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401화 (401/524)

황금가 (401)

“앞으로 십오 년 동안 군사가 화왕이 되란 말이오.”

“…….”

제갈현리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는 헌원중천의 아들인 자신이 화왕이 돼야 한다고 말할 줄 알았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게 맞다.

그런데 화왕 자리를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오 년을 양보하겠다니.

선뜻 믿기 힘든 말이었다.

“대신 십오 년 후에는 내게 넘겨주겠다는 맹세를 해야 하오. 화신천대도 내게 줘야 하고.”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제갈현리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화가 조직 중 내 편이 한 곳이라도 있다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나는 지금 화왕이 된다고 해도 허수아비가 될 뿐이오. 화가를 장악하지 못한 나는 팔왕에게 질질 끌려다니게 될 테고, 결국 화가는 지리멸멸하게 될 거요. 하지만 군사가 화왕에 앉으면 최소한 화가는 지킬 수 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오.”

“그러니까 대공자 말은, 난세일 동안에는 내가 화가를 맡고 평화 시대가 되면 돌려 달라는 거군요.”

“그렇소.”

“내가 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올해 군사 나이가 몇 살이오?”

“예순다섯 살입니다.”

“십오 년 뒤에는 몇 살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오?”

“여든 살이지요.”

“화가를 물려줄 피붙이는 있소?”

“으음!”

제갈현리는 신음을 내뱉었다.

하나 있는 손자는 마가에서 죽었다. 설사 화가를 완벽하게 장악한다고 해도 물려줄 사람이 없었다.

“군사도 그렇고 나도 혼자요. 그리고 나는 군사가 통치하는 십오 년 동안 열심히 내 편을 만들어 둘 생각이오. 군사가 화가를 내게 물려줄 수밖에 없도록 말이오.”

“그렇군요.”

제갈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헌원중천은 물었다.

“좋습니다.”

제갈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십오 년이면 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긴 세월이다. 그 시간이면 헌원중천을 없애고도 남는다.

헌원중천도 나름 준비를 하겠지만, 머리 쓰는 거라면 자신이 한 수 위다.

그리고 십오 년 후라면 헌원중천에게 넘겨주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무도 없느냐?”

헌원중천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곧 시비가 안으로 들어왔다.

“군사와 축하주를 하고 싶은데 준비할 수 있겠느냐?”

“시간이 좀 걸립니다.”

“상관없다.”

“준비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시비는 인사를 하고 나갔다.

“내가 수락할 줄 알고 준비를 한 겁니까?”

제갈현리는 슬쩍 떠보았다.

만일 미리 준비했다면, 헌원중천의 의도를 의심해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군사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준비를 합니까? 이렇게 쉽게 수락할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를 할 걸 그랬습니다.”

헌원중천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제갈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 나온 건 한 식경 후였다. 안주까지 준비한 걸 감안하면 적당한 시간이었다.

제갈현리는 의심을 풀었다.

하지만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죽엽청이군요.”

헌원중천이 준비한 죽엽청은 제갈현리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었다.

“별로 즐기진 않는데 창고에 몇 종류 없는 모양입니다. 다른 걸로 바꿀까요?”

“아닙니다. 죽엽청이 좋습니다.”

제갈현리는 고개를 저었다.

죽엽청의 맛은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다. 설사 무색무취의 독을 푼다고 해도 농도의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죽엽청은 가장 안전한 술이었다.

“화가의 미래를 위해 한 잔 하시지요.”

헌원중천은 술을 따랐다.

두 사람은 바로 술잔을 비웠다.

제갈현리는 술을 입안에 머금고 잠시 뜸을 들였다. 독이 들었다면 다른 맛이 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연거푸 세 잔을 마시고 비로소 안주를 들었다.

안주는 구운 양념 소고기였다. 간이 약간 짰지만 독한 죽엽청 안주로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 병을 거의 다 비웠다.

남은 술은 두 잔 정도였다. 안주는 어느새 접시만 남아 있었다.

“안주가 떨어진 것 같은데 더 있는가?”

제갈현리는 안주 접시를 가리켰다.

“이제 슬슬 소식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괜찮은 거요?”

헌원중천은 제갈현리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소식이라면 혹시…….”

제갈현리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주르르!

코에서 피가 흘렀다.

제갈현리는 얼른 손을 받쳤다. 그러자 손바닥 위로 피가 흥건히 고였다.

“이건…….”

제갈현리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헌원중천을 보았다.

헌원중천은 태연하게 죽엽청을 따라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죽엽청을 확인했다.”

제갈현리가 말했다.

입을 벌리자 입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마지막 가는 길인데 가장 좋아하는 술에 독을 풀 리가 없잖아.”

“내, 내가 죽엽청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단 말이냐?”

“응. 의심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럼…….”

제갈현리의 시선이 안주가 담겼던 접시로 향했다.

“맞아. 독은 안주에 풀었어.”

헌원중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제갈현리는 손을 들어 헌원중천을 가리켰다.

“내가 화왕 자리를 네게 넘겨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헌원중천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죽일 놈!”

제갈현리는 죽일 듯한 눈빛으로 헌원중천을 보았다.

그의 코와 입에서는 점점 더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왔다.

“죽일 놈은 종놈 주제에 주인의 재산을 넘본 너지, 상속자인 내가 아니잖아.”

“넌…….”

“네가 욕심을 접을 것 같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

“평생 네놈을 저주할 것이다. 우엑!”

쿵!

제갈현리의 상체가 앞으로 처박혔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헌원중천은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가만히 앉아서 사후경직이 일어나고 있는 제갈현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화소연이 들어왔다.

그녀는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끝났어?”

헌원중천은 물었다.

“이 안에 장척우의 머리가 들어 있어요.”

화소연은 상자를 가리켰다.

“이제 화가는 내 것이 된 건가?”

“맞아요. 화가 건물부터 시작해서 담벼락 옆의 잡초까지, 전부 당신 거예요.”

상자를 내려놓은 화소연은 헌원중천 앞으로 가서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윗옷 매듭을 풀었다.

“그 잡초는 내 마음대로 뽑아도 되는 거지?”

헌원중천은 옷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으며 물었다.

“물론이에요.”

화소연은 활짝 웃으며 헌원중천의 요대를 풀었다.

제갈현리와 장척우의 죽음은 다음 날 금장생에게 보고되었다.

“제갈현리는 처리할 명단에 올려 두었던 잔데…… 그자에게 상이라도 줘야겠네요.”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상을 준다고요?”

“이거 어때요?”

금장생은 검 한 자루를 탁자 위로 올렸다.

그가 꺼낸 건 바타르가 준 가방 안에 굴러다니던 것들 중 하나였다.

검집과 검이 모두 황금색이고, 검집과 검 면에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당신이 나보다 더 좋아하는 황금 아녜요?”

“무 형에게 물으니까 황금이 아니랍니다. 자기가 사는 곳에서는 황금보다 더 비싼 금속이라고 하는데, 여기선 먹어 주지 않으니까…….”

“의미 없다고요?”

“네.”

“그렇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은 검을 붉은색 비단으로 친친 쌌다. 그리고 늦은 아침을 먹고 팔왕대로 갔다.

오늘 팔왕대에서 팔왕 즉위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왕관이나 이런 걸 씌워 주는 게 아니라 가솔들 앞에서 팔왕이 됐음을 선포하고 인정을 받는 자리였다.

금장생이 도착하자 각 가문의 가솔들과 왕들은 이미 도열해 있었다.

“팔왕 드십니다!”

그가 다가가자 마가의 군사 뇌웅 유공이 크게 소리쳤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각 가문의 가솔들은 함성으로 금장생을 환영했다.

금장생은 단 앞에 서서 함성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조용해졌다.

“팔왕 훈시가 있겠습니다.”

“험!”

금장생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바야흐로 중원은 난세에 접어들었습니다. 우리 의사와는 무관하게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피하지 않을 겁니다. 저들이 전쟁을 원하면 전쟁을 할 겁니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대가는 확실하게 지불하게 할 겁니다. 우리 팔왕가를 우습게 보면 어떻게 된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줄 겁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중원 대륙의 주인이 우리였고 앞으로도 우리임을 인식시켜 줄 겁니다. 우리 팔왕가는 곧 중원입니다.”

“우와아아!”

“와아아아!”

각 가문의 가솔들은 또다시 함성을 내질렀다.

함성이 잦아들자 유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각 왕들의 충성 맹세와, 팔왕의 신물인 팔왕령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유공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암왕 유가람이 앞으로 나왔다. 그의 손에는 팔왕령이 들려 있었다.

유가람은 팔왕령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신 암왕 유가람과 암가는 팔왕께 충성을 다할 것을 팔왕령 앞에 엄숙히 맹세합니다! 암가에서 행하는 모든 명령 위에 팔왕령이 있을 것이며, 팔왕령 위에 팔왕이 있을 것입니다!”

유가람은 팔왕령을 앞으로 내민 채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암왕.”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가람은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옆에 있는 전왕에게 팔왕령을 주었다.

전왕 막거성은 팔왕령을 가지고 앞으로 나왔다.

금장생을 바라보고 팔왕령을 높이 들었다. 조금 전 암왕 유가람이 그랬던 것처럼 충성 맹세를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전왕에 이어 해왕 철무혼, 사왕 혈사륵, 철왕 최중헌이 차례로 충성 맹세를 했다.

맨 마지막에 팔왕령을 받은 사람은 헌원중천이었다.

헌원중천이 팔왕령을 받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 또한 제갈현리와 장척우가 죽은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헌원중천이 화왕 자리에 서 있다. 그건 곧 두 사람을 살해한 자가 헌원중천이란 뜻이 된다.

이 상황을 금장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금장생은 헌원중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금장생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헌원중천이 앞으로 나왔다.

다른 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팔왕령을 높이 들었다.

“신 화왕 헌원중천과 화가는 팔왕께 충성을 다할 것을 팔왕령 앞에 엄숙히 맹세합니다. 팔왕과 팔왕령은 화왕의 명령보다 항상 위에 있을 것이며, 절대 권위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고맙소, 화왕.”

“우와아아아!”

“와아아아!”

금장생의 입에서 화왕이란 말이 떨어지자 화가 진영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팔왕령을 팔왕께 가져다 드리시오.”

유가람이 말했다.

헌원중천은 금장생 앞으로 갔다. 그리고 팔왕령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금장생은 팔왕령을 받아 들었다.

헌원중천은 몸을 돌렸다.

“화왕, 잔깐만요.”

금장생이 헌원중천을 불렀다. 헌원중천은 의아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화왕이 된 축하 선물로 이걸 주고 싶은데 받아 주시겠습니까?”

금장생은 준비한 검을 들어 올렸다.

“기꺼이 받겠습니다, 팔왕.”

헌원중천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들어 올렸다. 고개는 약간 숙인 채로.

신하가 황제의 선물을 받을 때 취하는 자세였다.

사실 헌원중천으로서는 팔왕인 금장생의 선물은 차기 화왕을 확인시켜 주는 증명서와 같은 것이었다.

제갈현리와 장척우의 죽음으로 인해 가솔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상태에서 화가에서의 입지가 많이 약해졌다.

반란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 팔왕인 금장생이 검을 선물로 준 것이다.

“축하합니다, 화왕!”

“감사합니다, 팔왕.”

헌원중천은 검을 든 채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험!”

헌원중천이 제자리에 서자 금장생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 팔왕령을 받기 전까지는 나는 각 왕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내 집안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릅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여섯 분은 팔왕인 내게 충성 맹세를 했고 부하가 됐습니다. 주군인 나는 부하를 지켜 줄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내 부하의 신상에 이상이 생기면 내가 가진 모든 권위를 걸고 반드시 파헤쳐서 바로잡을 것입니다. 이 점 명심해 주었으면 합니다.”

각 왕가 내의 잡음은 이번까지만 허락하고 다음부터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임과 동시에 화왕이 된 헌원중천에게 힘을 실어 주는 발언이었다.

“알겠습니다, 팔왕!”

각 왕가 가솔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금장생은 헌원중천을 보았다. 마침 고개를 들던 헌원중천과 시선이 마주쳤다.

금장생은 빙그레 웃어 주었다.

헌원중천은 살짝 묵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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