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386화 (386/524)

황금가 (386)

그의 시체

“도대체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이유가 뭔데?”

“네 사생활을 훔쳐보려고 오는 게 아니라 일을 하는 거야.”

“자꾸 그러면 그 사람에게 말해서 백팔무영비 비주를 바꿔 버리라고 한다?”

“그러든지.”

“정말 그래도 돼?”

“그럼 나는 내 할머니께 가서 그 사람과 혼인시켜 달라고 해 버릴 거야.”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그 사람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면, 우리 할머니는 백번 도 더 허락해 줄걸?”

“그 사람이 가짜라는 걸 말하겠다는 거야?”

“응.”

“증거 있어?”

“난 백팔무영비 비주야. 그 사람이 가짜라는 증거는 수십 가지도 더 확보해 두었어.”

사미염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녀는 금장생이 가짜라는 증거를 찾을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금장생에게 죽임을 당한 적지영 일행도 찾지 못한 증거를 자신이 찾아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더하여 그 말을 믿을 사람도 없다. 하지만 아수수에게 통한다.

“진짜?”

“그렇다니까. 내 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시집보내고 싶어 하는지 알지?”

“잘 알지.”

“그런 상황에서 그 사람이 가짜고 내가 진짜 좋아한다고 말하면 젊었을 때 천살후天殺后란 별호로 불렸던 내 할머니가 어떻게 나올 것 같아?”

“알아서 해, 나쁜 년아.”

아수수는 사미염 옆으로 엎드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사람이 팔왕이 되고 싶대.”

먼저 아수수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 안 하려고 했어?”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 같고, 팔왕이 되면 솔선수범해야 하니까.”

“마가 무인을 선봉으로 세워야 하는 상황을 걱정한 거였구나.”

“응.”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지?”

“그걸 모르겠어.”

“뭔가 있는데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아?”

“그런 것 같기는 한데…….”

“너는 어때?”

“나?”

“네가 주인이잖아.”

“나는 처음부터 그 사람이 팔왕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럼 된 거네, 뭐. 그가 말을 안 한 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문제는 헌원소야가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거야.”

아수수가 우려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은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던데, 아냐?”

“네 눈에는 그렇게 보였어?”

“넌 아냐?”

“나도 그런 느낌을 받기는 했는데…….”

“그리고 자신 없는 사람은 여자를 그렇게 안지도 않아. 그러니까 걱정 붙들어 매. 그리고 정력은 곧 무공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 사람 정도의 정력이면 헌원소야 같은 자 백 명이 몰려와도 끄떡없을 거야. 나만 믿어.”

“네가 그 사람 정력이 좋은 걸 어떻게 아는데?”

“다 아는 수가 있어. 나 피곤한데 한숨 자도 되지?”

“옷 입고.”

“그 사람 오면 깨워. 그때 잽싸게 도망쳐 줄 테니까.”

사미염은 눈을 감았다.

“그래, 알아서 해라.”

아수수는 사미염 옆으로 드러누웠다.

한편.

처소에서 나간 금장생은 은밀하게 움직여 팔왕대에 도착했다. 그가 먼저 온 듯 무혼은 보이지 않았다.

“응?”

하늘을 올려다보던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달빛 속에 날개를 활짝 편 자들 십여 명이 날고 있었다. 그들은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금장생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는 전 내공을 끌어 올렸다. 잠시 후 그의 귓전에 사라진 자들의 기척이 감지됐다. 그는 기척을 쫓았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북쪽의 폭포 위였다.

“저기네.”

금장생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물렸다. 잠시 그곳을 바라보던 그는 처마 밑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혼이 온 건 일각 후였다.

무혼 역시 주위를 살피며 은밀하게 다가왔다.

―바로 들어갑시다.

금장생은 곧바로 몸을 날려 호수로 들어갔다. 은신술을 펼친 상태로 물만 좌우로 갈라졌을 뿐 그 외 흔적은 없었다. 무혼 또한 곧바로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잠수한 상태에서 헤엄을 친 두 사람은 동굴처럼 보이는 곳 입구에서 멈췄다.

금장생은 입구를 가리켰다.

두 사람은 곧바로 동굴 안으로 헤엄쳐 갔다.

하지만 바로 멈췄다. 반 장가량 들어왔을 뿐인데 막다른 곳이 나왔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막다른 곳일까요?

금장생은 혜광심어를 보냈다.

―그럼 저게 뭐라고 생각해?

―겉모습은 바위인데 실제론 통로인 곳을 많이 봐서요.

버려진 땅에서 경험했던 통로가 떠올라 말했다.

―마법일 수도 있다는 거야?

―정확한 건 나도 모릅니다.

―잠깐 기다려 봐.

무혼은 벽에 손바닥을 대고 내기를 끌어 올렸다.

―맞아.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란 말인가요?

―응.

―어떻게 열죠?

―마법으로 열어야지.

―오픈 마법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

―그럼 내가 해결할 수 있겠네.

금장생은 주머니 안에 넣고 다니는 가방을 꺼내 마법 지팡이 일라일라를 꺼냈다.

그리고 일라일라 끝을 벽에 대고 오픈 마법을 펼쳤다. 일라일라 끝에서 흘러나온 푸른색 광채가 벽으로 스며들어 갔다. 스며든 광채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잠시 후 벽은 일렁거렸다. 마치 달빛을 받은 수면 같았다.

―가자.

무혼은 곧바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몸이 물에 빠지는 것처럼 쑥 들어갔다. 무혼에 이어 금장생도 안으로 들어갔다.

벽은 거의 세 자 정도였다. 두 걸음을 내딛자 신선한 공기가 맞았다.

그곳 역시 동굴이었다. 동굴 벽에는 희미한 광채를 뿌리는 등이 걸려 있었다. 등과 등 사이 거리는 이 장 정도였다.

“저건 마법으로 만든 건가요?”

금장생은 등을 가리키며 물었다.

“응! 마법등이라고 해.”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걸 만들 수 있다면 아주 편리하겠네요.”

“편리하긴 한데 만드는 건 쉽지 않아. 마법등을 만드는 마법사도 많지 않고.”

무혼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왜 안 만들죠?”

“쓸모가 없으니까 안 만들지, 왜 안 만들겠냐?”

“등은 각 가정에서 매일매일 쓰는 건데 쓸모가 없다고 하는 건…….”

“내가 말한 건 일반 가정집 입장이 아니라 마법사 입장이야.”

“만들어서 팔면 떼돈을 벌 것 같은데, 아닌가요?”

“돈?”

무혼은 금장생을 보았다.

“각 방마다 하나씩 있어야 하고 마실 나갈 때도 하나 정도는 들어야 하니까, 각 가정당 최소 다섯 개는 있어야 합니다. 명나라 가정의 수를 천만 호로 가정하면…….”

“너는 장사꾼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마법사는 저따위 마법등을 만들어서 팔 생각은 죽어도 안 해.”

“돈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복잡하게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것보다는, 돈을 만들어 내는 게 더 빠르다고 생각하는 자들이거든.”

“정말로 마법이 강해지면 돈을 만들 수 있습니까?”

금장생은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물었다.

“금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자들은 많은데 아직 성공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어.”

“그럼 불가능하다는 거네요.”

“글쎄, 계속 연구를 한다는 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뜻 아닐까?”

“아무리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수백 명이 실패했다면 불가능할 걸로 보고 포기하는 게 낫습니다.”

“잘 생각했다. 어?”

무혼의 눈이 커졌다.

통로 오른편에 석실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궁금한 건 이곳 지하를 누가 왜 만들었냐 하는 것이었다.

안쪽에는 오래된 유골 한 구가 흩어져 있었다.

“이거 봐.”

무혼은 시체 심장을 가리켰다. 아직 뼈는 남아 있었는데, 칼에 찔린 형태의 흔적이 있었다.

풀썩!

손으로 살짝 건들자 뼈는 바로 가루로 변했다.

“뼈가 삭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흐른 모양이네요.”

금장생은 손바닥으로 뼛가루를 쓸었다. 잠시 후 바닥이 드러났다. 바닥에는 글이 남겨져 있었다. 고대에 씌었다는 갑골문이었다.

“읽을 줄 알아?”

무혼은 금장생을 보며 물었다.

“네.”

금장생은 글 앞으로 갔다.

어쩌면 나는 마지막 팔왕이 될지도 모르겠다.

“팔왕이 남긴 겁니다.”

“계속해 봐.”

우리는 승리를 목전에 두었다.

중원을 되찾은 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두었다. 그때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첩보가 입수됐다. 그건 바로 신족의 왕 루하가 우리가 만든 비밀 장원으로 숨어들어 갔다는 정보였다.

신족의 왕 루하.

그는 여덟 가문의 왕들 중 가장 신망이 놓았다. 그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는 승리한다고 해도 반쪽에 불과하다는 게 우리 모두의 생각이었다.

루하가 신족 사장로로부터 축출당했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는 그의 머리가 필요했다.

우리 여덟 명은 별동대를 조직해서 이곳으로 왔다.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기다린 건 ‘죽은 자들의 군단’이라 부르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들과 싸웠다. 그런데 이름처럼 그들은 정말로 죽지 않았다. 잘렸던 팔이 재생하고, 떨어진 머리가 다시 붙었다. 머리를 가루로 만들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가루는 하나로 뭉쳐 다시 머리가 됐고 떨어진 자리로 가 붙었다.

이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싸움에서, 승자는 죽은 자들일 수밖에 없다는 건 진리다. 왜냐면 이미 죽은 자들은 다시 죽일 수가 없으니까.

우린 이곳 지하까지 들어왔다.

이곳은 지상이 점령당했을 때를 대비하여 만들어 둔 대피소다. 하지만 놈들은 여기까지 쫓아 들어왔고 우리는 하나둘 죽임을 당했다.

이 글을 누가 볼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팔왕의 문으로 가라.

유언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언제쯤 남긴 건지 알 수 있어?”

다 듣고 난 무혼이 물었다.

“그런 걸 알기엔 전란의 시대가 너무 오래전에 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짐작 가능한 건, 전란의 시대가 끝날 즈음이라는 겁니다.”

“저자가 남긴 유언으로 보면 팔왕가의 가주들이 여기서 모두 죽었다는 건데…….”

“다른 사람을 한번 찾아볼까요?”

“그러자.”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그 후로도 몇 구의 시체를 더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혹시 글을 남겼던 분이 언급한 그들에 대해 아세요?”

금장생은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정확하게 어떤 존재인지는 몰라. 하지만 비슷한 존재는 있어.”

“어떤 존잽니까?”

“리치라고 하는 자들인데 불사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야.”

“리치는 안 죽나요?”

“리치를 죽이는 방법은 딱 한 가진데 영혼의 그릇 안에 들어 있는 걸 부숴야 해.”

“영혼의 그릇 안에 뭐가 들어 있는데요?”

“리치의 심장.”

“몸에 지니고 다니진 않겠죠?”

“몸에 지니고 있으면 굳이 따로 보관할 이유가 없잖아.”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긴가?”

무혼은 전방에 있는 커다란 문을 가리켰다.

“맞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 위쪽에 ‘팔왕지문’ 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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