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91)
밖으로 나온 금장생은 은신술을 펼쳐 팔왕대 앞 건물로 갔다. 팔왕대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하늘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하늘을 보면서 흑철마신 적무황의 무공 구결을 떠올렸다. 공격 일변도의 무공인 흑철마신만마검은 방어를 몸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흑철마신이라고 부르는 금강불괴지신에 도달하지 못하면 펼칠 수가 없다. 적무황은 흑철마신에 도달하기 위한 공력을 오 갑자로 두었다. 그런데 그 공력은 흑철마신에 입문하기 위한 공력이지 완성 공력이 아니었다.
흑철마신의 완성은 십 갑자가 돼야 이룰 수 있다.
금장생은 이미 십 갑자 공력을 넘어선 상태였다.
그는 천천히 구결을 암송했다.
한참 동안 구결을 암송하던 그는 오른손을 보았다. 손등이 새카맣게 변해 가고 있었다. 전신이 새카맣게 변하는 건 흑철마신이 삼 성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흑철마신 구결을 암송했다.
흑철마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그 검은색은 점점 엷어졌다.
스윽!
그때 뭔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금장생은 시선을 돌렸다.
반 장 옆에서 그림자 하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내 옆으로 누우세요.”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그림자는 금장생 옆으로 와 누웠다. 그는 사운사 사주 기무라였다.
“저길 보세요.”
금장생은 달을 가리켰다.
기무라는 말없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달만 떠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무라는 의아한 눈으로 금장생을 보았다.
“계속 지켜보세요.”
금장생의 말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정말 오랜만에 달을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기무라의 눈이 커졌다.
느닷없이 달빛 속으로 점 같은 물체가 나타났다. 처음엔 밤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래로 내려오면서 엄청나게 커졌다.
“사람?”
기다란 날개 가운데 있는 건 분명히 사람이었다.
“우리를 감시하는 자들입니다.”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사, 사람 맞습니까?”
기무라는 말을 더듬었다.
“실제 날개가 아니고 내기로 만들어 낸 날갭니다.”
“어떤 자들입니까?”
기무라는 물었다.
“신족이라 부르는 자들입니다. 고대의 중원으로 들어왔던 이방인들의 후예고요.”
“이방인이라고요?”
기무라의 눈이 커졌다.
“이방인에 대해 아는 거 있나요?”
“없습니다.”
“저들은 아주 오래전에 들어왔고 중원인과 동영, 조선인을 노예로 부리가 위해 여덟 개의 노예 가문을 만듭니다. 노예들의 수장에게는 왕이란 호칭을 주고요. 수백 년 동안 지배를 당하던 노예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때 주축이 됐던 자들이 팔왕가라 불리는 여덟 가문이었습니다. 결국 전쟁은 노예들의 승리로 끝났고 이방인들은 일부만 남기고 자기네들이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저자들은 돌아가지 않은 일부의 후예군요.”
“그렇습니다.”
어느새 달빛 속에서 빙빙 돌던 자들이 폭포 쪽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꺼지듯 사라졌다.
금장생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기무라도 벌떡 일어났다.”
“정식으로 인사합시다. 나는 황천과 천지황의 주인입니다.”
먼저 금장생이 인사를 했다.
어쩌면 진짜 이름을 말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몰라서 적천영이라는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아케치 가문의 장자 아케치 히데미츠 인사드립니다.”
기무라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상체를 납작 숙였다.
금장생은 기무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육십 대 초반으로 보이고 왜소한 체구 때문인지 몰라도 고집스럽게 보였다.
“나를 전대 쇼군의 후계자로 인정하십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인정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먼저 다이라토미를 없앤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내가 사인루를 공격한 걸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없앤 사인루 자객들은 사백 명 정돕니다. 그들을 없앨 때 발도뇌전류를 펼쳤습니다.”
“사인루에는 팔백 명 정도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사백 명은 어떻게 됐느냐는 질문이었다.
“그곳 감옥에 여자 한 명이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이름은 오다아이고 원래 이름은 아시카가 유키라고 하더군요.”
“전 혈왕이시군요.”
“내가 살려 준 사백 명은 그녀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출병했던 광풍사, 혈수사, 사토사 대원 중 살아남은 팔백 명도 그녀를 따르기로 했고요.”
“그럼 과거 혈가 소속 대원 중 천이백 명이 그분과 함께 있는 셈이군요.”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내가 죽을 판입니다.”
“마가의 살림이 거덜 나는 거 아닙니까?”
기무라는 슬쩍 떠보았다. 자신이 아는 한 마왕은 절대 뇌섬류를 익힐 상황이 아니다. 뇌섬류는 물론이고 마지막 전수자인 요시아키도 동영에 있었고, 뇌섬류의 극이라는 발도뇌섬류는 동영에 있는 특별한 장소가 아니면 완성할 수가 없다. 물론 마왕이 실종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 기간 동안 뇌섬류를 완성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마가 돈으로 그들을 먹이면 큰일 납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까?”
“사업체를 맡겼습니다.”
“사업체요?”
“내가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사업이 몇 개 있거든요.”
“그분은 잘 있습니까?”
“혈왕으로 있을 때보다는 나은 모양입니다. 신경 쓸 게 별로 없어서 그런지 살도 좀 쪘다고 하더군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내가 기무라 상을 부른 이유를 알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내가 다이라토미를 없앤 거에 대해 오해하지 말았으면 해서 불렀습니다. 또 얼굴도 보고 싶었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쇼군에 대해 대원들에게 말해도 되겠습니까?”
“날 쇼군으로 부를 건가요?”
“대원들은 몰라도 전 그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허락하신다면요.”
“중원인인 날 쇼군으로 부르는 건 그렇고 도쿠가와 신켄 그 영감님처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습니다.”
“그분도 함께 있는 겁니까?”
“제자인 오다아이 소저를 구하러 왔다가 함께하게 됐습니다.”
“그랬군요.”
“그리고 나에 대한 건 팔왕이 된 후에 말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만 일어날까요?”
“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그자들은 그냥 둘 겁니까?”
“그들에 대한 처리 역시 팔왕이 된 다음에 생각해 볼 문젭니다. 조용히 사라지게요.”
금장생은 은신술을 펼쳤다. 그의 신형이 조금씩 사라지더니 이내 기척이 완전히 지워졌다.
스윽!
금장생이 사라지고 잠시 후, 검은 인형이 기무라 옆으로 날아내렸다. 그는 신풍사 사주 사이토였다.
“따르기로 하셨습니까?”
“자넨 오다아이 님 본명을 알고 있었는가?”
“본명이 따로 있습니까?”
“아시카가 유키네.”
“아시카가면 전대 쇼군의 성이잖습니까?”
“그분은 요시아키 쇼군 형님의 딸이네. 죽은 줄 알았는데 이곳에 와 있었구먼.”
“사주께서도 몰랐습니까?”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 오다아이 님이 그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네.”
“그런데 마왕께서 자신의 본명을 말했다는 거군요.”
“그분은 마왕이 아니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아는 한 마왕은 동영에 간 적이 없네.”
“실종 기간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기간 동안 동영으로 가서 요시아키 님을 만나서 뇌전류를 배우고 천지황과 황천을 물려받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사이토는 할 말이 없었다. 기무라의 말처럼 그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마가 수뇌부도 알고 있을까요?”
마왕이 가짜라는 건 마가가 뒤집힐 수 있는 엄청난 일이다.
“그분이 부인과 대화하는 걸 본 적 있는가?”
“오래된 친구처럼 아주 편안해 보였습니다.”
“마가를 감시한 이들로부터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두 분은 관계까지 가졌네.”
“부인도 알고 있다는 거군요.”
“내 생각은 그렇네.”
“오다아이 님과는 어떤 사이일까요?”
“오다아이 님이 본명까지 알려 줄 정도면 완전하게 믿는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군요.”
“그분이 마왕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둘만 알고 있어야 하네.”
“물론입니다.”
사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화왕을 이겨야 할 텐데…….”
기무라는 폭포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다이라토미가 말을 해 주지 않아 정확하게 어떤 상황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팔왕가의 모임이 누군가의 감시 속에서 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 대한 말은 없었습니까?”
“총수사 말인가?”
“네.”
“오다아이 님을 내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자들인데, 내 생각엔 제거하는 게 나을 것 같네.”
“그 일은 우리가 맡겠습니다.”
“바로 없애면 금세 표시가 날 거네.”
“다른 곳에서는 그렇겠지만 이곳에서는 괜찮을 겁니다.”
“왜 괜찮다는 건가?”
“우리는 물론이고 몇 개 가문이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암중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자들 짓으로 돌리면 된다는 건가?”
“네.”
“언제 할 건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밤 바로?”
“네.”
“좋네. 가세.”
기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은신술을 펼쳐 모습을 감췄다.
* * *
“빌어먹을!”
이호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대원을 출병시켜 없앤 팔왕가 무인의 수는 육십 명이다. 맨 먼저 혈가 무인을 없앴고 그다음엔 화가와 전가 무인까지 없앴다. 그런데도 각 가문은 조용하다.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기르던 개가 죽어도 난리가 난다. 그런데 대원 스무 명이 죽었는데도 침묵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라헬 장로 때문입니다.”
이호 옆에 서 있던 옥구가 말했다.
“그가 사건을 묻고 있다는 거냐?”
“아마도 살인 사건을 쟁점으로 삼게 되면 자신이 팔왕이 되는 데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팔왕이 된 다음에 처리하겠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옥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없네.”
이호는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벽에 기대앉았다.
“어?”
밖을 바라보던 옥구의 눈이 커졌다.
“왜?”
이호가 물었다.
“아닙니다.”
옥구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신족인데…….’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 마가 쪽에서 커다란 뭔가가 하늘로 솟구쳤다. 잠시 후 솟구친 자의 좌우측에 기다란 뭔가가 생겨났다.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사라졌다. 너무 빨리 사라진 바람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신족 같았다.
‘보고…… 아서라.’
옥구는 묵살하기로 결정했다. 확실하지 않는 건 보고해 봐야 자신만 피곤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동굴로 들어가 드러누웠다.
옥구가 본 사람은 다름 아닌 금장생이었다.
금장생이 날개를 펼친 건, 나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드러나게 날 수가 없어 적신천사마공을 끌어 올리자마자 은신술을 펼쳤는데 옥구가 그걸 보았던 것이다.
“어디 보자.”
금장생은 아래를 살폈다.
“저기 있네.”
금장생의 시선이 커다란 나무 아래쪽으로 향했다. 검은색 무복을 걸친 자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사람이건 신족이건 음식을 먹는 족속은 배설을 해야 하지.”
그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물렸다.
금장생은 날개에 힘을 주었다. 날개가 아래로 향하는 순간 몸이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