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14)
자객은 흔적을 남긴다
소리 없이 움직이던 금장생은 부활전사단과 집행사자단 중간 지점에서 방가려를 만났다.
강해진 사람은 방가려뿐만이 아니었다. 방가려만큼은 아니지만 금장생도 약간의 기연을 얻어 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더하여 그가 얻은 가장 큰 성과는 몸에 대한 느낌이었다.
한음절맥이 완벽하게 낫지 않았다는 심적인 불안감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도 늘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니고 살았다.
마치 건강염려증을 가진 사람이 ‘내 몸은 부실해. 약을 좀 먹어야겠어.’라고 하는 상태와 비슷했다.
실제로 몸이 부실한 건지, 약이 필요 없을 정도로 건강한지는 알 수 없다.
본인이 느끼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약을 먹고 나면 자신이 아주 건강해졌다고 느낀다.
금장생의 기분도 그랬다.
아주 건강해진 느낌, 호전된 느낌, 부족했던 부분이 채워져 완벽해진 느낌이 들었다.
“내가 들켰어.”
“몇 명이나 없앴는데요?”
“열 명.”
“그 정도면 충분해요. 가요.”
금장생은 방가려를 잡고 몸을 날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연못에 내려섰다.
“들어가세요.”
“넌?”
“아직 밤이잖아요.”
“밤?”
“내 업무 시간이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알았어.”
방가려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살이 잠잠해지자 금장생은 자리를 옮겼다.
희미하게 깔려 있는 안개와 어둠. 그 두 가지는 자객들에게 최상의 환경이다.
이런 곳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
물론 극한의 은신술은 필수다.
척!
금장생은 한곳에 납작 엎드렸다.
그는 오른손에 작은 왜도를 들고 왼손에는 흑사아를 들었다.
전면에서 부활전사단 대원 두 명이 주위를 살피며 다가오고 있다.
금장생은 천천히 심장박동 수를 줄였다.
잠시 후 그는 완벽하게 무無의 상태가 되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살인지도殺人之道라고 이름 지은 경지다.
금장생이 숨어 있는 것도 모르고 부활전사단 두 명은 주저 없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천리지청술을 극한으로 펼쳐 주위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 장 떨어진 곳에서 이동 중인 동료의 발소리도 들렸다.
‘절대 숨을 수 없다.’
부활전사단 대원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 앞에서 뭔가 일어선 건 그때였다.
그림자처럼 생긴 것이 벌떡 일어나 바람처럼 덮쳐 왔다.
“저…….”
푹! 푸욱!
말을 하려는 순간 화끈한 기운이 목을 가로막았다.
부활전사단 두 명의 숨이 끊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금장생은 넘어지려는 두 사내를 잡았다.
자객행을 할 때는 죽은 자가 넘어질 때 나는 소리마저도 조심해야 한다.
일이 끝났다고 쓰러지는 소리가 나든 말든 그냥 가게 되면 발각되기 십상이다.
최고의 자객은 자신이 왔다 갔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게 일을 처리하는 자다.
가장 좋은 건 자객이 다녀가고 이삼일 후에 시체가 발견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임무를 마친 후의 처리도 임무만큼이나 중요하다.
대부분의 자객이 그걸 소홀히 해서 임무를 성공하고도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숨이 끊어진 두 명을 소리 없이 눕힌 후 주위를 살폈다.
커다란 바위 아래쪽에 두 사람 정도가 누울 공간이 보였다.
허공섭물로 시체를 들어 올렸다. 바위 옆으로 이동하여 머리와 몸통을 분리하여 바위 아래로 집어넣었다.
피 냄새가 퍼져 나가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까지 없앨 방법은 없다.
금장생은 자리를 옮겼다.
빠르게 움직이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소리 없이 시간이 흐르고 아침이 찾아왔다.
“집합하라!”
이호는 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부활전사단 대원들이 이호 옆으로 모여들었다.
“왜 이것뿐이지?”
이호의 시선이 옥구에게로 향했다.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옥구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부활전사단은 이곳으로 모여라!”
하지만 더 이상 오는 대원은 없었다.
“부활전사단은……!”
“오지 않으면 죽었다고 봐야지. 그렇게 부른다고 죽은 녀석들이 오겠느냐?”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갑옷을 입은 엘이 다가왔다.
“죽었단 말입니까?”
이호가 물었다.
“바위 밑, 움푹 들어간 구덩이 등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시체가 숨겨져 있었다.”
“숨겨져 있었다고요?”
“그렇다.”
“시, 시체를 볼 수 있습니까?”
이호는 다급하게 물었다.
“위치를 가르쳐 주는 건 어렵지 않다만, 왜 그러느냐?”
엘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일단 가르쳐 주십시오.”
“따라와라.”
엘은 앞장서 걸었다.
잠시 후 그는 시체 두 구가 숨겨져 있는 바위 앞에 도착했다.
“저기다.”
엘은 바위 아래를 가리켰다.
“일호!”
이호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엘은 물었다.
“일홉니다.”
“일호면 천객 일호를 말하는 거냐?”
“그렇습니다. 자객행을 마친 후 신발을 벗기는 건 일호만의 특징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떠나면 끝나는 단순한 일이지만 자객들은 많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자기도 모르게 남기는 것도 있지만, 일부러 남기는 것도 있다.
일부러 남기는 건 다음 임무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물론 그 흔적은 보통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자객만이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다.
천객 일호의 가장 큰 특징은 시체의 신발을 벗겨 놓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두 시체는 신발을 신지 않은 채였다.
“신발은 옮기다가 벗겨질 수도 있다.”
엘은 아직 팔왕이 천객 일호의 화신이란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팔왕과 천객 일호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컸다.
“부활전사단 단주의 말이 맞소.”
나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엘은 고개를 들었다.
네 명이 날개를 펼친 채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삼백 년 전 활동했던 구마 중 아직 살아 있는 네 명이었다.
네 명은 엘 옆으로 내려섰다.
맨 오른편으로 내려선 덩치가 큰 자는 사신마존死神魔尊 역부심이고 체구가 왜소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가 없는 자는 환영마존幻影魔尊 영제, 대머리 중년인은 철마존鐵魔尊 마적천, 얼굴은 물론이고 손까지 털로 뒤덮인 중년인은 야수마존獸魔尊 야율리였다.
“여긴 웬일이냐?”
엘은 의아한 얼굴로 네 사람을 보았다.
“우린 좌천좌의 명으로 일호를 추격 중이었습니다.”
사신마존 역부심이 대답했다.
“일호가 여기로 왔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역부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냐?”
엘은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떤 근거로 놈이 일호라고 확신하는 거지?”
“천사만리향입니다.”
“천사만리향?”
“우리 구마의 핏속에 들어 있다가, 외부로 나오면 그때부터 향기를 뿜어내는 특이한 녀석입니다.”
“우리도 맡을 수 있는 향이냐?”
“천사비향이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맡을 수 없습니다.”
“그걸 너희 핏속에 투입한 이유가 뭐냐?”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불신?”
“삼백 년 전 마맹을 다스릴 때, 무혼이란 녀석에게 귀마존, 빙마존, 풍마존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녀석에게 무공을 가르친 사람이 우리였거든요.”
“그래서 아홉 명 중 누군가가 무혼을 이용해서 벌인 차도살인이라 생각했다는 거냐?”
“한 명만 남으면 삼인지하 만인지상이 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삼인은 세 장로를 말하는 거냐?”
“네. 그리고 의심이 가장 심했던 이들은 무혼에게 당했던 세 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우리 몸속에 흔적을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집어넣은 게 천사만리향이라 부르는 특이한 향입니다. 천사만리향은 죽임을 당하면 바로 발산하게 돼 있고, 시체로부터 이 장 떨어진 곳에 있는 자에게는 무조건 스며들게 됩니다. 한번 스며든 향은 떨쳐 낼 수 없고요.”
“이 장 떨어진 곳이면 소용없다는 걸 모두 알면 의미가 없지 않느냐?”
“의미가 있건 없건, 그 후로 우리끼리 싸운 적은 없습니다.”
“너희 넷만 온 거냐?”
“아닙니다. 구마대를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구마대는 구마 휘하 신족들이었다.
역부심은 야수마존 야율리를 보았다.
야율리는 입에 손을 대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휘파람 소리가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잠시 후 엘 일행의 시야에 신족 수백 명이 나타났다. 전부가 백색 날개를 가진 중급이었다.
바닥으로 내려선 구마대 대원들은 적신천사마공을 거뒀다. 그러자 날개가 꺼지듯 사라졌다.
“전부 몇 명이냐?”
“팔백 명입니다.”
“좋다. 이제 놈을 잡을 방법을 생각해 보자.”
엘의 시선이 이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말했다.
“놈이 일호라면 싸우는 방법이 달라져야겠구나.”
“그렇습니다. 보통 무인을 대하듯 하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상대는 천객 일호이자 사상입니다.”
“어떻게 하자는 거냐?”
“자객의 수법으로 싸워야 합니다.”
“우리도 은신술을 펼쳐야 한다는 거냐?”
“은신술을 펼쳐야 할 뿐 아니라, 먼저 움직여서도 안 됩니다.”
“좋다. 지금부터 네가 지휘를 해라.”
엘은 이호에게 지휘권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구마 네 명을 한 편으로 불렀다.
그의 작전은 단순했다. 아래쪽을 총 여섯 구역으로 나누고 각각에게 한 구역씩을 할당했다.
최남단은 역부심과 환영마존 영제에게 맡겼고 중간은 이호 자신과 철마존 마적천, 그리고 북쪽은 엘과 야수마존에게 맡겼다.
“자객술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먼저 움직인 쪽이 패할 확률이 팔 할이라는 걸 명심해 주십시오.”
“알았다.”
네 마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곧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호를 비롯한 부활전사단 백 명이 맡은 곳은 중간 지점의 절벽 근처였다.
이호의 시선이 전방의 개울에 고정되었다.
개울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낭떠러지 아래쪽인데.”
그는 고개를 들었다.
절벽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라고 하기에는 수량이 많았다.
“저 물, 어디서 시작되는 거지?”
이호는 옥구에게 물었다.
“이십 장 정도 올라가면 절벽 아래쪽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절벽 아래에서 흘러나온다는 거냐?”
“네. 가 보시겠습니까?”
“아니다.”
이호는 고개를 저었다.
“시작할까요?”
옥구가 물었다.
“해라.”
“알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옥구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부활전사단 대원들은 은신술을 펼쳤다.
그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주변 사물로 동화돼 갔다.
신족의 은신술의 가장 큰 강점은 안 보이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물화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은신술은 무공을 익혀 얻는 게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이다. 사물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사물 자체가 돼 버리기 때문에 모르는 자들은 흔적을 감지할 수가 없다.
백여 명의 무인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는 게 바로 신족의 그런 능력 때문이다.
그 능력을 자신들은 천사력天使力이라 한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일호. 지금까지는 네가 이겼을지 모르지만 이번엔 다르다.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
이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탁 트인 공간이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일호가 백번 유리하다.
하지만 이곳은 폐쇄된 공간.
더구나 신족의 수는 천 명이 넘는다.
신족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현재 그는 극한의 은신술을 펼친 상태로, 육안 확인이 불가능했다.
그는 주변을 살폈다.
삼 장, 오 장, 혹은 십 장 간격으로 신족들이 웅크리고 있다.
숨어 있는 이들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바위고, 나무고, 구덩이다.
“이번엔 내가 이긴다.”
이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바위 같은 단단함이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