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16)
네 사람이 낭떠러지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무혼, 바타르, 권말남, 자운영이었다.
일행이 이곳으로 온 건 무혼 때문이었다.
사실 무혼은 처음부터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금장생이 팔왕이 됐지만, 자신과 친구라는 사실은 비밀로 했다.
자칫 파벌을 만드는 걸로 오해하면 단합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따라잡을 생각을 하고 금장생을 먼저 보냈다.
그런데 금장생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빨리 이곳에서야 따라잡은 것이다.
“저 아래 있는 거 맞아?”
무혼이 바타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있다.”
“금장생 일행은 단 두 명이고?”
“그렇다.”
“흠!”
무혼은 권말남을 돌아보았다.
“내게 할 말 있는 모양이구나.”
그는 여전히 무혼에게는 반말을 했다.
“장생이 내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했던가?”
“들었다.”
“장생의 직책이 뭐지?”
“동창 부제독임과 동시에 금의위 부영반이다.”
“부제독이자 부영반 절친에게 그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야?”
“그게…….”
권말남은 말끝을 흐렸다.
“너 친한 친구 있어? 목숨을 맡길 만한 그런 친구 말이야.”
“없는데…….”
“자운영 넌?”
“없……다.”
“어쩐지 상황 파악을 못 하더라 했더니, 친구가 없구나.”
“갑자기 친구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뭐냐?”
“부영반의 절친은 영반이나 다름없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네가…….”
“한 번만 더 반말하면 저 아래로 던져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무혼은 자운영에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이런 개…….”
턱!
자운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혼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계속해.”
무혼은 무서운 얼굴을 자운영 바로 앞으로 가져갔다.
“아니오.”
자운영은 고개를 저었다.
무혼의 표정을 보건대 정말로 던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럼 질문을 하겠다. 잘 생각하고 신중하게 대답해라. 내가 누구냐?”
“…….”
자운영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내가 누구지?”
무혼은 다시 물었다.
“부, 부영반 친구십니다.”
자운영은 말을 올렸다.
“넌?”
무혼의 시선이 권말남에게로 향했다.
“부제독의 친구예요.”
“이제야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는 모양이구나.”
무혼은 싱긋 웃었다.
“뭐가 필요해서 서열을 정리한 거냐?”
그래도 무혼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바타르였다.
그는 무혼이 권말남과 자운영에게 뭔가를 요구하기 위해 장광설을 풀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화탄이 필요해.”
“화탄?”
“천년곡에서 우리가 화탄에 당했잖아. 그걸 갚아 줘야지.”
“저 아래로 화탄을 퍼붓겠다고?”
“가장 좋은 방법은 네가 헬파이어 마법이나 블리자드 마법을 펼쳐서 저 아래를 초토화시켜 버리는 건데, 너는 죽어도 안 해 줄 거잖아.”
“그건 절대 못 하지.”
바타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화탄을 가져오라고 하는 거야.”
“화탄을 어디서 가져온다는 거냐?”
“그건 권말남이 알 거야.”
무혼은 권말남을 보았다.
“화탄을 가져오려면 안휘성 성도인 합비로 가야 해요.”
합비까지 가는 건 너무 멀다는 걸 상기시켜 주려고 한 말이었다.
“너희 둘이 다녀와.”
무혼은 권말남과 바타르를 가리켰다.
“우리 둘이요?”
“녀석들이 도망치면 말짱 헛일이니까 내일 저녁때까지는 와야 해.”
“하루 만에 다녀오는 건 불가능해요.”
“너희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바타르는 돼.”
“그래요?”
권말남은 바타르를 보며 물었다.
“험! 나만 믿어라. 하루가 아니라 반나절이면 된다.”
“자식, 좋아하는 사람 앞이라고 허풍은.”
무혼은 피식 웃었다.
합비의 지역 좌표를 알면 반나절이면 충분하겠지만, 그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그럼 바타르가 할 수 있는 건 텔레포트 마법이다.
그 마법을 펼쳐 합비로 가고, 다시 이런저런 마법을 이용하여 화탄을 훔쳐 내려면 하루로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기만 믿으란다.
좋아하는 이 앞에서 뻥을 치는 건 드래곤도 인간과 큰 차이가 없었다.
“허풍은 무슨, 자식아. 한나절이면 충분해.”
“그럼 다녀와.”
“몇 개나 가져오면 되는데?”
바타르가 물었다.
“저 아래쪽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정도면 돼.”
“만 개?”
“그 정도면 될 것 같아.”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바타르는 권말남을 품에 안았다.
“저들이 보는데…….”
권말남은 부끄러운 듯 몸을 꼬았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바타르의 품을 벗어나진 않았다.
“마법을 펼치려면 널 안을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
“저기요.”
권말남은 북쪽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꽉 잡아라. 텔레포트!”
바타르는 나직하게 소리쳤다.
순간 바타르 주위로 뭔가가 모여드는 듯하더니 씻은 듯 사라졌다.
“헉!”
텔레포트 마법을 처음 접하는 자운영은 질겁했다.
“어, 어디로 간 겁니까?”
자운영은 무혼을 보며 물었다.
“저기.”
무혼은 조금 전 권말남이 가리켰던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자운영은 시선을 들었다.
“맙소사, 무슨 신법이?”
그는 경악했다.
정말로 수천 장 떨어진 산봉우리 정상에 바타르와 권말남이 서 있었다.
권말남이 손을 흔들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바타르와 권말남은 다시 모습을 감췄다.
“저게 마법인가요?”
자운영이 물었다.
“응.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바타르 저 자식만 가능해.”
“그럼 조금 전에 말씀하신 헬파이어나 블리자드 마법은 강한가요?”
“헬은 지옥을 뜻하고 파이어는 불을 뜻해.”
“지옥불이란 뜻이군요.”
“헬파이어를 펼치면 저 아래쪽은 불구덩이로 변할 거야.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두 잿더미로 변할 테고.”
“그럼 블리자드 마법은?”
“헬파이어의 반대야.”
“얼음 지옥으로 변한단 말이군요.”
“맞아. 저 자식은 그런 마법을 몇 번씩 펼칠 수 있어.”
“그 마법 펼치는 게 어렵습니까?”
“인간 마법사에게는 어렵지만 저 녀석은 약간의 수고만 하면 돼.”
“그런데 왜 안…….”
“저 녀석은 중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거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것까지 다 말해 주려면 복잡해. 네가 우주의 인과율이란 것도 이해를 해야 하고. 문제는 그 중립이라는 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거야.”
“정하기 나름이란 말인가요?”
“맞아.”
“결론은, 내키지 않아서 안 해 준다는 거군요.”
“그렇지.”
“권 첩형이 부탁하면 들어줄 것도 같은데…….”
“권말남?”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 해 달라 하면 다 해 주잖습니까?”
“……!”
무혼은 자운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건데?”
“뭘…….”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별도 달도 따 준다는 말 말이야.”
“그게, 알고 있는 줄 알고…….”
“젠장!”
무혼은 바타르와 권말남이 간 곳을 보았다.
하지만 둘은 이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
무혼은 한편에 자리를 잡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안 내려가 볼 겁니까?”
“그러다가 신족 놈들이 도망치면 어쩌려고.”
“도망쳐요?”
“싸움이 안 되면 도망쳐야지 별수 있어?”
“그들은 천 명이 넘고 우린 우리 둘이 내려간다고 해도 네 명입니다.”
무혼과 자신이 내려가면 아래쪽에 두 명이 있으니까 네 명이 된다. 자신들 네 명을 피해 적 일천 명이 도망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금장생 그 녀석은 몰라도 나는 일당천이야. 내가 내려가는 순간 녀석들은 도망을 칠 테고 바타르와 권말남이 가져올 화탄은 쓸모가 없어져. 나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아. 저 아래쪽으로 화탄을 꼭 던지고 싶어. 반드시.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너도 한숨 자.”
“안 춥습니까?”
“추워.”
“추운데도 잠이 옵니까?”
“안 와.”
“그런데?”
“그동안 잠을 거의 못 잤잖아. 어떻게든 자려고 해 봐야지.”
“어차피 내려가지 않을 거면 따뜻한 곳으로 가서…….”
“너 이게 뭐라고 생각해?”
무혼은 옆에 놓인 활과 화살을 가리켰다.
“활과 화살입니다.”
“내가 이걸 왜 꺼내 놨을까?”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놈들을 없애려고 꺼낸 걸로 압니다.”
“그런데도 따뜻한 곳으로 가자는 거야?”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땅을 파고 안으로 들어가면 더 따뜻하겠지?”
“바람만 맞지 않아도 두 배는 더 따뜻할 겁니다.”
“그래?”
무혼은 주머니 안에서 마법 가방을 꺼내 입구를 열더니 삽 한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자운영에게 건넸다.
“파라고요?”
“따뜻한 방도 만들고 너는 추위도 몰아내고, 일석이조잖아.”
“얼마나 크게 팔까요?”
“두 사람이 누울 정도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자운영은 땅을 팠다.
꽁꽁 언 땅이지만 내공을 동원하자 푹푹 파고 들어갔다.
“그쪽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땅을 파면서 물었다.
“무슨 일을 했을 것 같아?”
무혼은 되물었다.
“명나라로 치면 제독동창이나 금의위 영반 같은 직책에 종사했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제가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 앞에서 위축되는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게 공자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 같아서요.”
자운영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그는 금의위 영반 앞에서도 주눅 든 적이 없다. 그런데 무혼 앞에서는 달랐다.
높은 직책을 가졌다면 직책이 주는 위압감 때문에 그런가 하겠지만 무혼은 양민이다. 무인이긴 하지만 부영반보다 무공도 낮다.
그런데 풍기는 위엄은 부영반이 따르지 못한다.
아니, 금의위 영반이나 제독동창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다.
그 자존심 강한 권말남이 꼬리를 만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권말남이 고개를 숙인 건 부제독 친구라서가 아니었다. 풍기는 위엄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어.”
“네?”
“네가 말한 제독동창이나 금의위 영반 정도 되는 애들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다녔으니까.”
“그런 분들이 무릎을 꿇고 다닐 정도의 직책은 하나뿐인데요?”
“내가 다스렸던 나라는 샤이어 제국이라 불러. 인구는 일억 오천만 명이고.”
“에…….”
자운영은 멍한 얼굴로 무혼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