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90)
전신이 난자된 다이라토미는 바로 숨이 끊어졌다. 그의 신형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설마 팔왕을 뽑기 위한 비무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휙!
혈가 진영에서 검은 옷을 입은 자가 달려 나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그는 가라앉은 다이라토미를 건져 올렸다.
이자는 혈왕 직할대인 신풍사 사주 사이토였다. 혈왕의 몸은 만신창이었다. 다이라토미를 건져 낸 사이토는 팔왕대 가장자리에 섰다.
그리고 중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혈왕은 정당한 대결에서 패했소. 비록 불행한 상황이 발생했지만 이 일로 인해 팔왕가에서 탈퇴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짝! 짝짝짝! 짝짝짝!
관중들은 박수로 자신들의 심정을 대신했다.
사이토는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날렸다.
―방금 그자는 누구죠?
사미염에게 전음을 보냈다.
다른 가문 요인들에 대한 정보는 군사 유공보다 사미염이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신풍사 사주 사이토란 자예요. 전 사주였던 구라다의 제자예요.
―구라다?
금장생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구라다를 아세요?
―네.
―혹시 그를…….
―맞습니다. 내가 목을 잘랐습니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아무튼 그 구라다의 제자가 맞고 현 혈왕보다는 전 혈왕에 대한 충성심이 더 강하다고 알려져 있어요.
―전 혈왕이면 오다아이를 말하는 건가요?
―네.
―만일 오다아이를 데려오면 혈가를 장악할 수 있을까요?
―현재 혈가에 남아 있는 병력은 신풍사와 사운사 팔백 명뿐이에요.
―만약 전 혈왕이 돌아온다면 받아 줄까요?
―받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어디 있는 줄 알면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모시고 와야 할 상황이에요.
―그렇군요.
―데리고 오려고요?
―전쟁을 치르려면 무인이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하잖아요.
―팔왕이 될 자신은 있어요?
―다이라토미를 없앤 걸 보고 나서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
―마왕을 믿어요. 그런데…….
―할 말 있어요?
―어젯밤에 우리 이불 덮어 주었어요?
―네.
―그때 난 어떻게 하고 있었는데?
―큰대자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불을 덮어 주었다고요?
―그래서 덮어 준 겁니다.
―네?
―기온이 생각보다 차가웠거든요.
―흠!
아수수 옆에 앉아 있던 사미염은 금장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질문을 했다.
―그것뿐이에요?
―네.
―자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했다고요?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요?
―빙빙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적천영과 먼저 사귀었다고 했던가요?
―네. 그랬는데 수수 저것한테 빼앗겼어요.
―그래서 그런 겁니다.
―뭐가요?
―마왕을 빼앗긴 이유 말입니다.
―내가 너무 직설적이라서 싫어했다는 건가요?
―장사도 성공하는 사람을 보면 내심을 숨기는 기술이 탁월하거든요.
―풋! 생각해 볼게요. 그런데 누가 나았어요?
―뭐가요?
―우리 둘의 알몸을 모두 본 두 번째 남자가 당신이거든요.
―첫 번째는 누군데요?
―적천영 마왕이지 누구겠어요.
―그 사람도 참…….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왜요?
―정인의 친구와 혼인을 한다는 건 보통 사람은 하기 힘들잖아요.
―유일한 친구에게 정인을 빼앗기고도 여길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내가 바보 같죠.
―글쎄요. 그건 각자 가치관에 따라 다른 거니까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다친 덴 없어요?”
아수수가 금장생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조금도 이상 없습니다.”
금장생은 빙긋 웃으며 그의 자리에 앉았다.
“그럼 저들에게 인사나 하세요.”
아수수는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각 가문의 가솔들을 눈빛으로 가리켰다.
“일부러 안 한 건데 인사를 하는 게 나을까요?”
금장생이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돌아온 건 다이라토미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전후 사정이 어떻게 됐건, 팔왕을 뽑는 비무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건 기뻐할 일은 절대 아니었다.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각 왕가의 가솔들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혈왕의 일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나와 그는 묵은 감정이 있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내가 이 무기를 들고 나온 건 혈왕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면 이 무기는 나와 내 부인을 공격했던 사인루를 없애고 얻은 전리품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무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날 죽이려고 했습니다. 만일 내가 혈왕보다 약했다면 내 부인은 지금 미망인이 됐을 겁니다. 단지 내가 운이 더 좋았을 뿐입니다. 혈가가 새로운 혈왕을 중심으로 번창하길 바랍니다.”
금장생은 일행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 비무는 끝났습니다!”
나박이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각 왕가 가솔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다.
사이토가 금장생을 찾아온 건 그날 밤이었다.
사이토는 각진 얼굴의 큰 덩치를 가진 전형적인 무장형 사내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금장생은 자리를 권하면서 말했다.
“내가 올 걸 알았단 말입니까?”
“뇌섬류를 확인하러 온 거 아닙니까?”
“…….”
사이토는 말없이 금장생을 보았다. 뭔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정리가 끝난 듯 그는 질문을 했다.
“혹시 뇌섬류는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거였습니까?”
“전에도 펼쳤는데 제법 효과가 있더라고요.”
“언제 펼쳤단 말씀이십니까?”
“뇌섬류를 처음 펼친 곳은 사인루였고, 광풍사와 사토사, 혈수사 공격을 받을 때도 펼쳤습니다. 참! 그땐 이것도 끼고 있었습니다.”
금장생은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에는 쇼군을 상징하는 천지황이 끼어져 있었다.
“그, 그건 천지황!”
사이토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리고 이 녀석도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탁자 위에 놓아둔 왜도를 가리켰다. 그가 꺼내 놓은 왜도는 낮에 비무 때 사용했던 그 왜도가 아니라 요시아키에게 물려받은 황천이었다.
“화, 황천?”
사이토는 벌떡 일어났다.
천지황과 황천은 곧 쇼군의 재림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다리를 구부리지 못했다. 금장생이 사이토의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게 내공으로 붙잡아 버린 탓이었다.
사이토는 금장생을 보았다.
“나는 마지막 쇼군의 진전을 이었을 뿐 쇼군이 아닙니다. 쇼군이라고 하기보다는 이런 걸 이용해서 여러분들의 복종을 받아 내려는 소인배에 불과합니다.”
“천지황과 황천은 쇼군의 신물입니다. 아울러 전 쇼군으로부터 물려받았다면 쇼군이십니다.”
“여긴 중원입니다. 사이토 상,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사이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만일 내가 팔왕이 된다면 혈가 무인들이 날 따를 거라고 보십니까?”
“그건…….”
사이토는 말끝을 흐렸다.
“어려울 거란 말이군요.”
“천지황과 황천 그리고 뇌섬류를 익혔다고 해도 현 혈왕을 살해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신풍대는 현 혈왕보다 전 혈왕을 더 따랐다고 하던데…….”
“어떤 혈왕을 지지하는가는 이번 사건과 별갭니다. 우리 신풍대가 전 혈왕을 더 따른 건 현 혈왕이 살아 있을 때 이야깁니다. 죽고 나면 생전에 그가 저질렀던 과는 대부분 사라지고 공만 남습니다.”
“과거에 한 짓과는 상관없이 추모할 거란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전 혈왕이 오면 잘 따를까요?”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분뿐만 아니라 도쿠가와 신켄도, 혈왕이 있는 곳도 압니다.”
“혹시…….”
“맞습니다. 두 분은 함께 있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계시는군요.”
사이토는 격동한 얼굴로 말했다.
“한창 장사를 준비를 하고 있을 텐데…….”
“장사요?”
“그런 게 있습니다. 혹시 발이 빠르고 믿을 만한 사람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내 심부름 하나 해 주어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서찰은 내가 팔왕이 되면 써 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사이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쉬십시오.”
그는 금장생을 향해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참!”
“말씀하십시오.”
사이토는 얼른 몸을 돌려 금장생을 보았다.
“지금 남아 있는 자들 중에 오다아이 혈왕을 싫어하는 자들 있을까요?”
“총수사들은 싫어할 겁니다.”
“총수사는 다이라토미의 심복인가 보죠?”
“네.”
“그들 중 회유 가능한 자들은?”
“오다아이 혈왕께서 돌아오시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자들입니다.”
“여지가 없다는 거네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사운사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중립을 지켜 왔습니다.”
“사주가 누굽니까?”
“기무라라고, 원래 성은 아케치입니다.”
“아케치면 요시아키 님의 가신 가문 중 한 곳으로 알고 있는데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성을 바꿨다는 말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정확하진 않습니다.”
“자정에 팔왕대에서 보잔다고 해 주세요.”
“천지황이나 황천에 대해 말해도 됩니까?”
“그런 것들을 말하지 않으면 안 올걸요?”
“알겠습니다.”
“은밀하게 오라고 하세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사이토는 고개를 숙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그가 떠나고 나서 얼마 후 아수수가 보자기로 싼 뭔가를 가지고 왔다.
“뭡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야식요.”
“야식?”
“이 시간 되면 배가 약간 고프잖아요.”
아수수는 싸 온 걸 내려놓고 보자기를 풀었다. 그녀가 가져온 건 삶은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이었다.
“얼굴이 전보다 좋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들 때문이었군요.”
금장생은 삶을 닭을 가리켰다.
“저 살쪘다는 거예요?”
아수수가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는 물었다.
“살이 쪄 보이는 게 아니고 지금이 딱 좋다는 겁니다. 피부도 더 탄력 있어진 것 같고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는데. 정말 살찐 건 아니죠?”
“네. 한 잔 할래요?”
금장생은 술병을 들었다. 아수수가 가져온 건 천주였다.
“좋아요.”
아수수는 술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금장생은 술을 따라 주고는 병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안 들어요?”
“이따가 사람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술은 빼고 닭고기만 먹겠습니다.”
금장생은 젓가락으로 닭고기를 한 점 뜯었다.
“야심한 밤에 만날 사람은 여자뿐인데…….”
아수수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금장생을 보았다.
“난 절대 아냐.”
천장에서 사미염이 뚝 떨어지며 말했다.
“너, 그 근무복 안 바꿀 거야?”
아수수는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난 야행복을 고수하고 있는 사미염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나는 이 옷이 좋아, 이것아.”
“아예 벗어라, 벗어.”
“지금 그 방법도 생각하고 있어.”
“뭐야?”
“내 은신술은 발가벗었을 때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는 거 너도 알잖아.”
“벗으면 죽여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제 것도 아니면서…….”
“뭐라고?”
“됐어, 이것아.”
사미염은 아수수의 젓가락을 집어 들고 닭고기를 뜯었다.
“너, 근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술은 안 마시고 닭고기만 먹는 거잖아.”
“그거 처먹고 살이나 혹 쪄 버려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지가 하고 있네.”
“다녀오겠습니다.”
금장생은 밖으로 나갔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티격태격하는 여자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 밖이 더 나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