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95)
그 녀석이 그다
무혼이 기다리던 기회였다.
헌원소야가 성천사력을 펼치기 전까지만 해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헌원소야가 성천사력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밀렸다.
성천사력은 아스의 몸에 작용하는 게 아니라 탑승자인 자신의 몸을 무력화시켜 나갔다. 역천패력과 양극천강을 동시에 끌어 올려 성천사력을 밀어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헌원소야의 성천사력은 완벽했다.
점점 머릿속이 검어지고 그와 비례해서 몸은 무거워졌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남는 건 패배뿐이었다.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한 가지뿐이었다.
살을 주고 뼈로 받은 것.
그래서 그랜드 크로스로 헬카이져의 검을 감아 전력을 다해 잡아당겼다. 검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헌원소야는 당황했고 검을 뽑아내기 위해 잡아당겼다. 적어도 무혼의 눈에는 헌원소야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두 철갑거인의 거리가 급속도로 좁아졌다.
헬카이져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순간 무혼은 그레이 훼일을 쭉 내뻗었다. 허공을 관통하는 그레이 훼일은 시뻘건 광채를 흘려 댔다.
“웃!”
헌원소야는 움찔했다.
하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헬카이져의 왼손은 수십 개의 손바닥 그림자를 남겼다.
천마 혁지광이 잠마의 무공 중 자신보다 앞선 유일한 무공이라고 하였던 여의만박이었다.
‘기다렸다, 잠마.’
무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급한 순간이 되면 가장 익숙한 동작을 하게 되는데 헌원소야 또한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천마의 무공보다 뛰어난 유일한 무공이 여의만박이었다는 말을 듣고 나자 헌원소야가 여의만박을 가장 자랑스러워할 거라는 확신이 섰다.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해서는 완벽하게 펼칠 줄 알아야 하고, 완벽하게 펼칠 줄 안다면 익숙한 무공일 수밖에 없다. 그 무공이 바로 여의만박이다. 게다가 그날 밤 천마와 토론을 하면서 여의만박의 약점도 찾아 두었다.
‘네 약점은 바로…….’
무혼은 그레이 훼일을 오른편으로 비스듬히 찔러 넣었다. 그 방향이 여의만박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그곳 외에도 몇 곳이 더 있었지만 철갑거인의 하트를 공격할 수 있는 약점은 지금 찔러 넣는 곳 한 군데 뿐이다.
무혼은 전 내공을 끌어 올려 그레이 훼일로 쏟아 넣었다.
“함정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천마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말이냐?”
바타르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나와 무 형은 저 금나수에 대해 토의를 했습니다. 그 토의 결과, 가슴 쪽에서 허점을 발견했습니다. 비스듬히 찔러 넣으면 심장으로 파고들 수 있는 허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허점이 가짜였다는 겁니다.”
“가짜라면?”
“그 허점은 잠마가 상대를 유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거란 뜻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
“포션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천마의 예상대로였다.
“쿡!”
헌원소야의 손이 교묘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뻥 뚫려 있던 허점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레이 훼일을 흘린 헌원소야는 아스의 하트를 향해 왼손을 찔러 넣었다. 세워진 손바닥에서는 붉은 기운이 넘실댔다.
‘젠장!’
무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완벽한 허점인 줄 알았는데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는 완벽한 함정이었다.
―거기서 빠져나와라, 무혼.
바타르의 텔레파시가 들려왔다.
무혼은 전면을 보았다.
헬카이져의 왼손은 아스 하트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아스는 하트가 부서질 게 분명했다.
‘그건 안 돼.’
무혼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전 내공을 아스의 하트로 집중했다.
퍼억!
그 순간 헬카이져의 손바닥이 아스의 가슴을 때렸다.
쩌억!
아스의 가슴에 금이 쩍쩍 갔다.
푸스스!
그리고 가루가 흩어졌다.
‘성공이다.’
무혼은 내심 소리쳤다.
아스가 하트를 구한 건 여성체이기 때문이다. 만일 남성체 타이탄처럼 가슴이 밋밋했다면 방금 공격으로 하트의 절반이 가루로 변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럼 아스는 바로 불능이 된다. 하트는 다 부서지거나 절반만 부서지거나 마찬가지니까.
바로 그때 주먹 하나가 하트를 향해 쏘아져 오고 있었다. 검을 놔 버린 헬카이져의 오른손이었다.
‘이번에는…….’
“차하!”
무혼은 아스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헬카이져의 하트로 몸을 날렸다.
“억!”
헌원소야는 깜짝 놀랐다. 설마 무혼이 철갑거인을 버리고 맨몸으로 공격해 올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하지만.”
헌원소야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나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 해왕.”
헌원소야는 헬카이져의 가슴에 내력을 집중했다. 바로 그 순간 무혼의 주먹이 헬카이져의 하트를 때렸다.
“퍼억!”
“커억!”
하지만 비명을 내지른 쪽은 무혼이었다.
튕겨져 나간 무혼은 무려 십여 장을 날아갔다.
“끝이다, 해왕!”
헌원소야는 바닥을 차고 몸을 날렸다. 그는 무혼을 완전히 없애 버릴 참이었다.
무혼을 향해 막 일 장을 쳐 내려고 하는데 검은 물체 하나가 무혼을 낚아채 갔다.
그는 천마 혁지광이었다.
“뭐냐?”
헌원소야는 버럭 소리쳤다.
“이 친구는 당신이 펼친 반탄강에 당해 이미 의식을 잃었소. 어쩌면 무공을 잃게 될지도 모르오. 여기서 그만 끝내는 게 좋겠소.”
혁지광은 몸을 돌렸다.
“멈춰라!”
헌원소야는 버럭 소리쳤다.
혁지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헉!’
헌원소야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한순간 혁지광이 거대한 산악처럼 보였던 것이다.
“넌…….”
“이 정도로 끝내 줘서 고맙소.”
혁지광은 포권을 취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헌원소야는 멍한 얼굴로 혁지광의 등을 보았다. 조금 전 산악 같았던 기세는 사라지고 지금은 평범한 사람의 등일 뿐이다.
‘너는 누구냐?’
헌원소야는 내심 소리쳤다. 산악 같은 기세를 대하는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만일 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바로 공격을 해서 두 인간을 없애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자가 살아 있는 건 불가능해.’
헌원소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자’라고 부르는 자는 신족의 힘까지 동원해도 넘을 수 없었던 천마였다.
‘그는 인간이니까.’
주르르!
‘응?’
헌원소야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는 얼른 입가를 훔쳤다. 붉은 그것은 피였다.
그는 재빨리 몸 내부를 살폈다.
“욱!”
신음을 내뱉으며 단전에 손을 댔다.
“빌어먹을!”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재빨리 피를 닦아 내고 밖으로 나와 헬카이져를 돌려보냈다.
멀리 물러났던 가솔들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
헌원소야는 손을 번쩍 들었다.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좌우측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함성을 들으며 헌원소야는 왼편 건물을 보았다. 마지막 상대인 금장생을 보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금장생의 얼굴은 너무 태연했다.
‘뭘 믿고…….’
헌원소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금장생이 잔뜩 경직돼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철갑거인 앞에서는 쓸데없는 몸부림일 뿐이다.’
헌원소야는 그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수뇌들이 먼저 자리를 뜨자 나머지 가솔들도 일어나 각자의 처소로 갔다.
금장생은 곧바로 해가 건물로 갔다.
아직은 그가 팔왕이라 다른 가문을 방문하는 걸 크게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곧바로 무혼이 있는 방으로 안내돼 갔다.
무혼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어서 와라.”
바타르는 금장생을 바로 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금장생은 침대 앞으로 가며 물었다.
“응급조치는 했다만…….”
바타르는 말끝을 흐렸다.
“포션으로 안 됩니까?”
“포션을 먹이고 힐링 마법을 펼쳤다만, 저 상태다.”
“이걸로도 안 될까요?”
금장생은 루하가 가지고 있던 신의 눈물을 꺼내 내밀었다.
바타르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반투명한 물체가 들어 있었다. 크기는 달걀만 하고 은은한 광채를 뿌려 대고 있었다.
“뭐냐, 이건?”
바타르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너무 오래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건대 ‘혼천의 물방울’ 같았다.
“신족의 마지막 왕 루하가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신족의 마지막 왕 루하?”
“네. 이름은 신의 눈물이고요.”
“자네가 루하를 어떻게 아는가?”
천마가 금장생을 보며 물었다.
“이곳이 루하가 마지막을 장식했던 곳입니다.”
“루하가 여기서 죽었단 말인가?”
“네.”
금장생은 루하와 팔왕가의 수장들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먼.”
이야기를 듣고 난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되겠습니까?”
금장생은 바타르를 보며 물었다.
“이건 나중에 쓰려고 남겨 둔 거 아니냐?”
바타르는 신의 눈물의 용도를 바로 알아보았다. 무혼이 원래 몸을 되찾으면, 단시간에 내공을 길러야 한다. 그건 영약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때를 대비해 따로 빼 둔 모양이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써서는 안 되는 거 아니냐?”
“일단은 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 기회에 녀석을 강시로 만들어 버리는 게 더 낫지 않느냐?”
“아직은 강시보다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무 형이 더 필요합니다.”
“알았다.”
바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가 있겠습니다.”
금장생은 몸을 돌렸다. 무혼을 치료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싶지만, 오랫동안 머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 우선은 조심해야 한다.
“내일 이길 자신 있느냐?”
바타르는 금장생을 보며 물었다.
금장생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비밀은 잠마 그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나도 몇 가지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
“헌원소야를 이길 수 있을 정도의 비밀이냐?”
“제가 바라는 건 승리가 아닙니다.”
“그럼?”
“그는 내일 기나긴 삶을 마감할 겁니다. 루하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곧 밖으로 나갔다.
“저 친구, 루하하고 무슨 관곕니까?”
천마가 바타르에게 물었다.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여?”
바타르는 되물었다.
“떡 꼬집어 말하긴 힘든데…… 말투에서는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럼 제대로 본 거네.”
“정말 저 친구와 잠마가 불구대천이란 말입니까?”
“불구대천보다 더 안 좋은 사이야.”
“그런 사이도 있습니까?”
천마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불구대천은 부모님을 죽인 원수를 말하는 거 아냐?”
“그렇습니다.”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신을 죽인 자는 어떻게 불러야 하지?”
“자신을 죽인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녀석을 죽인 자가 바로 잠마, 즉 라헬 장로야.”
“잠마가 녀석을 죽였다고요?”
천마의 눈이 커졌다. 그는 바타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그 녀석이 바로 루하야.”
“…….”
천마는 멍한 얼굴로 바타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