이 어제와 달랐다.
자객은 청부할 장소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달라진 게 있다면 조사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생존 가능성은 대폭 낮아진다.
설사 그 변화가 천재지변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해도 조사는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은신술을 펼친 채 천천히 움직였다.
‘다르다!’
이곳 지형은 머릿속에 완벽하게 저장돼 있다. 그런데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저기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두 개고, 저쪽은 세 개였는데 다섯 개가 있고, 저기엔 나무가 한 그루밖에 없었는데 두 그루다.’
금장생은 차이점을 완벽하게 찾아냈다.
자연경관의 차이점을 파악해 내는 능력 또한 특급 자객이 갖춰야 할 것 중의 하나고, 금장생은 진작 익혔다.
‘문제는 어떻게 없애느냐 하는 건데…….’
신족들은 삼 장 간격으로 은신해 있다.
누구 한 명만 죽어도 바로 알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그렇다고 해도 이백 명은…….”
금장생은 북쪽 끝에서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아직 팔백 명이 더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가지 않아도 돼요?
문득 그녀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방해돼?
―그런 건 아닌데,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것 같아서요.
―교주가 난데 뭐가 걱정이야.
방가려는 피식 웃었다.
천야교는 마음만 먹으면 연락할 수 있으니까 이틀이건 사흘이건 자리를 비워도 상관없다.
옥천환이 문젠데, 거긴 초 장로가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다.
―그럼 날 따라오세요.
좀 더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려면 방가려를 데리고 가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디로 갈 건데?
―북동쪽을 보세요.
방가려는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바위 보이죠?
―응.
방가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의 말처럼 어른 키 두 배 정도 돼 보이는 바위가 서 있었다.
―앞에 작은 바위는요?
―네 개가 보여.
―신족이에요.
―저건 은신술이 아니라 환술인데?
―신족의 타고난 능력 중 하나예요.
―저 안에 몇 명이 있는 거지?
―여든 명에서 백 명이 자연경관으로 위장해 있어요.
―어떻게 없앨 거지?
―누이는 지금부터 중원 최강 자객이 싸우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거예요.
―나는 뭐 하지?
―누이는 놈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될 거예요.
―어떻게?
―여기 있다 보면 혼자 동떨어진 자가 보일 거예요. 그자를 없애고 은신하면 돼요.
―알았어.
방가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요.
금장생은 바로 이동했다.
제법 빠르게 이동하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방가려는 금장생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아주 작은 소리가 귓전으로 잡혀 들었다. 마치 풀벌레가 기어갈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이래 가지고는 들키고 말 텐데…….’
푹!
그녀의 귓전으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방가려는 시선을 모았다.
잠시 후 시체 한 구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다른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응?’
그녀는 깜짝 놀랐다.
느닷없이 시체 두 구가 나타났다.
조금 전에는 검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소리도 없었다. 그런데 시체 두 구가 생겨난 것이다.
‘움직인다?’
방가려의 눈이 커졌다.
바위며 나무며 구덩이가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관찰하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느렸다. 하지만 움직이고 있는 건 분명했다.
‘또!’
이번에도 역시 두 구의 시체가 생겨났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저기 어디쯤인데…….’
방가려는 금장생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장소에 의식을 집중했다.
‘없어?’
그녀는 질겁했다.
조금 전만 해도 금장생은 미약하게 흔적을 남겼다. 물론 심장 뛰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심장 뛰는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다.
‘어떻게?’
믿기지가 않았다.
심장박동마저 조절하는 전설의 자객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금장생이 그런 전설의 자객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엄청나네.’
방가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왼편으로 삼 장 앞에 한 명이 있어요. 반 각에 걸쳐서 이동하세요.
그때 금장생의 전음이 들렸다.
방가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이동했다.
금장생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전음을 보낼 수도 없었다. 지금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지루한 움직임 끝에 반 각의 시간을 허비하고 조금 전 점찍어 두었던 나무 옆으로 갔다.
환술을 펼칠 때는 무방비가 되는지, 아니면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나무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나무는 반 장이 조금 넘었다.
―위에서 한 자 아래를 베세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빠르게 휘둘러 나무를 베어 내고는 자리를 이동했다.
툭!
나무 상단부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피가 뿜어져 나왔다.
―잘했어요.
바위 옆에 잔뜩 엎드려 있는데 금장생의 전음이 들렸다.
―지금부터 반 시진 동안 숨죽이고 있을 거예요. 가급적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몸을 뉘세요.
방가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위 아래쪽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어 갔다.
몸을 완벽하게 숨긴 채 금장생의 전음을 기다렸다.
그녀가 좀이 쑤시기 시작한 건 한 식경 후였다.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돌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구술해 준 무공을 떠올려 보세요.
다시 동굴로 돌아가야 하나를 갈등하고 있는데 금장생의 전음이 들려왔다.
방가려는 간밤에 암기한 무공을 떠올렸다.
살아오면서 많은 무공을 익히고 접했다. 초인삼황이 준 무공도 있고 수양어머니가 준 무공도 익혔다.
하지만 그 어떤 무공도, 금장생이 전수해 준 무영마신만마무와 군마일천무를 따르지 못했다.
천, 하, 제, 일, 무란 초식명처럼 무영마신만마무는 천하 최강 무공이었다.
방가려는 무공 초식을 하나씩 곱씹어 나갔다.
태양지체를 타고난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하며 무영마신만마무를 자신의 걸로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 그 무공을 아무에게나 마음대로 가르쳐 줘도 되는 거야?”
간밤에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많은 사람이 무공을 익혀야 해요. 강한 무공이라고 해서 가주 혼자만 익힌다면 그 가문은 머잖아 대문만 덩그러니 남게 될 거에요. 능력이 되는 사람은 신분에 상관없이 무공을 익혀서 가문을 위해 싸워야 해요.”
“그래도 마가魔家에 미안하네.”
“미안하면 더 강한 무공으로 만들어서 돌려주세요.”
“그럴까?”
“아무튼 잘 익혀 보세요.”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천하제일무 초식을 하나씩 훑어 나가자 신법이 보였다.
무공 이름에 무영無影이 들어간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신법 속에 은신술이 포함돼 있었다.
방가려는 서서히 무영마신만마무를 끌어 올렸다.
‘응?’
방가려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바로 옆자리로 움직여 보았다.
기척도 흔적도 없이 장소를 옮겼다.
‘별호가 무영유마라고 하더니…….’
문득 최강의 신법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금장생이 있을 법한 장소를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슉!
뒤편 어딘가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방가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금장생은 어느새 뒤편으로 가 있었다.
방가려는 무영마신만마무를 펼쳐 금장생이 있는 곳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