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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396화 (396/524)

황금가 (396)

“드래곤은 거짓말을 못 한다고 했으니까…….”

퍼뜩 정신을 차린 천마가 말했다.

“우리도 거짓말을 해.”

“네?”

“다만 이름을 걸고 거짓말을 못 한다는 거지. 아무튼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녀석은 루하야.”

“조금 전에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족이 가진 능력 중의 하나가 부활이잖아. 물론 한 번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난다는 게, 그것도 다른 종족으로 태어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녀석은 다시 부활을 했어.”

“놀랍군요.”

천마는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신왕 루하.

동시대를 살진 않았지만 말로는 많이 들었다.

신족 지배층으로부터는 왕으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신민들로부터는 역대 어느 신왕보다 사랑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신족은 루하를 찾기 위해 중원 전역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 후로 신족은 왕 자리를 놓고 장로들 간의 권력 암투가 벌어졌고 결국은 멸망의 길을 걸었다고 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신족의 왕 루하라는 걸 알았을까요?”

“처음엔 모른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이 신족이라는 걸 알아 간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각성을 하게 된다.”

“그렇군요.”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녀석을 살려 놓고 보자.”

바타르는 무혼을 가리켰다.

금장생이 무혼을 다시 본 건 그날 밤이었다.

금장생은 무혼의 얼굴을 살폈다. 창백한 걸 빼면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몸은 괜찮은 겁니까?”

“신의 눈물은 내 진짜 육체를 위해 남겨 두라고 한 건데 왜 사용한 거냐?”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무 형이 정상적인 상태일 때의 얘기지요.”

“앞으로 할 일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거냐? 내 진짜 육체는 내공이 전혀 없어.”

“내공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지난 삼백 년 동안 지기를 흡수한 덕분에 상당한 내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인시가 되면 육체는 금강불괴가 됩니다.”

“삼백 년을 고스란히 내공으로 만든다고 해도 육 갑자에 불과해. 그 정도로는 크로노마스를 잡을 수 없고.”

“샤이칸드리아 대륙에는 드래곤이 꽤 있는 것 같던데…….”

“드래곤은 왜?”

“아주 좋은 걸 가지고 있더군요.”

“너 지금 드래곤을 잡자는 거냐?”

“드래곤이라고 다 좋은 자들만 있는 게 아닐 거 아닙니까? 죄를 지어서 추방당한 자도 있을 테고, 수명이 다해 오늘내일하는 드래곤도 있을 거니까…….”

“그러니까 그런 녀석들을 잡아서 하트를 빼앗자고?”

“네.”

“끙!”

무혼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려운 일입니까?”

“오늘내일하는 드래곤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모릅니다.”

“신들의 황혼이란 뜻으로 라그나뢰크라고 불러.”

“이름만 들어도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일대일로 싸웠을 때 그놈들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그놈들은 숨이 끊어지면 자연으로 돌아가고 말아.”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가루가 돼 흩어진다는 뜻이야.”

“그럼 하트는?”

“하트도 마찬가지다.”

“아이고, 그 아까운 걸.”

“풋!”

무혼은 피식 웃었다. 금장생이 짓는 아까운 표정은 과장된 모습이 아니었다. 금장생은 정말로 드래곤 하트가 사라지는 걸 아까워하고 있었다.

“네 것도 아닌데 가루로 흩어지건 산산이 부서지건 무슨 상관이야, 인마.”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까운 겁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네요.”

“한 가지?”

“늙고 병든 드래곤을 잡아서 하트를 챙기는 수밖에 없잖습니까.”

“드래곤은 인마…….”

아프지도 않고 병도 들지 않는다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튼 무 형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니까 여기서 나가기 전에 몸이나 제대로 만들어 놓으세요.”

“잠마 그놈의 철갑거인을 상대할 방법은 강구해 둔 거냐?”

“내일 눈으로 확인하세요.”

“알았다.”

무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게요?”

“몸부터 만들라며.”

“그렇군요. 먼저 들어가세요.”

“간다.”

무혼은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그가 들어간 곳은 건물 지하 연공관이었다. 무혼은 한편에 가부좌를 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눈을 감고 몸 내부를 살폈다. 바타르가 치료를 하긴 했지만 지금 몸은 얇은 유리와 같은 상태다. 약간의 충격만 가해도 모든 게 부서지고 만다.

‘이 몸으로 양극심공을 익히는 건 불가능하다. 내게 필요한 건…….’

무혼은 천마가 전수해 준 천마신공을 익히기로 했다. 천마로부터 천마신공을 전수받은 건 한참 전이었다. 하지만 이미 양극신공을 익힌 상태라 함께 익힐 수가 없었다. 모든 내공이 양극신공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천마신공을 익히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의 눈물이 새로운 내공의 원천이 될 거니까 익히는 게 가능하지.”

잠마와 싸우면서 입은 내상에 의해 양극신공으로 형성한 내공은 대부분 소멸됐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그 내공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 내공들이 돌아오기 전에 천마신공을 익혀 버리면 설사 양극심공의 내공이 돌아온다고 해도 흡수해 버리면 된다.

“다시 시작하는 거다.”

무혼은 천마신공의 구결을 암송하면서 의식을 단전으로 집중했다. 처음에 단전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가 흐르자 내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전을 나온 내기는 각 혈도를 타고 돌면서 몸을 치료했다. 치료를 담당한 건 바타르가 복용시킨 포션의 기운이었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때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져 있던 신의 눈물 기운을 끌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가늘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주변에 끌어온 신의 눈물 기운이 많아지자 점점 두꺼워졌다.

‘돈다!’

한 바퀴를 일주천 하고 난 천마신공 기운은 팔뚝 두께였다. 내기는 단전으로 들어와 안착하는 듯싶더니 다시 뛰쳐나가 회전하면서 나아갔다.

약했던 회전력이 점점 커지고 사방의 기운을 끌어당겨 흡수했다. 천마신공의 기운은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몸속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내기도 용납하지 않았다. 모든 내기를 끌어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흩어져 있던 양극심공의 기운도 마찬가지였다. 천마신공의 기운은 양극신공의 기운까지 잡아당겨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둥실!

어느 순간 무혼의 신형이 둥실 떠올랐다.

내공이 극에 달하면 운기행공을 할 때 저절로 떠오른다는 부공삼매 현상이었다.

그 시각.

금장생은 종이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그가 적는 건 이곳 지하에서 얻은 무공 열 가지였다. 먼저 여덟 가지를 적고 나서 팔장군을 불렀다.

팔장군은 모두 취침 전이었다.

“이거 받으세요.”

금장생은 팔장군에게 무공 구결을 적은 비급을 한권씩 건넸다.

“이게 뭡니까?”

적사월이 비급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여러분들의 후예가 남긴 무공입니다.”

“우리 후예라고요?”

적사월은 첫 장을 보았다.

마신천마무란 글이 적혀 있었다. 내용을 슬쩍 훑어보았는데 자신이 창안한 무공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들은…….”

금장생은 이곳에서 죽은 팔왕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들이 남긴 무공이란 말입니까?”

“익힐 가치가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한 것 같아서 주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주공.”

“감사합니다.”

팔장군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는 무슨. 내게 필요 없는 거라 드리는 건데요.”

금장생은 빙긋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급 두 권을 챙겼다. 그건 마가 최강 무인 중 두 명인 적무황과 적보영이 남긴 무공이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불여하가 따라 나왔다.

금장생은 불여하를 흘끔 보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할 말 있냐고 물었을 테지만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걷던 둘은 호수에 도착했다.

“사 노왕은 저 안으로 들어가 보았나요?”

금장생은 호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불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호수 안쪽 동굴로 들어간 건 우연이었다. 호수 주변을 산책하다가 금장생과 무혼이 호수에서 나오는 걸 발견했다. 의아하게 여기고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가 동굴을 발견했다. 거기에서 자신의 남편 가부연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놀랍게도 그는 신족의 왕 루하였던 것이다.

“무 형이 모든 걸 잃고 호수로 몸을 던진 누군가를 위해 석판을 놔두자고 해서 없애지 않았는데 사노왕이 그 누군가가 됐군요.”

“하지만 나는 무공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그럼 뭘 봤죠?”

“내가 본 건…….”

불여하는 호수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소리 없이 호수 바닥으로 잠수했다. 곧 금장생이 그녀를 따라 들어가고 두 사람은 루하와 여덟 왕이 무공을 남겨 둔 장소에 도착했다.

“그분의 시체가 여기 있었나요?”

불여하가 물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자세히 보았나요?”

“네.”

금장생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생겼던가요?”

불여하는 금장생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불여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물었다.

“어떻게 생겼죠?”

“나와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습니다. 물론 지금 얼굴이 아니라 금장생 얼굴을 말하는 겁니다.”

“수천 년 전 사람과 현대 사람이 똑같이 생기는 게 가능할 거라고 보세요?”

“아닙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죠?”

불여하의 말이 떨려 나왔다. 그녀는 곧 울 듯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내가 신족의 피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사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루하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불여하를 보자 마음이 변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자신의 남편이었던 가부연이 살아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식에 대해서는 말을 해 줘야 할 거 같았다.

“부연이라는 걸 기억한다는 건가요?”

“네. 하지만…….”

탁!

불여하는 손가락으로 금장생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말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손을 뗀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반 장 거리를 물러나서는 금장생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천첩, 이제야 인사 올립니다.”

절을 하는 불여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이미 루하기 남긴 글을 보았고 부인과 자식을 잃은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남편과 자식을 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에 올리는 절이었다.

금장생은 불여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여하가 부인이란 사실은 기억에서만 존재할 뿐 더 이상 현실이라 할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버렸다.

“천첩이 바보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가족도 지키지 못한 사람이 대의 운운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여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사실 그녀는 깨어났을 때만 해도 자신이 크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들로부터 해방된 중원을 보고 자신이 옳은 결정을 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남편 가부연이 남긴 글을 보았다.

굶어 죽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는 글을 보자 그제야 자신이 크게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대의 운운할 자격이 없는, 대의를 핑계 삼아 남편과 자식을 버린 아주 나쁜 년이었다.

“처음부터 날 알아보았습니까?”

“체형과 얼굴이 똑같았어요. 못 알아보면 그게 더 이상한 거죠.”

“그만 일어나세요.”

“절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아득한 기억 저편의 이야기란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금장생은 불여하 앞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불여하는 바로 금장생의 품에 안겼다. 불여하는 엉엉 울었다. 울음보가 터져 버린 듯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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