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397화 (397/524)

황금가 (397)

제자리

불여하가 흘린 눈물로 인해 금장생의 옷이 흠뻑 젖었다.

“그만 우세요.”

금장생은 불여하의 턱을 들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당신을 떠나지 않았다면 운영과 순을 잃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으엉!”

불여하는 통곡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통곡은 금세 멈췄다. 금장생이 자신의 입으로 불여하의 입을 막아 버린 탓이었다.

금장생이 입을 맞추자 불여하의 눈이 커졌다.

이렇듯 갑작스럽게 입을 맞추어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놀람도 잠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마치 과거 자신과 루하의 방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 루하는 늘 입맞춤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왼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어 가슴을 만지고 오른손은 엉덩이를 그러쥐었다.

그러면 자신은 루하의 옷을 벗겼다.

불여하는 떠오르는 대로 행동했다.

금장생이 가슴으로 손을 집어넣지도, 엉덩이를 그러쥐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어느새 금장생은 알몸이 됐다.

이어 불여하는 팔을 좌우로 벌렸다. 남편 루하가 옷을 벗겨 줄 때 하던 행동이었다.

금장생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불여하를 보았다.

‘어쩔 수 없지.’

그는 이내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불여하의 옷을 벗겼다. 불여하도 금세 알몸이 됐다.

불여하는 곧 금장생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후끈한 열풍이 실내를 감쌌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벗어 놓은 옷 위로 누웠다. 금장생은 불여하의 눈을 보았다. 눈동자에 초점이 거의 없었다. 불여하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있다는 뜻이었다.

문득 그녀가 측은해 보였다.

금장생은 불여하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불여하가 바로 입을 맞춰 왔다.

금장생은 그녀에게 맡겼다. 불여하는 바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또다시 입을 맞췄다.

벌어진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어 샅샅이 훑었다. 그러면서 금장생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가슴에 대 주었다. 금장생의 입을 떠난 그녀의 입술은 아래로 흐르면서 금장생의 몸 곳곳에 입술 자국을 남겼다.

금장생은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도 그랬다. 불여하는 늘 주도적이었다. 대부분 자신이 위로 올라가 관계를 주도했다. 그녀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전혀 거리낌 없는 행동이다.

아마 그런 성격이 그녀를 팔왕까지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장생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불여하로부터 불어 나온 열풍에 사고가 마비되고 말았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반 시진 후였다.

두 사람은 꼭 껴안은 채 호흡을 골랐다.

“고마워요.”

불여하는 나직하게 말했다.

“뭐가요?”

“절 용서해 주어서요.”

“용서?”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떠났잖아요.”

“그건 뭐…….”

금장생은 어색하게 웃었다.

“당신에겐 너무 오랜 세월이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운영은 조금 컸다고 의젓하게 잘 다녀오라고 했고 순은 가지 말라며 떼를 썼죠. 당신은 할 말이 있는데도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죠.”

“나도 조금씩 기억이 나네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불여하의 말이 맞았다. 불여하가 떠날 때 가족의 마지막 광경이었다. 다만 그녀의 말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는데, 운영이 의젓하게 굴었던 건 그녀가 있을 때뿐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자 펑펑 울었다.

왜 그렇게 우느냐고 묻자 엄마를 다시는 못 볼 것 같다고 했다.

운영의 말이 맞았다.

그때가 마지막이었고 다시는 불여하를 보지 못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다섯 살 사내아이와 세 살 딸을 키우는 거야 뭐…….”

금장생은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 전에 불여하가 있을 때도 자신이 키우다시피 했지만, 그녀가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천지 차이였다. 그녀가 있을 때는 아이들은 그녀에게 응석을 부리고 짜증을 내기도 했는데, 그녀가 없자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두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놀아 주는데도 하루가 부족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공부도 가르쳐야 했다.

“가문에서 도와주지 않았어요?”

불여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가솔들에게 자신이 없더라도 남편과 자식을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당신이 떠나고 나서 사가의 모든 권력이 혈가로 넘어갔고, 일 년 후에 우린 성벽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성벽 근처는 빈민촌인데…….”

불여하는 말끝을 흐렸다. 그곳이 빈민촌이 된 건 죄수들 때문이었다.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 자들은 특별히 써먹을 곳이 없어, 성벽 근처에 집을 지어 주고, 땅을 개간하거나, 광석을 채취하는 일을 시켰다.

“대장간에서 일을 하면서 삼 년을 살았습니다. 운영이도 제법 커서 날 돕기도 했고요.”

“대, 대장간 일을 했다고요?”

불여하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습격을 당했습니다.”

“누가 사가를 습격했는지 아세요?”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방인은 절대 아니었다는 겁니다.”

“왜…….”

“신족이었던 내가 이방인을 몰라볼 리가 없잖습니까? 그리고 그자들이 노린 건 내가 아니라 운영과 순이었습니다.”

“제 핏줄을 없애기 위해 습격을 했다는 거군요.”

“내 생각은 그래요. 그들과 싸우다가 심장을 찔렸습니다. 다른 힘은 다 사라졌는데 부활의 힘만 남아서 다시 살아났죠. 눈을 떠 보니 어느 계곡에 시체들과 함께 버려져 있더군요. 그곳을 모두 뒤졌는데도 운영과 순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부터 운영과 순을 찾았다.

가장 먼저 사가를 뒤졌지만 거기엔 없었다. 사가인들이 운영과 순을 찾는 걸 보고 그들이 살해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운영과 순은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말이 된다.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신을 저주하고 욕했다.

낮이면 아들을 찾아 헤매고, 밤이면 무능력한 자신을 저주하면서 보냈다. 그렇게 십 년을 보냈다.

유일하게 남은 신족의 능력인 모진 수명은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않고 돌아다니는데도 죽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무덤을 만들고 입구를 안에서 무너뜨린 후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 누웠다.

금장생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다른 건 다 기억이 희미한데 운영과 순의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다. 두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나타날 것만 같다.

그는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불여하는 금장생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안해요. 정말…….”

“아닙니다. 이미 지난 일인걸요. 이젠 녀석들 얼굴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금장생은 불여하를 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굳이 그 아이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는 말을 해서 불여하를 아프게 할 필요가 없었다.

“운영이하고 순 때문에 그런 거죠?”

불여하가 물었다.

“뭐가요?”

“팔왕을 유인해서 없앤 이유요.”

“풋!”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사실 그런 면도 없지 않았다. 운영과 순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가문들에서 반역이 일어나는 걸 목격했다. 전쟁터로 떠난 가주가 돌아오지 않자 이인자들이 전 가주의 가족을 몰아내고 가주가 된 것이었다.

자신 또한 라헬에게 배신당한 사건과 맞물려 그들에 대한 극심한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들을 없앨 결심을 했다.

아니, 자살을 결심했다는 게 옳다. 그들의 죽음과 상관없이 죽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생각대로 됐다.

그런데 수천 년 후에 중원의 한 가문 셋째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맞죠?”

“그 당시 많은 가문들이 전 왕의 가족을 내치고 이인자 가문이나 혹은 삼인자 가문의 가주가 왕이 됐거든요.”

“그 사실에 화가 난 거였군요.”

“신민들을 구하고도 싶었고요.”

“당신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죠.”

불여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장생의 왼팔을 잡아끌었다.

“왜?”

금장생은 의아한 얼굴로 불여하를 보았다.

“우린 기본이 세 번이었다는 거 기억 안 나요?”

“그땐 젊었고 지금은 둘 다 수천 살이 넘었습니다. 그때처럼 살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금장생은 불여하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절대 아니에요.”

불여하는 아래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금장생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이번엔 주도권을 내주기로 한 거 아닌가요?”

금장생은 불여하 입술 바로 앞에서 멈춘 채 말했다.

“그게…… 미안해요.”

불여하는 배시시 웃었다.

금장생은 멈췄던 얼굴을 다시 움직였다. 곧 두 사람의 입술이 하나가 됐다.

깊은 입맞춤이었다.

곧 두 사람의 호흡이 가팔라졌다. 입술을 떠난 금장생의 입이 불여하의 전신을 누볐다. 금장생의 입술이 자국을 남길 때마다 불여하는 신음을 뱉어 내며 꿈틀거렸다. 처음보다 더 강한 열풍이 몰아쳤다.

두 사람의 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모든 걸 잊고 완전하게 서로에게 몰두했다.

불꽃같았던 반 시진이 훌쩍 지나갔다.

“앞으론 당신이 하세요.”

불여하는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주도권을 내주자 전보다 더 큰 쾌감이 밀려왔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넘은 파도가 무려 세 번이었다.

“네. 다시 기회가 온다면.”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렇네요. 우린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이렇게 만날 수 없는 사이죠.”

불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천장을 보았다.

지금까지가 과거였다면 이젠 현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불여하는 사노왕이 되고 루하는 금장생이 돼야 한다.

“그래도 가끔 이렇게 만나는 건 괜찮죠?”

불여하가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럴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요.”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풋!”

걸음을 옮기려던 불여하가 피식 웃었다.

“왜요?”

“전에도 당신과 자고 나면 걸음걸이가 어색했거든요.”

“지금도 그런다는 건가요?”

“네.”

“그래서 기분이 나빠요?”

“아뇨.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아서 아주 좋아요.”

불여하는 빙그레 웃었다.

“그만 가요.”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호수 밖으로 나왔다. 밖은 아직 캄캄했다.

―저들은 누구죠?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불여하가 물었다.

―동창과 금의위 무인들입니다.

숨어서 염탐하고 있는 둘은 권말남과 자운영이었다.

―저들이 왜 당신을 감시하죠?

―동창과 거래를 했거든요.

―어떤 거랜데요?

―나는 사업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고 그들은 황제를 없애 달라고 했습니다.

―황제요?

―지금 황제가 크로헬이거든요.

―신족 사장로 중 한 명인 그 크로헬?

―네.

―없앨 자신 있어요?

―그건 오늘 확인해 보면 알겠지요.

―오늘이면…… 아.

불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이 오늘 싸울 자가 신족 사장로 중 가장 강했던 라헬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크로헬뿐만 아니라 카이헬과 레드헬이 모두 있긴 하지만 사상의 목표가 된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이 자객이 됐다는 게 상상이 안 돼요.

―왜요?

―당신은 내게 화를 한 번도 내지 않았던 순한 사람이었잖아요.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순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건 잘못된 선입견 중의 하납니다. 나는 화만 내지 않았을 뿐 뒤끝은 아주 강한 사람입니다.

―정말?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그 일을 잊지 않고 복수를 하려는 자가 뒤끝이 강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강하다고 하겠습니까?

―라헬을 없애려고 하는 게 순전히 복수 때문이라는 건가요?

―내가 라헬이란 사실을 깨닫기 전엔 녀석을 대장으로 앉히고 나는 이선으로 물러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변했다는 건가요?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과거와 현재 모두 당신과 악연으로 얽혔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승리하도록 응원할게요.

―고맙습니다.

금장생은 불여하를 보며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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